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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 오구 : 대동의 굿판

by 격암(강국진) 2011. 9. 27.

11.9.27

영화오구는 2003년에 나온 것으로 한국 연극계에서는 유명한 연극 오구를 영화화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도 보면 좀 연극같은 티가 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한 할머니가 잠결에 죽은 남편을 보고 굿을 하자고 한 끝에 굿판이 시작되고 굿이 끝나면서 죽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할머니의 초상집 광경이다. 

 

그러나 마당놀이의 줄거리를 듣거나 오페라의 줄거리를 들은 이 그것들을 즐기는 것과는 상관 없듯이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은 결코 줄거리에 있지 않다. 이 영화를 보는 첫번째 즐거움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별한 광경은 없다. 그저 낡은 시골집, 논가에 만들어진 평상에 모여 노는 노인들이 있을 뿐이다. 20년전만 해도 그런 광경이 티브이에서도 훨씬 자주 있었으며 사실 시골에 내려가면 그런 광경을 보여주는 곳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 광경의 진가, 아름다움을 감상할 준비가 나는 되어있지 않았던 것같다. 

 

혹시 이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시골에 있는 낡은 가게며 집앞에 뚱뚱한 아주머니가 평상복같은 옷을 입고 서 있어도 왠지 그 모든 것들이 낡고 지저분해 보인다기 보다는 진짜라는 느낌, 멋있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시골풍경도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그렇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번쩍번쩍하는 아파트에 비해 초라하고 지저분한 광경일 뿐이지만 나같이 전세계를 한바퀴 돌고 요즘처럼 이제 그런 시골풍경도 거의 사라진 지금에 와 보면 그 지저분한 모습뒤로 번쩍이는 금이 보인다. 

 

뜨거운 햇살이 있어도 앞뒤로 트인 대청마루에 나가 앉아 있으면 시원하다. 냉장고며 대형티비며 하는 온갖 열을 내는 기구로 채워진 네모난 박스안에 갇혀 있는게 아니니까 그렇다. 자연의 바람이 부는 데다가 전기기구가 내는 높은 주파수의 소음도 없다. 초라하다지만 개를 풀어놓고 키울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집이야 말해 뭘하겠는가. 큰 나무그늘 아래의 평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노인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저것이 진짜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는 가족과 같은 친밀감과 편안함이 있다. 온갖 체면다차리고 뭔가를 뒤로 숨기면서 대화하는 도시사람들의 만남과는 다르다. 우리가 살아온 모습에는 세월에 따라 축적된 지혜가 있다. 

 

이 영화가 가지는 최대의 미덕은 굿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굿이란 단순히 귀신을 물리치는 미신이 아니다. 굿의 의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굿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치루는 일종의 대동제다. 굿이 몰아내는 귀신이란 실은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짐이다. 

 

사람들이 모여산다는 것은 협력해야 잘 살 수있는 인간사회에서 필수조건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모여살면 결국 어떤 응어리가 생긴다. 이런저런 원망이 쌓인다. 요즘에야 프로스포츠도 보고 영화나 드라마도 보면서 다른 식으로 그런 응어리와 분노를 삭힐 방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방법도 없었거니와 사실 응어리 진 것이 풀리는 것은 당사자들이 만나야 해결된다는 의미에서 오늘의 방법들이란 도피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굿이란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고 온 마을 사람들의 감정을 뽑아내되 그것을 싸움이 아니라 춤과 음악과 울음섞인 한풀이로 승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묵은 감정을 토해내고 나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또다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 힘이 조금은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옛날 사람들이 잡귀니 뭐니 해서 불렀던 것이 전혀 근거없는 생각은 아니다. 어떤 문맥에서 귀신은 실재하며 그 귀신을 먹이고 달랠 필요가 있다. 그 귀신은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 같은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겨난 병이거나 혹은 그 마음 자체다. 옛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시각으로 문제를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결국 처방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모여살기 위해서는 이따금 굿판이 필요하다. 그것을 미신이라 부르면서 중단시켰을 때 그것을 대체하는 뭔가가 없다면 결국 귀신은 자라나서 공동체를 산산조각내어 버린다. 

