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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그건 사랑이 아니야 (that is not love)

by 격암(강국진) 2011. 2. 14.

최근 몇편의 사랑에 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중 두편의 영화가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와 사요나라 이츠카입니다. 사랑이야기는 제가 즐기는 것이며 이번에도 즐겁게는 봤습니다만 동시에 뭔가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았더니 문제는 좀더 깊은데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사랑이란 이런거야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말을 할수 있을 까요. 제 생각에 우리는 사랑이 뭔지 (what is love)를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사람들이 이게 사랑이야라고 말하거나 믿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that is not love) 말할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가장 하기 어려운 이야기인지도 모르며 영화의 설득력과 사랑의 본질은 서로 충돌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두시간 남짓한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영화의 모든 부분들은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니라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성격의 앞뒤 일관성을 지키지 못할 경우 보는 관객은 이건 말이 안된다고 느끼고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가 시작할때는 매우 대담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여자가 다음 장면에서는 수줍어 하고 그 다음장면에서는 잔혹하게 나오며 마지막에가면 순정파로 나온다면 이런 변화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변화의 이유를 보여주지 않을 때 사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그 캐릭터의 행동이 이해가 안가고 말이 안된다고 느끼는 것이죠. 저는 사요나라 이츠카를 보면서 주인공들의 성격에서 이런점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는 오랜간 흥행에 성공했고 한국에서는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 한국인의 문화고 원리따위는 믿지 않는, 즉흥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상대주의적인 일본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이거야 지나친 확대해석일테죠.

 

사요나라 이츠카와는 달리 서양영화인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는 훨씬 일관성있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를 보고 네티즌이 남긴 평중에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칭찬한 것이 있더군요. 말하자면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현실은 이러하다고 일관성있게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사요나라 이츠카보다 한국에서 평도 높게 받았습니다. 이런 일관성있는 이야기는 사랑이란게 이런거 아니냐는 메시지를 보다 짙게 보여줍니다.

 

 

 

 

 

나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우리는 흔히 뭐뭐 때문에 뭐뭐한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합니다. 사실 나같이 과학이 직업인 사람은 더더욱 이런 성향,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랑이란 뭘까를 찾고 사랑에 대한 일반론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답을 찾기전에 질문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축축한 불을 찾는 것은 애초에 질문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이런거다라는 설득력있는 이야기에 더 많이 설득되는 순간 그 이야기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사랑에 보다 무지해 집니다. 나쁜건 더 무지해 지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최악의 상태라는 것이죠.

 

사랑에 대한 합리화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 나를 만나기전에 많은 연애를 한 상대가 있다고 해봅시다.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연인으로 만나지고 보내졌습니다. 나역시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럴때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보통 이런식이기 쉽습니다. 연애가 별건가. 그런건 아무것도 아냐. 혹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젠 그녀 혹은 그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야. 과거는 의미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과거의 그나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이젠 최종적인 사랑에 도달한거야.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을 서로 연결해서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내가 첫사랑과 맺어질수 없었다면 사랑이란게 별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던가 아니면 나와 그녀는 이젠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서 이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이 사람을 이러저러한 사람으로 알고 있으며 따... 그나 그녀를 사랑한다는 그림을 의식적으로 무의힉적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사랑에대한 그럴듯한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론은 한마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 세상에서 사랑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말이 되게 조합한 설명입니다. 이론은 그 본질상 주어진 질문에 대해 객관적이고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사랑에 대한 이론이란 사랑이란게 이런거 아냐?라고 우리에게 답을 던집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사랑에 대해, 혹은 사람 자체에 대해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맞춰서 하나의 말이 되는 그림을 완성합니다. 우리는 가끔은 사소한것때문에 폭팔합니다. 예를 들어 기념일을 잊어버린 연인에 대해 큰 실망을 하는 것은 기념일에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이상으로 상대방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가지는 그림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나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얻게된 새로운 증거를 잊어버릴수가 없고 그렇다고 이미 가지고 있는 그림에다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것입니다. 우린 그 기억의 조각을 들고 어쩔쭐 모르게 되며 마음이 아직 상대방에게 있어도 괴로움에 참을수가 없게 됩니다. 심하면 완벽을 추구하는 그림을 그리다가 한곳에서 실패하면 너무나도 멋진 그림을 폐기하는 것처럼 한조각의 별거아닌 기억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너무나 마음에 드는 사람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 한조각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괴로움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 버리고 기억이 백지인 상대를 만나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계속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기 마련입니다.

