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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아바타 1 : 당신이 생각하는 결말을 묻는다.

by 격암(강국진) 2011. 10. 23.

11.10.21

지난 주말에는 영화 아바타 1을 다시 봤다. 이것은 영화사상 최고 흥행영화이며 컴퓨터 그래픽의 신기원을 이뤄서 영화사에 남을 영화라고 말해지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다. 

 

이 영화는 물론 화려한 화면으로 유명한 영화다. 나는 이야기가 중요하지 화면이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지만 이 영화를 다시 한번 보면서도 그 화면의 대단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새 한마리만 가공으로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 세부사항은 끝이 없이 복잡할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처럼 가상세계를 만들어 내는 경우는 세세히 작은 것을 만들어 내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때문에 에어리언같은 영화를 포함해서 많은 미래공상과학 영화, 판타지 영화들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거나 세부사항에 있어서 한계를 보인다. 화면이 어둡다거나 좀 만화같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는 그 세세함에 있어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오타쿠적인, 광신도적인 세부사항에 대한 집착과 엄청난 돈과 시간과 참을성의 투자가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영화다. 화면적 디테일뿐만 아니라 과학적 디테일도 신경을 많이 쓴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다리가 굵다. 아바타에 나오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거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는 뼈의 강도는 뼈의 굵기에 비례하는데 비해 무게는 몸의 부피에 비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서  커지면 커질수록 몸이 두꺼워져야 몸을 지탱할수 있게 되는 문제다. 그래서 아바타에서는 그 별의 중력이 약하고 원주민의 뼈는 탄소섬유가 들어있는 특수한 뼈라고 설명이 나온다. 아름다운 허공에 뜬 섬같은 것도 자기장과 초전도체로 설명을 붙인다. 즉 거대한 자기부상 열차처럼 섬이 떠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세세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계속 논하고 싶지는 않다. 역시 내가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이야기로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굳이 글을 한편 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바타는 기본적으로 서양인들이 미대륙에 가서 인디언을 만나고 살륙했던 역사를 우주적 규모에서 반복하고 있다. 침공하는 지구인은 판도라의 원주민에게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빼앗기 위해 협상을 약간 시도해 보지만 그것은 실패로 끝난다. 왜냐면 사고방식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쪽의 가치판단과 저쪽의 가치판단체계가 전혀 다르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인디언에게 땅을 팔라고 했을 때 인디언들은 땅이 누군가의 소유로 사고 파는 것이라는 개념에 어리둥절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의 흥행역사를 다시 쓴 영화가 아바타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미국의 정신세계가 크게 변화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내가 어릴적에 티브이에서는 미국의 서부영화가 종종 방영되었다. 불멸의 스타 존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와서 악당을 쳐부수던 그 영화들 말이다. 소위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그 영화들은 야만에 대한 문명의 투쟁쯤으로 요약할수 있을 듯하다.

 

최근의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같은 영화도 그렇지만 서부영화는 주인공이 정의와 질서를 지키는 밝은 빛이라면 그 주변에는 작은 평화의 공간이 있을 뿐이고 대개의 넓은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 야만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서부영화에 출연하는 인디언은 그저 짐승같이 소리를 지르고 피에 굶주린 야만인인 경우가 많다. 그저 파리잡듯 총으로 탕탕 쏴죽여야할 상대다. 

 

반면 아바타를 보면 마치 인디언이 서구인의 야만과 탐욕을 고발하기 위해 만든 영화같다. 신비의 별 판도라는 매우 아름답고 이미 매우 조화로운 세계다. 거기에도 먹고 먹히는 죽고 죽이는 폭력이 분명 존재하지만 나비족은 환경과의 조화를 알고 있으며 설사 짐승들이 자신을 공격해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사냥감을 잡을 때도 미안함과 함께 죽이며 무엇보다 모든 것이 회귀하고 연결되어져 있다는 생각을 굳게 믿으며 산다. 나비족은 느끼는 것을 강조한다. 보고 느끼고 균형잡고 친구가 되고 연결되는 것이 삶의 핵심이라고 믿으면서 지속가능한 삶을 산다. 

