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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음악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by 격암(강국진) 2012. 7. 28.

12.7.28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아마데우스나 라밤바처럼 내가 좋아해서 여러번 본 음악 영화중의 하나다. 그리고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시네마천국을 만든 이탈리아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1998년에 만들어 개봉했으며 영화 포룸에서 웨이터역할을 하고 미국 드라마 라이 투 미에서 주인공을 한 팀 로스가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의 원제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아니라 나인틴 헌드레드의 전설이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런 제목의 차이는 나름대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세기가 문을 여는 1900년 1월 1일 유럽과 미국 뉴욕을 오가는 배에서 한 백인 아이가 버려진채로 발견된다. 이 아이를 발견한 것은 석탄실에서 일하는 흑인 노동자 데니 부드만이었으며 이 아이는 티디 레몬즈라고 적힌 상자안에 들어있는채로 발견된다. 그렇게 해서 이 아이는 데니 부드만 티디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데니에 의해서 키워진다. 이 영화는 음악을 빼고는 논할수 없을 정도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실은 음악에 대한 영화라기 보다는 나인틴 허드레드라고 불리는 사람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배라는 한정된 공간이다. 나인틴 허드레드는 평생 이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서류가 없는 아이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데니가 고의로 숨긴 것이지만 그렇게 자라난 데니는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권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배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죽는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인틴 허드레드는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데니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따라서 데니가 얼머무린 것에 대해서는 잘못된 정보를 가진다. 예를 들어 엄마없이 아빠 데니에 의해서만 키워지는 나인틴 허드레드는 신문을 읽다가 엄마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엄마라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 데니는 엄마가 경주마의 이름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인틴 허드레드가 어른이 되서도 엄마가 그런 뜻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 장면이 그저 코믹한 장면이 아니라 배와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 사는 인간의 왜곡된 지식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진실을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동안 엄마를 경주마의 이름으로 알고 살았던 과거를 가진 사람이다. 

나인틴 헌드레드의 삶은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을때 믿기가 거의 힘든 신화같은 이야기다. 탄생이 그렇고 그렇게 자랄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아이가 아무 선생도 없이 혼자 힘으로 그저 훌룡한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훌룡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이상의 환상소설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신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줄거리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나인텐 허드레드의 삶이란 특이한 인간의 삶이 아니라 보편적 삶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는 믿기 힘들지만 배에서 태어나 배에서 내리지 않고 성장한 인간이 있다라는 말은 이것이 은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배에서 버려진 채 발견된 존재이며 평생 배에서 내리는가 마는가를 가지고 고민하고 살다가 죽는다는 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대개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부모에 의해서 키워졌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를 따지는 수준에 이르면 우리는 모두 그저 어느날 세상에서 발견된 고아나 다름없다. 어떻게 해서 그때 그순간에 거기에 있게 된건지 모른다. 이 질문에 대해 당신이 부모가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그날 그때 거기에 태어났던거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왜 당신의 부모들은 사랑하거나 결혼하게 된걸까. 거기에도 답이 있다면 또다시 물을 수 있다. 왜 하필 그 일이 그렇게 일어나서 결혼이 일어나고 결혼이 일어나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을까.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난데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데니의 사랑으로 클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누군가의 사랑으로 어딘가에서, 어떤 배에서 자라게 된 나인틴 헌드레드 인 것이다. 

 