 

합리화의 문제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에서도 발생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이혼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우리 부모님은 좋은 사람이다라고 믿고 싶은 아이는 이런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부모님은 좋은 분들인데도 이혼을 했다. 결국 이혼이란거 별거 아니다. 그냥 누구나 할수 있는 선택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부모님은 예전의 그 부모님이 아니며 이젠 실수를 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할 방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들이 생존해 있는데 재결합하고 있지 않다면 결국 부모님들이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명제와 이혼은 나쁜 일이다라는 명제는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부모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믿거나 아니면 이혼이 뭐 별건가라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과 합리화가 같이 만들어 내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뭔가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실은 사랑에 대해 더욱 무지해 집니다. 중년신사는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초등학생의 짝사랑을 보면서 자신의 능수능란함을 자랑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분위기를 잡으면 여자는 넘어오기 마련이라는 충고를 할지도 모릅니다. 사람이란게 이런거야라고 말하면서 사람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꼬마에게 인간이 뭔지를 설명해 줄지도 모릅니다. 이 꼬마는 그런 앞뒤가 딱딱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에 감동해서 맞아 이런게 사랑이야라고 굳게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대개 카사노바가 되기를 꿈꾸지는 않더라도 사랑에 대해 능숙하고 세련되고 뭐든지 알고 있는 것같으며 슈퍼맨처럼 사랑을 성공시킬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꿉니다.

 

그런데 실은 사랑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이꼬마는 짝사랑의 상대를 보면 가슴이 찌릿찌릿하게 사랑을 느낍니다. 반면에 사랑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 중년신사에게 사랑이란 김빠진 미지근한 맥주나 아침마다 하는 일상적인 치솔질 같은 반복되는 일상의 부분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소년의 서투른 감성을 중년의 노회함으로 대체하는 것이 지혜이고 사랑에 대해 배우는 것일까요? 오히려 아까운 것아닐까요? 사랑에 대한 영화를 한편보고 아 그래 사랑이란 이런거야라고 뿌듯하게 느끼는 그 감정이 실은 같은 잘못을 하는게 아닐까요? 정말 사랑이 뭔지 느끼고 싶다면 사랑에 대한 잡스런 이론을 머리에 넣는 대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입니다. 이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고 내가 오렌지를 먹고 느낀 그느낌은 어떤 길이의 묘사로도 대체될수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은 여기는 단한번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유일한 것들은 인과론이나 합리성, 과학성을 따질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 제비가 낮게 날더니 비가 오더라라는 관측을 통해 오늘 날씨를 예측한다는 것은 제비가 나는 높이라는 조건 하나가날씨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렇지 않고 오늘의 상태에서 날씨와 관련있는 것이 수천만 수조 가지라면 제비가 높게 날건 낮게 날건 우리는 그걸 날씨와 연관지을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란게 이런거 아니냐는 태도로 생각하고 어떤 남들이 납득할만한 규칙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그것이 제아무리 그럴듯하고 정교한 사랑의 정의를 주는 것이라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랑을 매우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과학을 적용하는 것도 훌룡한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한도에서만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가짜로 초라한 것으로 대체해 버리게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내가 나의 연인이 얼마나 아름답다고 영리하다고 제아무리 칭찬을 하더라도 그걸 사랑과 부적절하게 연관시키는 순간 (다시말해 나의 연인은 뭐뭐하다 따라서 그녀는 사랑스럽다라고 말을 만드는 순간) 그 상대는 초라해 집니다. 제아무리 부자라도 더 부자가 있기마련이듯이 제아무리 미인이라도 더 미인이 있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 체력도 아름다움도 지력도 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나면 나는 단지 더 아름답고 대단한 사람을 연인으로 삼을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연인으로 삼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도 나에 대해 그렇고 따라서 이제 전세계에는 오직 한쌍의 승자커플만이 존재가능하며 모든 다른 연인들은 패배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에 상처입은 사람들은 대개 상처입지 않기 위해 사랑에 대해 말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려고 더욱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본래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상처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든 걸 확실하게 만든 순간 그렇게 상처입지 않으려고 확실하게 만들려는 우리의 행동이 사랑자체를 죽이게 됩니다. 확인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어떻게 보면 이야기가 말이 안되는 정도와 사랑의 정도는 서로 비례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부족하나마 가장 좋은 설명은 인연이라는 말일겁니다. 인연은 사실 사랑만큼이나 정의하고 설명하기를 포기한 단어입니다. 그래도 인연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어떤 다른 이미지를 줍니다. 그만큼이 이론이 작동하는 부분입니다. 사랑에 대해 제아무리 멋진 이야기를 하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도, 세련된 동경이나 뉴욕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들이 제아무리 멋져보여도 실은 그 이야기는 유치해 보이는 우리의 전통 이야기, 청실홍실이야기보다 사랑의 본질에서 멀리 있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나 청실홍실 이야기는 시간을 넘어서 살아남을 것이지만 세파에 따라 이러니 저러니 하고 만들어낸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 금새 잊혀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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