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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BBC 다큐 : 아톰

by 격암(강국진) 2012. 1. 5.

12.1.5

내가 물리학과에 진학한 것은 1980년대의 후반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사람들은 흔히 물리학이라고 하면 입자물리학, 원자핵물리학을 생각하고는 했다. 양자역학의 발전을 여러명의 천재들을 등장시키면서 설명하는 이야기들은 어린 나를 매우 흥분시켰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나서 BBC 다큐 아톰을 보는 것은 내게는 묘한 감동을 주는 일이기도 했다. 

 

BBC 다큐 아톰은 2007년에 나온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는 명작다큐다. 이 다큐는 3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는데 1부는 거인들의 충돌, 2부는 우주로의 열쇠, 3부는 현실이라는 환상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일단 제목만 죽 들어도 매우 환상적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과학자를 꿈꾸는 사람들이나 과학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에게 한가지 경고를 미리 해두고 싶다. 여기 천개 아니 수백만개의 열쇠가 있다고 하자. 그중 우리가 자물쇠에 맞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열쇠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들어났다고 해서 이것이 두번째 열쇠가 자물쇠에 맞는 열쇠라고 믿어야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을 벗어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흥분에 너무 빠지게 되면 뭐든지 자기가 믿고 싶은 어떤 것이 양자역학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식으로 믿기 쉽다. 그것이 증명되었다라고 말할 수준이 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 다큐를 보고 창조론을 옹호하는 다큐라고 해석한다던가 과학의 끝은 결국 기독교적인 신에 도달하는 것이다라고 간단히 정리한 감상도 나는 본 적이 있다. 이래서는 모처럼 좋은 다큐를 본 보람이 없다.

1부와 2부의 이야기는 내가 독후감을 쓴 적도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이야기일것이다. 다만 같은 일들을 나열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 주체가 누구인가에 의해 발생하는 차이가 다큐를 감상하는 것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준다. 또한 하나는 다큐이므로 그림을 통해 부분과 전체같은 책에서 느낄수 없는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다큐와 책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로 즐길 수 있다.

 

1부는 양자론의 탄생을 다룬다. 여기서는 어떻게 아인쉬타인이나 보어같은 사람들이 논쟁한 끝에 양자론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가 생동감있게 그려진다. 그 내용을 여기에 요약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로서는 다큐에 나오지 않는 부분이 오히려 즐거웠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다. 다큐 자체는 그걸 다루지 않지만 양자론은 두번의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발전했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지 않는다. 

 

어떤 것의 가치는 그 맥락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중요한 맥락중의 하나는 물론 사회적 맥락이다. 그 사회가 그런 이야기에 가치를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을 때 재능있는 자들이 거기에 헌신적으로 뛰어들뿐만 아니라 발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엄청난 자원의 소비도 정당화된다. 양자역학의 발전이 만들어 낸 그 결과들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라고 다큐의 진행자는 목터지게 외치고 있으며 나도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란 절대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많은 맥락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당시의 유럽사회는 기존의 사회적 구조가 모순을 쌓아올려서 유지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낡은 권위가 흔들릴 때 젊은이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천재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똑같은 천재라고 해도 기성의 사회적 구조가 안정적이었다면 같은 발상을 떠올릴 수 없을지 모른다. 그걸 떠올렸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해서 사라져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과학과 정치 혹은 과학과 사회는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크게 보면 그럴수가 없다. 결국 사회적 주목과 보조를 받지 못하는 과학적 아이디어는 시들어 버릴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아인쉬타인같은 과학자가 없냐고 묻기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가 뭘 가치있게 생각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인쉬타인을 잔뜩 가지고서 우리는 인재가 없어라고 말하는 상황이 될수도 있다. 프로야구 리그자체가 없는데 박찬호나 이승엽같은 스타선수가 있을 수가 있는가?

2부는 어떻게 가장 작은 원자에 대한 연구가 가장 큰 우주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이야 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것의 좋은 예가 아닐까. 우리는 오늘날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있으며 그들이 적색거성이니 초신성이니 블랙홀이니 하는 많은 다른 종류들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원자에 대한 연구는 그 원자의 기원을 묻게되고 그 기원에 얽힌 이야기가 하늘에 뜬 별뿐만 아니라 소위 빅뱅이론으로 불리는 우주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그것을 진짜로 보게 된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물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뭔가를 예측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론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가 뭘 볼까를 예측한다. 그리고 관측을 통해 그것을 확인함으로서 이론을 더욱 확정짓게 된다. 예를 들어 금이나 우라늄같은 무거운 입자들은 오직 초신성과 같은 엄청난 고열의 상태가 아니면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이제 우리의 금시계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것이다. 그 금은 아득히 먼 옛날 초신성의 폭발 때 만들어져서는 우주를 방황하다가 우리 행성계가 만들어질 때 참여하고 결국 우리 손목에 올라오게 된것이다. 이것이 금의 한가지 의미다. 