 

그 굿판이 특정한 누군가가 아파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사람의 건강과 행운을 굿판을 벌여 빈다는 것은 특정인의 건강과 죽음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유기체의 일부의 문제로 여긴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두를 외로운 원자처럼 생각하는 오늘날의 생각보다 오히려 앞선데가 있다. 싸구려 과학논리가 가장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합리성은 결국 문맥의 문제이며 어느 문맥에 어떤 논리를 가져다 댈 것인가는 과학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과학은 논을 정한후 움직이는 트렉터처럼 이미 문맥이 정해진후 움직이는 기계다.

 

물론 과거의 것이라고 해서 찬양만 할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옛날 그대로 살자고 하는 것도 아니며 오늘날 우리가 한옥을 짓고 산다던가 평상을 놓은 마을을 이루고 산다고 해서 그 영화에 나오는 시골마을 풍경이 그대로 재현될 리 만무하다. 하지만 과학이라던가 신식문명이라는 이름아래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할 것이다. 

 

옛날에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어느 옹기집에서 주전자를 아래위로 뒤짚어서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작자가 오더니 주전자 구경을 하면서 어 이주전자는 위가 막혔네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주전자의 위 그러니까 사실은 바닥에 구멍을 낸다. 그리고 나서는 이 주전자는 바닥도 뚤렸네 하고는 혀를 차며 주전자의 바닥 그러니까 사실은 입구를 막는다. 이렇게 주둥이 달린 방향이 반대라는둥, 손잡이가 이상한데 달렸다는 둥하면서 주물데니까 주전자는 엉망이 되고 만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현재가 꼭 이 주전자같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한국문화, 한국 사람들이 사는 전통적 방식은 여러가지 기능을 가진 것들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그 기능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걸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다른 외부적 시각에서 한 쪽을 가르키며 여기는 막혔네 저기는 뚫렸네 하고 이리저리 고치다보면 주전자는 엉망이 되고 만다. 식민지 시절에 일본이 그렇게 했고 해방이후에는 밀려든 미국문명이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제 과거와 똑같이 살 수는 없다. 과거가 반드시 현재와 나란히 놓고 비교했을 때 더 좋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발전적으로 과거의 삶의 형태에서 그것의 의미를 살리며 개선한 형태로 우리의 삶을 고쳐온 것이 아니라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문화를 이식했다. 그것이 문제다. 예를 들어 굿이 그렇다. 굿은 미신이냐고 하면 미신이다. 그러나 굿이 가지던 기능이 있다. 오늘날 그것을 대신할 뭔가가 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아보인다. 단순히 굿을 다시하자 뭐 이런 말이 아니라 표면적인 모습 즉 미신같은 모습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와 기능을 생각하고 오늘날 그런게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게 없다. 내가 보기엔 이때문에 사람들은 미친듯이 쾌락에 탐닉하고 공동체는 무너지고 자살은 늘어만 간다. 나눔이 없고 흥이 없고 외로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복도 입지 않고 한옥도 드물어졌다. 동네인심이란것도 지방마다 다르지만 거의 사그라졌다. 모두 콘크리트 속에서 숨어서 살기 바쁜 세상에서는 공동체라는게 거의 없다. SSM같은 대기업 체인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서둘러 지역 상권이 어떠니 지역민심이 어떠니 하지만 지역이나 공동체를 말할 문화는 거의 사그라져 버렸다. 제사도 기독교측에서 미신이니 뭐니 하고 귀찮으니까 사라지고 있다. 제사가 지금 제사의 형태로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는 생각해보고 그걸 사라지게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귀찮으니까 명절은 너무 힘이 들어 악습이야 라고 말하면서 명절따위 다 없애고 전부 리조트에 놀러가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일까.

 

평화로운 촛불집회야 말로 대중이 원해서 불타오른 대동제요 굿판이다. 붉은 악마의 물결도 굿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억눌려서 사그라져 버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야 겠다는 말도 한다. 감정의 승화가 되질 않으니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매체들은 자극적인 영상과 음악을 내보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감정만 날려보낼뿐이다. 섹시한 여가수나 짐승남이 저 깊은데 있는 감정을 날려보낼 굿판을 벌려 줄 수는 없다. 술먹고 취하는 것처럼 감정적인 마취를 할 뿐이다.

 

오구를 보면 우리가 뭘 잊고 사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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