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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이야기 : 인투 더 와일드

by 격암(강국진) 2011. 9. 21.

11.9.21

야생속으로 라고 번역해야 할 인투더 와일드는 배우로도 유명한 숀펜이 2007년에 감독한 영화다. 주연은 에밀허쉬인데 나는 전에 그가 주연한 다른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실존인물 크리스토퍼의 방랑과 죽음을 그린 영화다. 1968년생인 크리스토퍼는 하버드법대라도 들어갈만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대학의 졸업과 동시에 모든 문명적인것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탈주를 계속한다. 대학을 졸업한 크리스토퍼는 낡은 차를 타고 방랑을 시작하여 차를 버리고 돈도 태워버리고 걷고 남의 차를 얻어타는 방랑을 한다. 그러는 가운데 집시 부부를 만나고 예쁜 소녀 가수와 만나기도 하며 자신을 양손자로 받아주겠다는 노인을 만나기도 한다. 한번은 카누를 타고 멕시코 국경을 건너서 멕시코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모든 문명적인것, 위선적인 것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 길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결코 정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진정 아무도 없는 야생으로 가고자 한다. 그곳은 알래스카였다. 알래스카에 도착한 그는 사슴사냥꾼이 임시거처로 쓰는 낡은 버스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부족한 식량을 가지고 카메라와 책 몇 권을 가진 채 혼자만의 삶을 시작한다. 

 

크리스토퍼의 방랑에 있어서 시작이었고 그 본질이었던 것은 사실은 그의 부모와 가족이었다. 나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이고 겉으로 보기에 매우 존경할 만한 가족같아 보이는 그의 집안은 실은 그 내부적으로 위선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토퍼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와 만날 때 이미 결혼한 여자와 자식까지 있었으나 그 처자식을 버리고 크리스토퍼의 어머니와 야합하여 가정을 이룬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크리스토퍼로 하여금 모든 존경할만한 것, 모든 공평해 보이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고 결국은 문명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알래스카로 가기 전에 만난 한 노인은 야생으로 떠나는 크리스토퍼에게 너의 상처는 잘 알겠다면서 하지만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충고한다. 가족을 용서하고 포용할 때 새로운 빛이 보일 것이라면서. 크리스토퍼는 그런 충고를 뒤로 하고 알레스카의 황야로 향한다. 결국 크리스토퍼는 거기서 사냥하고 사색하고 사진도 좀 찍고 책도 읽다가 죽었다. 들어갈 때는 겨울이어서 문제가 없었던 강물이 불어나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고 그래서 식량이 없던 크리스토퍼는 풀을 뜯어먹다가 죽게 된것이다.

 

영화는 메세지를 마지막에 두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크리스토퍼가 책에 쓴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거기에는 행복은 나누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또 하나는 그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성까지 포함해서 모두 나무판에 새기는 행동을 보여준다. 이제 자기의 진정한 이름을 알았다는 크리스토퍼, 일찌기 자신의 가족을 부정하고 자신을 방랑자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말하던 크리스토퍼의 이런 행동은 그가 가족을 용서했다는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같다. 그는 결국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주는 가장 첫번째의 기쁨은 그것이 옳은 것이건 아니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길을 나선다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의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에 얽매여 있으니 그렇게 길을 나선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쁨을 준다. 

 

두번째는 물론 크리스토퍼의 메세지에 찬동하건 하지 않건간에 우리는 그를 통해 생각에 잠길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를 뛰쳐나간 크리스토퍼의 선택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그 동기의 일반성에 대해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떤 위선 속에서 얽매여 살면서 조금씩 썩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무모해 보일지라도 순간 순간을 느끼고 자신이 되겠다고 하는 크리스토퍼의 모습이 우리의 나태와 무감각에게 어떤 경종을 울리지 않을까.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탈주에 대한 낭만주의적 향수를 그린 것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가만히 보면 사실 우리는 일종의 역설을 보게된다. 돈을 태워가면서 가족과의 연락을 끊어가면서 끝끝내 혼자가 되어 야생으로 달려가겠다는 크리스토퍼이지만 크리스토퍼의 가난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우리는 더욱더 생생히 그가 세상 모든것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여러곳에서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도움을 받는다. 크리스토퍼는 다른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사랑도 주지만 결국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 

 

크리스토퍼는 장화를 공짜로 얻는가 하면 사슴사냥꾼의 임시거처에서 총과 매트리스와 성냥과 난로등 모든 것을 얻는다. 심지어 사람없는 그 곳에서 그의 먹이가 되어 죽어가는 새들과 짐승에게도 그는 의존한다. 나혼자만의 세상에 가겠다던 그는 결국 혼자가 되면 될수록 그가 세상에 더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생생히 느끼고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사랑의 결론을 가지고 죽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오히려 사람들은 너무 많이 가지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에 의존하고 살고 있는지 못느끼는 것이 아닐까. 항상 배부른 사람이 음식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듯이 말이다. 

 

왠지 일상사가 지나치게 반복적이다싶을 때 볼 수 있는 영화로 나는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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