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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일본에 사는 사람의 생각 :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

by 격암(강국진) 2011. 11. 24.

2011.11.24

요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감동깊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그다지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닙니다만 뿌리깊은 나무는 매우 만족도가 높은 드라마더군요. 세종의 민본주의나 유학자들의 귀족주의 그리고 태종의 군주론같은 것이 대비되면서 생각할 거리도 많이 줍니다. 

 

인상깊었던 장면중 하나는 똘복이 '백성이 글자를 알면 양반이 되느냐, 힘이 생기느냐 그리 생각한다면 세종도 속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상론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라 생각되어 같이 싸워보자는 세종의 외침이 안타까웠습니다. 또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에서도 몇년씩 살았던 사람으로서 한글이나 한국어에 대해 말할 부분이 당연히 있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글창제과정을 보면서 그걸 되새기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를 놀라게 한 일본의 현실

 

일본어는 제가 보기에 지금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어는 각각 50개씩인 히라가나와 카타가나로 표기하는데 통상 외래어는 카타카나로 쓰고 일본어는 히라가나로 쓴다고 합니다. 일단 이것만 해도 백자나 되지만 이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신문을 펴면 히라가나는 가끔 찾아볼수 있다정도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상당히 많은 것들이 한문으로 쓰여져 있으며 다시 나머지 상당부분은 카타가나로 씌여져 있습니다. 한국어도 외래어가 많이 침투했습니다만 일본어는 워낙 외래어 수용에 거리낌이 없는 나머지 엉터리 발음으로 읽은 영어가 그냥 쓰이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전단지 같은걸 보면 온통 카타가나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에지 있다는 둥 똘레랑스라는 둥 하는 말같은 이상한 말을 여기저기서 쓰면 알게 됩니다만 사실 외래어를 너무 쓰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중 한가지 문제는 상당수의 사람을 문화의 테두리 바깥으로 쫒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종종 그 의미를 알 것같으면서도 애매하죠. 그래서 사람들간의 대화가 잘 안통하게 하고 왠지 같은 무리가 아닌 것처럼 만듭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역시 한자에 있습니다. 일본어를 공부해 보신분들은 일본어에서 처음 만나는 장벽이 바로 한자를 읽는 법을 외우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음독이니 훈독이니 해서 우리나라처럼 같은 한자는 항상 같은 음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한자를 모르는게 아니라 한자로 된 단어를 단어마다 다 따로 음을 외워야 합니다. 

 

이 문제의 절정을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이름인데요. 일본사람이 일본사람의 이름을 못읽습니다. 괴상하지만 과장해서 말하면 그냥 자기 이름을 만드는 한자를 모은 다음 부모가 이걸 어떻게 읽을까를 가져다 붙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자만 써있으면 이 이름이 어떻게 읽는지 일본사람도 서로 모르는 겁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서류에 이름을 쓸 때는 한자를 쓰고 다시 히라가나로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를 표기하게 합니다. 실질적으로 이름을 두번 쓰는 셈입니다. 

 

민주적인 언어환경

 

어떤 언어나 어떤 글자가 단순히 위다 아래다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고 결판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말로 장단점이 있고 장화는 비올 땐 좋지만 달리기 할 때는 나쁘죠. 그걸 고려해도 역시 한글은 우리가 자랑할만한 최고의 문화유산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 민주적인 글자라는 말은 어디서 들어보셨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것을 일본에 와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의 서점에 가면 4학년생용 글모음, 5학년생용 글모음 하는 식의 책을 팔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나라나 아이의 독서수준에 따라 수준이 갈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학년별로 세세하게 나누는 것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좀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게 필요합니다. 바로 한자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동화책을 못읽는 괴상한 일이 일본에서는 일상입니다. 왜냐면 한문을 못읽기 때문이죠. 저는 책읽기를 좋아하던 편이라 초등학교때 이 책 저 책 손대면서 컷습니다. 이해는 다 못해도 플라톤 철학책이며 헤르만헷세며 과학자 이야기며 초등학교때 보던 기억이 납니다. 대부분의 어린 일본 아이들이 이런 책들에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머리가 특별히 저보다 나빠서가 아닙니다. 한자때문에 원천적으로 그런 책에 접근이 봉쇄당합니다. 이야기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을 때에도 한문때문에 그걸 읽을 수가 없으니 문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히라가나로만 쓰면 안되냐. 일본어는 받침이 없어선지 유독 같은 발음인데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가 많습니다. 한문옆에 히라가나를 병기하는 것을 물론 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모르는 한자가 나오는 책에는 잘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어린 일본학생들의 독서는 한계가 큽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이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특별히 바보가 있어서 어떤 한 학생이 책을 못읽는 경우는 그 학생만의 문제지만 이런 식이면 대부분의 학생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이것이 결국 문화를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왠지모르게 단순한 정신세계를 가지는 것이 대세가 되고 복잡한 이야기는 화제에 올리지 않는 것이 당연한 대세가 된다는 겁니다. 