어느날 밤 그저 혼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서 당장에 사람들을 감탄 시킨 나인틴 헌드레드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전성기가 있다는 흔한 이야기의 구체화에 불과하다. 제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삶을 살았던 노인일지라도 내가 한 때는 이라고 말하면서 이야기할 성공담이나 연애이야기쯤은 하나 가지고 있을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기적적인 재능을 보이고 배안에서의 일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유명인사 취급을 받았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언젠가 대학입시시험에서 크게 성공했다거나 대단한 배우자와 결혼했다거나 사업이 성공했다거나 했던 우리 모두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가진 삶의 큰 절정은 재즈의 창시자 젤리 롤 모튼이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 일에서 벌어진다. 그는 비록 배밖에서는 그 명성이 모튼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모튼과의 피아노 대결에서 그에게 한방을 먹여주고 마는것이다. 배에서 버려진채 발견되어 가난한 흑인노동자에 의해 키워지고 그마나 데니마저 일찍 잃어버린 나인틴 헌드레드의 삶이란 누가 들어도 연민이 느껴질 이야기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그럭저럭 자랑할 거리가 넘치고 사랑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끊기지 않는 삶의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배를 내려보면 어떨까 하는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러라고 권하고 유혹한다. 당신은 배만 내리면 대단한 성공을 할 수 있을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배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그런 유혹에 대해 반문한다. 그저 좋은 곳을 찾아서 떠도는, 한 곳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보내는게 아니라 항상 여름이 있는 곳으로만 가려고 하는 게 옳을까라고.  

 

하지만 그 삶의 질문은 그 정도로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날 그는 딸하나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병으로 다 잃고 아내는 바람나서 도망가고 땅은 메말라버린, 한마디로 딸하나 말고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농부를 만난다. 후일 그 농부는 태어나서 바다를 처음보게 되었는데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다는 그 농부에게 삶은 무한하며 다시 시작하라고 엄청나게 큰 소리로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바다에 떠서 살면서도 바다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만약 자기가 배에서 내리면 삶은 무한하다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혹에 빠진다.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의혹과 유혹은 우연히 그 농부의 딸을 배위에서 만나게 되면서 극에 이른다.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나인틴 헌드레드의 손가락에서는 절로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되고 그녀에게 음악을 바치고 싶게 된다. 그녀도 그에게 육지에 있는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집으로 방문해 달라고 말한다. 

 

그는 그래서 육지로 가기로 한다. 육지로 가기 위해 배위의삶과 작별인사를 하고서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 배와 육지를 잇는 철제 사다리 계단의 중간에 우두커니 서있던 그 순간은 그가 후일 낡아진 배와 함께 폭파되어 죽게 되는 것을 선택하는 장면과 함께 그의 인생에 있어 크나큰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는 결국 배에서 내리지 못한다. 후일 배와 함께 하는 죽음을 선택하는 자신을 설명하면서 그는 말한다. 그 계단위에서 그는 끝없는 세상을 보았다고. 배와는 달리 도시에는 경계가 없으며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너무나 많은 선택이 세상에 있다.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선택을 하면서 살 수 있는지 그는 이해할수 없다고. 그는 오직 88개의 한정된 건반을 가진 피아노에서 음악을 만들지만 무한의 건반을 가진 신을 위한 피아노에서 그는 삶을 찾을수가 없다고. 결국 그는 단조롭고 소박한 삶을 택한 것이다.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영화말미에서 나인틴 헌드레드가 배를 내리는 문제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다소 지루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는 것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아니라 나인틴 헌드레드의 전설인 것이다. 즉 그의 삶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핵심이며 재미의 차원에서는 모튼과의 승부장면이 더큰 재미를 주지만 의미로 말하자면 마지막의 이야기가 훨씬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유한한 삶을 선택하고 자기자신으로서 죽기를 선택한다. 그의 친구였던 트럼펫 주자 맥스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삶에 대해 영화의 주인공이 택한 답이 어떤 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실제로 말하자면 배를 내려도 우리는 여전히 배안의 삶을 살게 된다.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진정으로 무한한삶을 살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배 안에 있는, 유한한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항상 중요한 것은 답보다 질문쪽이다. 이 영화는 유한한 삶과 무한한 바깥세상속에서 던져진 존재로 고민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삶의 핵심적 문제 혹은 핵심적 질문이 뭔지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바깥따위에는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넓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고민없이 자기 삶에 갇힌 사람이 되거나 그저 자기 삶을 파괴하고 무한의 선택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허무주의자가 되고마는 함정에 빠지거나 한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에서의 삶을 완결했다. 영화는 당신은 당신도 나인틴 헌드레드인 것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선택이란게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가, 고민은 한번 해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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