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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3. 2. 11.

13.2.11

최근에 한국에서 큰 흥행을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널리 알려진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세한 부분에서 비약이 있었지만 그것은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택함으로서 잘 극복되었다. 그러나 반면 뮤지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주제곡을 제외했을 때 그다지 귀에 남아 오래 울리는 리듬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스토리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한 것인지, 유명배우를 썼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창력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어찌되었던 레미제라블은 현실을 생각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고 이 때문에 레미제라블이 세계적 흥행으로 보았을때도 이래적으로 한국에서 큰 흥행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들게 되는 생각은 많다. 예를 들어 팡틴이 고난을 겪게 될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적은 부자이상으로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라는 것이다. 팡틴은 공장의 다른 직원들에게 미움을 받고 다른 사악한 거리의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착취를 당한다. 그녀는 머리를 잘리고 이빨을 뽑히고 몸을 파는 창녀가 되어 죽는다. 그녀를 착취하는 사람은 그녀의 아이를 맡은 여인숙 주인 부부로 그들은 팡틴에게 잔혹하게 돈을 빼았는다. 이러한 것은 세상의 무서움, 안전한 곳을 원하는 마음을 자극하여 절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보호할 울타리를 원하게 만든다. 

 

어쩌면 잔혹한 부자들이 존재하는 세계란 이러한 심정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일 것이다. 그들은 대개 적극적 악을 행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혹은 어떤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차별의 선을 긋고 그 선바깥의 사람에게 무관심해진다. 팡틴의 삶을 보면서 팡틴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이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고 싶은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험으로, 악에 미친 자들로 부르는데 대개 지나치게 빠르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세상은 항상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다. 마치 정육점에서 소고기를 사는 사람이 어떻게 소가 도축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부자들은 가난한 이의 피와 고기를 먹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어떻게 그것을 얻게 되는가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세상에는 도축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있듯이 대부분의 경우 그들 대신 가난한 자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대한 시스템의 모순이 누적되어 무너질 때 그 문제에 대해 무지하고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곳을 살아가는 부자들을 지키는 차별의 벽, 기득권 보호의 벽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법과 관습이며 그 관습이 세상의 질서를 지킨다고 믿고 그걸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베르같은 사람도 있게 된다. 자베르의 눈에는 그 선의 바깥에서 흙탕물을 튀기며 사는 인간들은 구제불능이며 그들은 스스로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거나 신이나 자연의 질서에 따라 도움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보이는 것이다. 법과 질서가 무너질 때 세상은 완전한 지옥이 되며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진정한 지옥을 막기 위해 법을 잔혹하게 지키는 쪽이 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장발장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끝에 선악에 대한 혼란에 빠지게 되자 자살을 택하고 만다. 

 

물론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발장이므로 아무래도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장발장의 생애다. 도대체 장발장이 이룩한 것은 무엇이고 장발장이 저지른 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된 질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 이야기는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치고 19년이나 감옥에 갇히게된 장발장이 감옥을 나와서 배척되고 차별받던 끝에 한 신부를 만나서 새 사람으로 태어나기로 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항상 테두리가, 예를 들어 앞이 있고 뒤가 있다. 이 단순한 이야기의 앞을 보면 그 시대적 배경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등장의 혼란기이다. 혁명정부는 엄청난 양의 돈을 찍어내서 물가를 폭등시킨다. 결국 혁명정부는 그들의 이념을 위해 시민들을 착취한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돈이 없어서 빵을 훔쳐야 했던 장발장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양심불량의 소수자를 말하는게 아니라 이런 시대적 모순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장발장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의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주목하는 한가지 이유는 미국을 선두로 소위 부유한 국가들이 돈을 마구 찍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악이란 탐욕스러운 부자들이고 그들을 쳐부수면 자유롭고 행복한 날이 오게 되는가. 그들이 장발장을 불행하게 한 자들인가. 물론 탐욕한 자, 죄를 짓는자를 저지하고 없애는 일은 언제나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을 겪은 사람들은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중의 코제트와 결혼하는 마리우스는 폭력혁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장발장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다. 이 에피소드는 적어도 그런 식의 혁명만으로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작자의 의도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시대적 모순의 해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근원적으로는 오직 하나다. 우리가 모두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 문제는 더 좋다는게 뭘 뜻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저 두들겨 맞아도 참고 웃기만 하는 바보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억압받는 시민들을 구하겠다면서 폭력혁명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애초에 절대적 의미에서 좋다와 나쁘다는 없다. 기존의 체제 입장에서 보면 잔혹하게 법을 지키는 자베르야 말로 가장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게 아니라면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뜻은 대안적 세계를 꿈꾸고 만드는 사람들이다. 시대적 모순을 만들어 내면서 지탱불가능하게 쓰러져 가는 현 시스템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 속에서 그 질서를 지키고 따르는 사람, 새로운 윤리와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즉 체제적 대안이 있고서야 우리는 근원적 차원에서 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비전이고 가치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얼마나 믿는가 하는 것이다. 

