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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최후의 제국을 보고 : 자본주의의 그림자

by 격암(강국진) 2012. 11. 28.

최후의 제국이라는 현대 자본주의 실상에 대한 다큐 중 미국의 실상에 대한 2편을 보고 나는 제국의 최후라는 말이 과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그림자는 날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흔한 오해

그러나 단순히 자본주의가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 설득력도 없고 의미도 없다.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그렇듯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은 자동차를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사실 자동차 자체는 좋거나 나쁘다고 할수 없으며 굳이 말하고자 한다면 매우 좋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전에는 할수 없다고 여겼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발명이고 도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부모님이나 신처럼 우리를 돌봐주는 존재가 아닌데도 그렇게 생각될때가 많다는 것이고 도구는 어떻게 쓰는 가에 따라 그 결과가 참혹해 질수 있으며 특히 강력한 도구일수록 더더욱 그렇다는 점이다. 


우리는 망치가 도구고 자동차가 도구라는 것은 쉽게 기억하지만 어떤 사회시스템이 도구라는 사실은 잘 잊어버린다. 그것을 우리 아래에 있는 우리가 창조한 피조물로 기억하기 보다는 제단위에서 우리를 비춰주는 신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자본주의를 믿습니다!'라고 외치면서, '잘 모르지만 자본주의가 우리를 돌봐줄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걸 누가 모를까라고 생각하지만 곰곰히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라. 과연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신이나 악마처럼 말하는지 망치나 톱처럼 말하는지. 무슨무슨 주의라고 하면서 신앙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도 종종 그렇다. 자본주의가 나쁜 일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만 버리면 새로운 신, 새로운 왕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세상에 대한 비판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널리 퍼진 믿음에 의해 저항을 받는다. 즉 위에서 말한 SBS 다큐가 보여주듯이 가난한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본주의의 그림자가 뭔지 보입니까라고 말해도 너는 정말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말이냐라는 질문이 나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역시 자본주의가 좋은것이야라는 믿음으로 돌아간다. 자본주의의 그림자는 어쩔수 없는 것으로 오히려 합리화되고 만다. 사회시스템을 우리가 명령할 종처럼 생각하는게 아니라 복종할 왕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왕이 잔혹하지만 저 왕은 더 형편없지 않은가라는 식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행복한 사회에 존재할수 있다. 총은 흉기이지만 엄격히 관리되고 자제되는 경찰들이 사용하면 사회의 치안에 기여한다. 자본주의는 현대의 대부분의 인간들의 손에 들리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도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자본주의가 없어져야 행복해질수 있다거나 자본주의가 세상의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임은 항상 인간이 진다. 인간의 행복에 대한 책임은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강해지지 않으면 어떤 다른 시스템도 인간을 휘두를 것이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무의식을 강조한 프로이드나 경제적 상황이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강조한 마르크스 이래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것이 인간을 조정하며 따라서 그 책임도 있다는 이야기에 아주 익숙해 졌다. 그같은 과정은 인간의 확장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축소과정이었다. 즉 객관화와 인간에 대한 영향의 분석이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 생활의 여러부분들이 우리의 자아에서 잘라져 나간다. 무의식은 내가 아니다. 이 사회는 내가 아니다. 우리는 내가 아닌 저런 것들에 저항할수 없게 영향을 받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 


올바른 과정은 인간의 축소가 아니라 확장이었어야 할것이다. 즉 무의식도 나고 세상의 경제상황도 나다. 세상이 이러저러한 것은 모두 이 확장된 내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확장된 자아속에서 우리 모두는 세상의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라고 느꼈어야 할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객관화나 분석적 논리라는 것의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런 것은 여기서 논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요점은 인간은 점점 작아지고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수동적으로 여겨지며 책임이 없어진 대신 권리도 없어지고 능력도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마치 닭을 키우는 닭공장의 작은 우리속에서 피둥피둥 살이찌워지면서 먹을 것도 많고 너무 좋다라고 외치는 꼴이다.  


자본주의의 그림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묘사중의 일부를 나는 전날 한 바 있다 (깨어있는 시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형화되고 인간을 걱정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나는 거대한 빌딩의 그림자를 보면서 사라져간 문명이나 제국들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 그림자에 대해 몇마디 해보자. 


잉카제국, 로마제국등 여러 사라진 문명이나 제국들을 보면서 오늘날 현대의 경제거품을 생각하는 사람은 흔하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는 뭘 봐야 할것인가. 우리는 현대의 엄청난 마천루의 숲이나 거대한 도시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 지속가능한 것인가.


사라진 문명의 유물들이 너무나 훌룡한데 우리는 거기서 사람을 볼수 없을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묻는다. 도대체 이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외계인이라도 나타났거나 엄청난 질병이 모두를 죽였는가? 그러면 왜 시체도 없는가하고묻는다. 