 

일본의 아이들과 한국의 아이들을 비교하면 물론 개인차가 크지만 한국의 아이들은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자신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버릇이 없으며 뜻도 모르면서 말만 잘합니다. 반면에 일본아이들은 다그런것은 아니지만 훨씬 순종적이며 착하고 무엇보다 정신세계가 단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엔 책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지식을 흡수할수 있는 시대에서 한국의 아이들은 한글을 쓰고 일본의 아이들은 일어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아이들은 한글이라는 창을 통해서 지식을 엄청나게 흡수하는 반면 아직 한문을 다 배우지 못한 일본아이들은 좁은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이 어린아이만의 문제인가. 전체국민중에 초등학교때의 정신수준에서 크게 달라지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식이건 가치판단이건 나중에 공부하고 달라지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 인성과 특징은 초등학교때 거의 결정됩니다. 그럼 이런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죠. 순종적이고 예의바르지만 혁명은 일으키지 않는 일본국민을 만드는 것은 결국 일본어 환경입니다. 

 

한국의 상황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한글을 가진 한국이 뭐든지 좋은 상황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문지식을 공부해본 사람들은 즉각 알게 되는 것입니다만 어느 분야나 전문분야는 전문용어를 만들고 씁니다. 알아듣기 쉽고 누구나 아는 평상어를 쓰면 말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정도의 기본공부가 된 사람들끼리 일종의 축약어를 써서 말하는 것이며, 전문용어는 전문용어나름의 함정을 만들지만 그래야 복잡한 일을 토론하고 논의하기 쉬워집니다. 

 

그럼 우리가 복잡한 일을 이야기할때 어떻게 됩니까? 글자는 한글을 쓰지만 결국은 한문을 씁니다. 몇년전에 제가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때 제옆에 앉아있던 교육과 대학생이 저에게 자기 교과서를 좀 읽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책을 받아보니 대학교재가 토씨만 빼고 한자로 씌여 있더군요. 초중고때 그리 한자를 많이 공부하지 않았던 학생에게 그런 걸 대학교재로 주니 한국학생이 한국교수가 쓴 교과서를 읽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물리과에서도 이 문제는 발생합니다. 제 생각에는 모든 학과에 이문제가 있습니다. 한글로 된 물리학교과서를 만들자면 영어로 된 전문용어를 한글로 번역해야 합니다. 전문용어를 새로 만들어 번역할 때 결국은 한글로 쓰기는 하지만 대개 한자를 기반으로 복잡하게 만든 말을 쓰게 됩니다. 다이나믹스는 동역학, 아톰은 원자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만들기 방식은 결국 한자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으면 만드는 사람도 그걸 쓰는 사람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 결과 한글로 씌여진 물리학교과서로 공부를 하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영어로된 교과서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이란 그냥 막만드는게 아니라 그 안에 내부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영어단어도 소리문자지만 라틴어 계열의 여러단어들을 조합해서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한 단어가 가지는 뜻이 서로 서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그런데 억지로 단어를 만들고, 한자를 잘 모르는 신세대가 그 단어들을 써서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고 나중에 더 올라가면 높은 과정의 교과서는 어차피 영어라서 영어 전문용어도 어차피 알아야 하는데 저학년때 한글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설득력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어려운 내용을 담은 책들은 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책들은 본래도 어려웠지만 번역과정에서 어려워졌고 게다가 이젠 한문을 전처럼 쓰지 않는 한국 대중에게 더더욱 맞지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번역은 작품의 재창조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책한권 번역하면서 언어자체를 재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얼마나 있겠습니까. 극단적인 경우는 시입니다. 당시를 한글로 번역해 놓은 것을 읽고서 당시를 한문으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낄수 있겠습니까?