 

체제적 대안이 있다는 말은 무엇보다 저 사악하고 욕심많은 악을 욕하는 것 이전에 우리끼리는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대개의 혁명가는 저 바깥쪽을 가르켜서 악이 있다고 하고 모든 불행이 그들로 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런 혁명은 성공도 어렵고 성공해도 다시 과거의 악이 부활하고 만다. 탐욕한 부자를 하나 무너뜨리고 나면, 폭력적 독재자를 하나 무너뜨리고 나면 다시 새로운 부자와 독재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마는 것이다. 독재정부를 무너뜨리자면서 외치는 자칭 혁명가가 지독한 독재적 모습을 보이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레미제라블에서 언뜻 생각하게 되면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장발장이 새 사람이 되게 된 것이 종교를 통해서 즉 신부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빅토르 위고가 살던 시대, 그가 살던 유럽에서 새로운 대안의 중심에 종교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가 답인가? 과연 종교는 19세기에서는 답이 될수 있었을까. 하물며 21세기에는 어떤가. 진지한 종교인들은 종교의 진정한 뜻을 알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내 의견으로는 그런 말은 아무 것에나 다 할수 있다. 과학의 진정한 뜻을 알거나 예술의 진정한 뜻을 알거나 심지어 인간이라는 사실의 진정한 뜻을 알아도 세상은 구원받을 것이다. 문제는 그 진정한 뜻이라는 게 어떤 통로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게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다.

 

이제까지의 글을 보면 알겠듯이 사실 빅토르 위고의, 아니 나아가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의 질문은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게 뭔가하는 것이고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빅토르 위고의 답은 종교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듯하다. 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남을 위해 사는 인간이 됨으로 해서, 우리는 비로소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질문자체는 유효하다고 해도 과연 21세기의 우리도 그런 답으로 충분히 위안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던가 '신'이라던가 하는 답으로 대안이 되고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대안으로 내밀 수 있을까. 결국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 종교심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국가의 시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 잘알게 됨으로서 이룩된 것이 아닌가. 레미제라블이라는 이야기의 뒤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는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가, 어떻게 장발장이라는 비극을 다시 만들지 않도록 할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우리는 이미 낡은 답이 잘 듣지 않는 시대를 다시 살고 있다. 천문학적 규모의 빚을 한국 정부가 지방 자치단체가 또 세계의 여러 정부들이 가지고 있고 그 빚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너도 나도 돈을 마구 찍어내는 시대를 살면서 또 많은 사람들은 직장을 잃거나 폭등하는 물가때문에 또다른 장발장으로 변할 위기에 처해있다. 오늘날 한국에는 신용불량자가 백만명이라고 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자가 되었으나 그들의 3분2는 3년이내에 망한다고 한다. 아이를 하나나 둘만 낳는데도 그 아이를 키울 교육비가 없고 젊은이들은 사랑하지만 살 곳을 구할 수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역시 레미제라블의 답들을 반복할 수 있다. 누군가를 악으로 여기고 그것만 제거되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생각할수도 있고 종교에서 답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좋은 왕이나 새로운 혁명정부가 답이 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처럼 좋은 대통령을 하나 잘 뽑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답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장발장의 질문에 대해 더 좋은 세상,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질문을 더 잘 이해하는 것에 레미제라블이라는 이야기가 가지는 진정한 뜻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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