 

반면에 판도라를 침공한 지구인들은 그런것을 전혀 모른다. 그들은 그저 무한한 욕심으로 죽고 죽이고 영역을 넓혀 가며 남의 것을 빼앗을 뿐이다. 그들이 지나간차리에는 파괴된 폐허만이 남는다. 영화에서 그들이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금속을 깔고 앉은 거대한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뇌세포처럼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하는 나무로 일종의 거대한 지적 생명체다. 이 나무는 이제 까지 살아왔던 모든 나비족 조상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비족은 그들이 죽지않고 그 나무와 하나가 된다고 믿으며 실제로 이 나무는 신비한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위대함을 알지 못하는 지구인들은 그것을 파괴하려 하고 결국은 그 위대한 힘에 패배하고 만다는 것이 아바타의 줄거리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영화에 나오는 존재들이 뭘 상징하는가는 비교적 분명하다. 연결되고 서로 느끼는 것을 강조하고 조화를 이루고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에 대비되어 더럽고 추악해 보이는 인간의 욕망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우주내지는 지구내지는 자연일 것이며 역사이며 의미이며 문화일 것이다. 그 위대한 나무에 패배하는 인간은 물론 21세기 인간 혹은 자연을 개척하며 사는 개척자가 상징하던 인간이다. 

 

이 영화는 재미있는 오락영화지만 이런 의미에서 영화가 얼마나 잘만들어졌는가와는 별도로 한가지 중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끝을 맺는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지구인들이 추방되는것으로 끝이난다. 그러나 우리는 탐욕스런 지구인들이 더 거대한 무기를 가지고 재침공할거라고 생각하며 그때도 과연 판도라가 지켜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영화의 끝은 분명 끝이 아니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묻게 된다. 그래서 판도라는 어떻게 될까. 

 

여기에는 우리가 왜 무엇을 하나에 대한 고민이 닿아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고 말하는 것과 현실적 행동의 기준은 종종 서로 다르며 이것이 항상 틀리지 않게 느끼는 사람은 지행일치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이 도덕적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것이 옳은줄 알면서도 죄를 저지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행일치란 도덕적 의지를 발현해서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발휘해야 어떤 것을 하게 된다면 사실 그사람은 뭐가 옳고 그른지 알고 있다고 믿지만 모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을 벌려고 했다. 그런데 돈을 버는 행위가 너무 집요해 지자 그것때문에 그와 가족은 불행해 진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을 벌 기회를 포기하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나도 그게 옳은 일이란걸 알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의지가 없어서 말이야라고 한다고 하자. 그가 도덕적 의지를 발휘하려고 노력해야지라고 말하고 있는 동안은 실상 그는 가족의 행복보다 돈이 더 좋은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건 제대로 아는게 아니다. 그가 정말로 가족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면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을 포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복지나 인권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도 복지나 인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노력해야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너무 가난해. 이렇게 복지나 인권보장을 어떤 도덕적 의지를 발휘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결코 그것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복지나 인권의 중요성을 아는게 아니다. 어떤 것이 정말 우리 모두의 삶의 질과 행복과 생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거라고 느낄때만 우리는 복지나 인권보장이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환경문제를 논한다던가, 빈부격차이야기를 한다던가, 쓸모없는 전쟁을 벌이는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을때 우리는 자식의 생명이 중요하긴 하지, 그러나 다 자기 생명이 중요한거 아냐. 결국 그 부모는 포기하고 자식은 죽었을거야라고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식의 소중함을 그 부모가 강렬하게 느낀다는 것을, 자식이 그 부모에게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중 많은 사람들은 판도라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에이 결국 침략자가 떼로 몰려오면 판도라가 지지, 버틸도리가 있어라고 쉽게 말한다. 아니 이제 판도라가 중요한게 아니다.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환경오염문제를 생각한다던가, 인권문제라던가, 빈부격차문제를 생각해 보자.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런 걸 생각해 보자. 우리중 많은 사람들은 에이 결국 인간은 이러저러하니까 질 수 밖에 없고 미래는 변하지 않을꺼야. 뻔한 거야. 패배할거야라고 쉽게 말한다. 나도 이러저러한게 소중하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나도 그렇고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하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뭔가의 중요성을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기적처럼 보이는 것을 믿는다.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것들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구하기 위해 아빠나 엄마가 목숨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믿듯이 가까운 미래에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만나서 믿기 힘든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들이야말로 불신자와는 달리 포기되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진짜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 진짜 알고 있는 사람은 객관적 지식을 가진 자가 아니라 강렬하게 그것의 의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확실한 것은 기적은 계속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단세포 동물이 진화해서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고뇌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나무열매나 따고 살던 사람들이 거대한 문명을 만들고 민주주의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기적이다. 인류의 역사는 기적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사람들이 믿기 힘든 선택을 했기 때문에 만들어 진 기적이다. 그러니까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 믿는 것은 정말 기적은 아닌 셈이다. 자꾸 일어나는 일은 기적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판도라의 나비족이 침략자 지구인들에게 진짜로 행복을 위해 알아야 하는것이 뭔지를 가르쳐주고 지구인들이 기꺼이 그것을 배우는 기적도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구인들이 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뭘 믿는가에 하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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