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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초컬릿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3. 6. 10.

13.6.10

 

줄리엣 비노쉬의 영화 초컬릿을 어제 다시 봤습니다. 저는 먹는 것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이 영화는 그 중에서도 가장 훌룡하다고 할수 있을 만한 영화입니다. 음식남녀나 바베트의 만찬도 좋고 담포포, 카모메식당이라던가 심야식당, 오센같은 일본 영화와 드라마도 괜찮습니다만 초컬릿도 두고 두고 이따금 잊을만 하면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는 초컬릿을 통해서 사람들을 치유해 주러 다니는 것이 운명이 되어버린 한 여자가 자신의 어린 딸과 함께 어느 마을에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영화에서 초컬릿은 사랑의 묘약이고 삶에 기쁨을 주는 음식으로 나오며 그런만큼 독실하고 보수적인 마을의 신앙인들에게는 사탄의 유혹처럼 등장합니다. 초컬릿은 이 영화의 주요한 소재입니다만 사실 초컬릿 자체의 매력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남미에서 온 엄마를 둔 줄리엣비노쉬는 문화적으로 이교도적이며 사람들에게 그 마을에서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것, 허용되어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어느새 불편하게 살던 사람들은 하나둘 그녀와 친구가 되고 그녀에게 기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성 체제를 상징하는 시장과의 알력은 커지고 그것은 시장에게는 또다른 악마의 유혹이라 할 수 있는 집시들이 마을에 오면서 더더욱 증폭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제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질서나 규칙이란 우리를 살아있게 유지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걸 잊어버려야 한다. 모든 규칙이란 가장 중요하면서도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어떤 형태를 필요로 합니다. 먹어야 살 수 있고 집을 지어야 그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해야 체력을 유지할 수 있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정신적 에너지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칫솔질이라도 열심히 해야 이가 썩지 않습니다.

 

이런 규칙은 이런 일상을 넘어서 전개됩니다. 결혼을 했으면 바람을 피우면 안되고 남자는 화가 난다고 여자를 때리면 안되며 먹고 싶다고 마구 먹어도 안됩니다. 그렇게 많은 규칙들이 누적되어 우리는 아이는 이렇게 태어나고 이렇게 길러지고 이렇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다시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다는 식의 삶의 규칙이 정해집니다. 그런 규칙들은 축구에서 공을 들고 뛰면 반칙인것처럼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들로 그걸 어기면 반칙이 됩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그런 규칙을 어기는 것은 자기자신에게건 남에게건 공평하지 못한 일이 됩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당연한 것처럼 받은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 그 마을의 윤리적 문화적 배경때문입니다. 받을 때는 그냥 받다가 이제 부모를 돌봐줘야 하는 때가 오거나 자신도 자신의 아이들을 돌봐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나는 그런 의무따위 싫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반칙입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니까요. 남들이 내 주변에서 총들고 다니는 것은 싫다고 하면서 나는 총을 들고 다니겠다고 하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규칙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규칙이 없는 삶이란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지옥같은 혼란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규칙이란 것은 첫째로 사람이 만든 것이고 둘째로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아이도 이런 옷을 입을 수 있는가 하면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으며 어떤 옷이 너무나 훌룡했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몸이 자라면 이제 그런 옷은 더이상 입지 못하게 됩니다. 

 

옷이 그렇듯이 가장 훌룡한 규칙도 결국 인간이 고민해 만들어 낸 것이며 그 전의 다른 규칙을 대체해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규칙을 지키면서도 삶의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규칙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모든 것은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지혜롭고 책임감이 있으며 용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규칙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런 규칙을 흔드는 사람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합니다. 반면에 규칙을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규칙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하거나 그 규칙때문에 남을 착취하면서 사는 기득권자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그런 비난은 맞을 수 있고 때로는 둘다 동시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무책임한 혁명론자와 진보주의자는 많습니다.  그들은 실상 얇팍하게 가장한 이기주의자들에 불과합니다. 사회적 혜택을 받기는 받았지만 자신의 의무는 하기 싫으니까 규칙을 깨버리려고 합니다. 종종 그들은 자기가 받은 것이 있다는 사실도 모를정도로 눈이 좁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론 시스템의 헛점을 이용해서 산처럼 이득을 취하고 그런 이득을 계속해서 취하기 위해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도 존재합니다. 시스템의 모순이 산처럼 우리앞에 서있어도 한사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또한 어리석고 겁이 많은 사람들을 자극해서는 저 진보주의자들이 지옥을 만들려고 한다고 겁먹게 합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자전거를 타는 법을 잘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무게 중심의 변화에 반응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가 핵심적입니다. 이게 옳다거나 저게 옳다거나 하고 싸우지만 개는 개집이 편하고 금붕어는 어항이 편할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의 눈이 깨여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떤 감수성을 이룩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을 때 어느 천국의 규칙을 그대로 배껴올 수 있다고 한들 이 땅에서 그 천국은 재현되지 못할 것이며, 설사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천국안에서 이 땅의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엔 로쉐역을 맡은 줄리엣 비노쉬는 초컬릿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엄마의 유골을 버립니다. 마을 사람들의 아집을 깨는데 도움을 주었던 그녀는 이리 저리 떠돌며 살아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자신의 아집 혹은 엄마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녀는 진정한 안식과 행복에 이르렀다는 암시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언젠가 그 틀도 또 그녀를 억압하는 틀이 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껍데기 없이 직시함으로서 부질없는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그 메세지는 언제나 다시 들어도 유쾌한 메세지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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