경우에 따라 답은 여러가지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답은 그 사람들은 그 좋아보이는 문명의 정점이 만들어 낸 유적을 스스로 떠난 것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의 정점에서 그들은 일종의 거품을 만들어 냈다. 유지가능하지 않은 삶의 형태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시절이 지나고 그 거품이 붕괴하면 그 찬란해 보이는 삶의 형태는 지옥이 된다. 그 거품의 붕괴가 빠르기 때문에 유적들은 마치 누군가가 잘 만들어 놓고 쓰지도 않고 버린 것같은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기름을 펑펑쓰는 엄청나게 호화로운 차, 아주 넓은 평수의 전원주택은 기름이 없어지거나 매우 비싸지면 가장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경기가 나빠지면 이런저런 이유로 엄청나게 유지비가 나오는 고층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사라진 문명의 유적이란 이런 것들과 같은 종류의 것인 것이다. 


미국의 빈민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케익밖에 없는 나라가 떠올랐다. 이것은 내가 현실을 단순화하여 가상으로 만들어 낸 나라다. 그 나라에는 값싼 감자는 없고 케익밖에는 없다. 그래서 감자를 파는 나라에서라면 초라하게나마 행복하게 살수 있는 사람들이 거지가 되어서 가끔 누군가가 던져주는 케익을 먹으면서 산다. 


미국에는 물론 싸구려 메이드인 차이나 제품이 넘쳐난다. 그러나 자급자족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란 대부분의 물건을 자급자족해야 그것이 직업이 되기도하고 지출도 줄이는 효과가 있어서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갈수 있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이 만들어 낸 삶은 기괴하다. 그들은 사라진 문명이 만들어 낸 거대 유적속에서 굶고있는 후예들을 연상시킨다. 미국의 빈민들을 보면 세계인들은 대부분 빈민이 뭐저렇게 잘사나라고 생각한다. 옷도 깨끗하고 몸은 피둥피둥 살이쪄있는 경우가 많다. 차도 있고 쓰고 있는 물건들도 우리가 통상 중국이나 한국이나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할때 연상되는 그런게 아니다. 


미국의 노숙자가 한국이나 인도의 멀쩡한 중산층과 차이가 안느껴지거나 심지어 미국쪽이 더 잘사는것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집없이 길에 밀려난 사람들인데 그들은 정원이 있고 화장실이 두개나 세개인 그런 집을 보면서 그런 집에 사는 것을 꿈꾼다. 실제로 융자를 내서 얼마전까지 그런 집에 살다가 실직하자 마자 길바닥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제는 이들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는 미국인들의 삶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높이에 있다. 그 사치는 삶의 구조속으로 파고들어서 바뀌기 지극히 어려운 시스템으로 변했다. 그들은 팽창하기만 하는 거품의 과실만 믿고 저축도 안하고 한껏소비만 하는데 익숙해서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자기를 자제하는 것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노동자가 생산해낸 물건들을 쓰는데 익숙한 그사람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고 해도 마치 파푸아뉴기니에서 방금도착한 토인의 신세다. 


토인의 삶은 미국에서 그 형태대로 유지될수 없다. 미국보다 훨씬 더 소박하지만 훨씬 더 지속가능한 형태의 그 삶은 파푸아 뉴기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토인은 미국에서 무능력자고 고통스런 삶을 살수 밖에 없다. 문제는 거대화된 자본주의가 자국민인 미국인들의 대부분도 토인처럼 만든다는 것이다. 돈이 된다는 이유로 1%의 소비자만 좋아하는상품만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 시장처럼 말이다. 


단순히 수입이 있다거나 재산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문명의 유적속에서 그들은 삶을 더이상 유지할수가 없다. 일할 의지가 있어도 절약하면서 살아도 그들의 절약이나 노동의지는 그 문명의 유적속에서 의미를 잃는다. 미국의 현실은 화려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살지 않는 사라진 문명의 유적을 떠올리게 하는데가 있다. 


맺는 말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하나는 우리는 그럼 어떤가 하는 것이다. 미국에 비하면 동아시아 즉 한국, 일본, 중국인들의 삶은 그래로 아직은 다르다. 그러나 어떤방향으로 변해가는지,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뭘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어느새 저축률이 형편없고 명문대를 나와도 취직이 힘든 나라에 살고 있다. 


두번째는 삶의 방식의 고착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삶의 방식이라고 하면 물처럼 자연스레 변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마냥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고층아파트 건물을 지어놓으면 그 건물들은 산이나 강처럼 우리가 적응해서 살아야 할 환경이 된다. 법이나 경제 관련 관습 같은 무형의 환경도 역시 간단히 변화시킬수는 없다. 이자로 돈을 벌거나 부동산을 사고 팔아서 돈을 벌어도 돈이고 감자를 키워서 팔아서 번 돈도 돈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해 보이지만 이런 현실이 우리의 삶을 제약한다. 그래서 지역화폐같은 것으로 돌파구를 열어보려고 하기도 한다. 삶의 방식은 심지어 우리의 언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서도 고착화된다. 


결국 답의 상당부분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 움직여 지지 않는 것을 움직이고 고정되어 우리의 삶을 제약하는 것을 사라지게 하고 나름대로 새롭게 적응하여 살아갈 삶의 방법을 찾는 것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의 강화만으로 모든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강화라는 주제를 벗어나서는 삶의 유지도 방어도 점점 더 힘들어 질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그림자는 크고도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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