 

3부는 20세기 후반의 QED와 쿼크이론 이후의 입자론들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그 말미에는 다세계 해석같은 양자론적인 해석의 문제를 논하고 있기도 해서 가장 흥미롭게 볼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지만 사실 당연하게도 가장 부정확하고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일 수밖에 없다. 최근의 이론은 사실 논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자론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으면서 나는 다음번 과학혁명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은 과학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를 도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므로 공감이 가지 않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뛰어넘어도 무방할 것이다. 

 

주체의 문제란 이것이다. 양자역학은 여러가지 기묘한 현상들을 주목하게 만들어서 고전역학적 관점으로 보면 완전히 새로운 과학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과학으로 불릴 수 있는 것으로서 한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체없는 관찰이다. 양자역학의 설명중에는 이 이론은 인간이 관찰을 하면 옳은 이론이다라는 조항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즉 뱀이건 지렁이건 독수리건 그 관찰대상이 누가되건 양자역학의 법칙은 옳은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가정된다.

 

과학이 아닌게 뭔지 말하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미녀의 아름다움은 과학적 대상이 아니다. 미녀의 아름다움은 저울에 무게를 달듯 달 수 없고 언제나 똑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인간중의 최고의 미인도 물고기나 고릴라에게는 못생긴 짐승일 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미녀의 아름다움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관찰주체가 바뀌면 다른 걸 보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도 항상 똑같이 보지 않는다. 방사선이 어떻게 나오더라라는 것처럼 재현성이 없다. 미녀의 아름다움을 과학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자체를 과학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이러저러할 때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서 미녀의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것을 과학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얼머부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로 미녀의 아름다움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우리는 다른 과학적 선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 두 개를 합치면 미녀의 아름다움같은 세상의 주관적 성질이란 환상에 불과하며 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것이라고 말하는 것같다. 미녀들이 연예계에서 어떤 주목을 받으며 돈을 벌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보다 현실에서 더 거리가 먼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둘째로 인간 자신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을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는 순환논리의 냄새가 난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는 우리가 인식한 우주이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창조한 우주다. 소리를 보고 그림을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할까? 따지고 보면 소리나 빛이나 모두 파동이다. 그 신호를 우리의 뇌가 바꿔서 하나의 일관성있는 세계로 재창조해낸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다. 자기가 창조한 우주를 자기가 이해하는 것에 원천적 문제점은 없을 까? 아니 '이해'했다는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같은 인간도 다른 언어를 쓰는 경우는 조금은 다른 세계에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다만 그렇지 않다고 믿을 뿐이다. 친구는 프랜드가 아니고 아내는 와이프가 아니다. 여자의 정조관념에 민감한 부족과 그렇지 못한 부족이 만나면 적어도 한쪽은 다른 쪽의 무신경함에 충격을 받게 될것이다. 그리고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그 설명이 끝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삶과 사회에 대한 기본적 가정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떻게 소를 죽여서 먹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는데 당신은 왜 죽여서 먹으면 안되는데라고 대답한다고 하자. 평생을 채식주의자 속에서 살아서 그런 관습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왜 소를 죽여서 먹으면 안되는가같은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사실 개를 먹는 것을 둘러싼 논쟁은 실제로 그렇다. 

 

이제 외계인을 생각해 보자. 그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기관을 가진 생명체는 우주를 전혀 다르게 구성해 내고 있다고 하자. 과연 우리는 대화가 가능하거나 그 외계인이 느끼는 세계를 느낄 수 있을까? 외계인이 아니더라도 벌이나 잠자리가 느끼는 세계는 어떤가, 우리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가? 체험은 지식에 의해서 대체불가능한 것이라면 결국 지식에 속하는 과학적 이론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인 인간이 재구성한 세계에 국한된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닐까. 

 

관찰과 이론적 정리라는 과학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가정하고 진행된다. 그 가정은 대단히 훌룡한 가정이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양자론도 고전역학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주 작은 듯보이는 양자효과를 무시하면 우주의 창조나 태양의 복사같은 것을 무시하는 결과에 이른다. 객관적 세계의 존재라는 가정은 훌룡한 가정으로 영원히 사용될 것이다. 양자역학이 나와도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고전역학이 훌룡한 이론으로 쓰일수 있듯이 말이다. 다만 그 가정이 만들어 내는 미묘한 차이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를 이해할 때 우린 전혀 다른 세계를 볼지도 모른다. 작은 원자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우주론에 이르게 되었듯이 말이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다큐를 보고 소감을 적는다는게 글이 길어졌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쪽 방향에서 새로운 과학적 성취를 노리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미 과학계의 주류는 생물학으로 넘어왔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그것은 뇌과학이 될거라고 나는 믿는다. 결국 모든 과학적 노력은 인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니까 인간의 일이 중요하고 가치있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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