 

한국문화는 한자문화에서 멀어지면서 조선시대의 전통문화로부터도 차단된 면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우리가 못읽으니까요. 그리고 외국문물도 번역이 쉬운 것은 그렇지 않지만 번역이 어려운 철학이나 예술방면의 까다로운 부분은 이 보이지 않는 언어의 장벽을 통과하면서 막혀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일본의 대중은 한자때문에 한계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의 최고 수재와 한국의 최고 수재를 비교할 때는 또 달라집니다. 한국의 최고수재들이라는 서울대 학생들과 일본의 동경대 학생들을 비교하면 당연히 일본 학생들이 한자를 더 많이 알 것입니다. 문화적 단절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서울대학생은 누구의 글을 읽고 공부할까요. 동경대학생이 읽고 느끼는 일본의 축적된 문화라는 것과는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한국의 엘리트는 과연 일본의 엘리트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맺는말

 

철학자 김용옥은 번역을 강조하고 과거 고전이 제대로 번역되어야 우리의 학문, 우리의 국학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매우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한문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어서 조선시대의 책들을 번역하는 일이 언제나 될지 기약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문제는 문화적 안목을 가지고 사회적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일것입니다. 직역도 할 사람이 없는데 그걸 느끼고 즐기게 해설하는 일은 당연히 멀고도 먼 이야기겠지요. 

 

번역을 강조합니다만 이걸 뒤집으면 엉터리 전문가들의 권위를 비판하게 됩니다. 어려운 말들을 나열해서 권위만 세우는 전문가들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자기 수양이나 공동체 정신이란 것에 대해 고민없는 철학자, 지식인은 모두 엉터리입니다. 본래 지식인이란 일종의 빵만드는 전문가나 신발만드는 장인처럼 사회에서 정보처리를 위해 후원하여 만들어진 전문가입니다. 그러면 남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해서 공부를 덜한 사람들의 혼란을 잠재워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전문용어나 남발해서 상식을 초월한 후 세상을 더 어지럽히기만 하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마치 자기가 줄줄 외우는 그 단어들을 따라 외우면 뭐가 될 것처럼 말하는 전문가들이죠.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화목한 가정도, 행복한 지역공동체도 만들어 내는데 뭐하나 도움되지 않고 고민도 없는 전문가들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대중이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을 세상과 자기를 느끼고 자기수양하는 길로 파악하기 보다는 전문용어를 외우고 해석하는 일로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아서 생기는 것같습니다. 동양이던 서양이든 잘난 철학자들 말 줄줄이 외우면 뭐합니까. 요리강습에 갔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요리사가 입는 옷을 잘 입고 정돈하는 법만 가르쳐주고 코스가 끝나면, 그리고 그게 요리라고 생각하면 요리란 참 쓸데 없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누구누구에 따르면 이나 무슨 새로운 전문용어 들이대지 않으면 세문장도 말하지 못하는 그런 지식인은 비전문가를 도와주는게 아니라 지적노예로 만듭니다.

 

한글의 민주성때문에 우리는 몰상식을 인식하고 참지않는 국민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더 높은 지식과 철학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것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이 우리를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서구의 것을 제대로 들여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로 부터의 단절, 자기로 부터의 단절, 외부로부터의 단절은 다 문제입니다. 

 

독일어는 위대한 철학자와 작가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린 세종대왕덕분에 큰 부분에 진전이 있지만 한국어는 결코 완성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무쪼록 위대한 철학자와 작가에 의해 한국어도 완성되어 좀 어려운 것들도 쉽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다시 말해 국민들이 소통하고 통합되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 뿌리깊은 나라,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꿈꾸셨던 나라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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