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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12명의 성난 사람들 (1957)

by 격암(강국진) 2013. 9. 30.

13.9.30

 

헨리폰다가 주연을 맡은 1957년의 흑백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봤다. 훨씬 최근에 본 아바타나 인셉션같은 할리우드 영화와는 여러모로 다른 영화지만 그 이상의 몰입도를 가지고 흥미있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영화의 기본줄거리는 이렇다. 한 살인사건의 배심원을 맡은 12명의 사람들이 문이 잠긴 방안에 있다. 그들은 아버지를 죽였다는 한 외국인 아이에 대해 무죄와 유죄를 만장 일치로 선택해야 한다. 만약 유죄가 결정된다면 그 아이는 사형에 처해진다고 미리 말해졌다. 배심원들은 일단 투표를 통해 유죄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수를 세는데 그 수는 11대 1이었다. 다시 말해 오직 핸리 폰다가 그 역을 맡은 건축가 한 사람만 무죄에 표를 던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 마저도 무죄를 확신한다기 보다는 좀 생각을 더해보고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무죄에 표를 던졌다고 말한다. 그마저 유죄를 선택하면 그 아이는 바로 사형판결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들은 대화를 통해 어떻게 이 11명의 사람들이 재판이 부실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죄로 의견을 돌리게 되는가로 채워져있다. 심지어는 영화 맨 마지막에 한 노인이 인사를 하면서 이름을 서로 묻는 장면이 등장하기전에는 출연진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조연들의 역할이 그냥 배심원1 배심원 2 하는 식이다. 영화의 무대는 방바깥을 나가지 않는다. 고작해야 방에 딸린 화장실로 화면이 옮길뿐 영화내내 카메라는 좁은 무대에 머물고 사람들은 끝없이 이야기만 한다. 그래도 영화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왜 재미있었을까? 56년전에 발표된 흑백 영화가 아직도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속에서 등장하는 계층이나 인종적 차별을 만들어 내는 편견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지 않았던가? 새로울 수도 없는 이야기가 왜 재미있을까?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일단은 긴장이다. 영화속에서 그 날은 기록적으로 더운 날씨에 처음에는 선풍기도 틀지 못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사람들은 모두 더워서 짜증을 낸다. 모두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 맞서서 회의론을 주장하는 핸리폰더의 입장은 언제 사람들의 분노가 극에 다다를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실제로 사람들은 끝없이 분노를 터뜨린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조금씩 그 사건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사건에 등장하는 증인이나 피고를 자신의 입장과 연관시켜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너무나 확실한 증거들 그리고 뻔한 결론을 가진 듯한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런 저런 증거를 대는 것처럼 하다가도 결국 빈민가의 그런 아이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뻔한 것아닌가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를 들어 자신도 빈민가 출신이었던 사람이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라는 지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장 극렬하게 유죄를 고집했던 사람도 결국은 자신을 때리고 집을 나가서 연락하지 않는 야속한 아들에 대한 원망을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생각되는 피고에게 퍼붓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나 다른 배심원들에게나 명백해 진다. 

 

이렇듯 극이 진행되어 가면서 사람들이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그 재판을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하니 전에는 지나쳤던 여러가지 사소한 것들이 보이게 된다. 과연 두가지 증언은 상호모순이 없는가, 노인의 증언은 정말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 그런 칼은 두 개가 없다는 검사의 말은 사실인가,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서 살인현장을 목격했다는 그 여자의 코에는 안경자국이 남아있었다 같은 것이다. 

 

극 전체를 통해서 핸리폰다는 합리성의 화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는 과학자처럼 세심할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주관적 입장이 문제를 너무 쉽게 판단하게 만들지 않는가에 대해 끝없이 조심한다. 그가 모든 새로운 증거를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증거들이 나타나고 결국 확실한 사실로만 보였던 증거들이 하나둘씩 무너져서는 사람들은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유죄를 확신했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댓글중에는 자유민주주의를 배웠다는 말이 있었다. 확실히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너무나 많이 반복되어 교육되어진 현대사회의 기본적 교훈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현대사회에 대한 교과서이며 핸리폰더는 이상적 현대인의 실체화라고 할만하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런 꿈은 21세기에도 영화바깥에서 성취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우리는 정말 핸리폰더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여전히 무관심하고 귀찮다고 자신의 편견에 맞춰서 뭔가를 결정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심지어 사람이 죽어간다는데도 입장을 바꿔서 자세히 생각해 보지 않고 그런 놈들은 죽어도 싸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단단한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은 정말 합리적인 의심을 거쳐서 믿고 있는 것들인가. 이 영화가 여전히 재미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56년전의 미국영화에 표현된 사회에 대한 기대치가 21세기 한국에서도 이룩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11명의 무심한 배심원들을 보면서 뭐 저런 인간들이 다있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핸리폰더에게 감탄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내게 있어서 영화가 주는 주된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정의를 논할 때 그 대상을 우리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그 대상이 되는 존재, 사람을 가족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한다는 것은 자체적으로 모순이다.

 

왜냐면 우리는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항상 위험하며 우리들에 대한 위협이라고 듣기 때문이다. 다른 계층은 우리계층을 착취하거나 약탈하려고 한다. 저 동네 사람들은 항상 우리 동네사람을 위협한다. 저 나라 사람은 이 나라 사람들을 항상 미워해 왔다. 저런 동물들은 인간들에게 항상 위협이다. 이런 식이다. 그런 지적은 때로 사실일지 모르지만 이런 점을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서 정의를 논하는 것은 재판전에 선고를 내려놓고 시작하는거나 마찬가지다. 왜냐면 처음부터 나와 그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판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진실에 대해서도 적어도 두가지의 다른 반응이 있는 것같다. 하나는 바로 다름을 오히려 더 명백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서로 타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잘 협상을 하거나 싸워서 정의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는 노조와 경영진으로 이뤄져 있고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이뤄져 있고,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이뤄져 있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입장을 잘 살펴서 자기몫를 챙겨야 정의가 이룩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다름의 명백한 인식을 자기를 찾는 일로 생각한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는 노동자다. 너는 무슨 가문의 일원이다. 너는 여자다. 뭐 이런 식이다. 결국 세세히 우리는 모두에게 이름표를 달아서 모두가 모두와 다른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고야 만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이고 과학정신이라고 할수도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반대로 다름이전의 동일함을 인식토록 노력하는 것이다. 비폭력운동의 선구자인 간디는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는게 아니라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극단의 감동적인 자제력으로 폭력에 맞설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폭력이 나쁘다라는 것이 아니다. 폭력을 행사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도 그것을 자제하는 자제력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영국인으로 하여금 또 세계로 하여금 인도인이 야만인이고 당연히 통제받아야 하는 골치덩이가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는 영국인 이상의 윤리를 가진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디는 인도인이 윤리를 가질것을 촉구하고 그럴때만 인도가 탄생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럴때만 세계가 인도인들을 테두리바깥의 위협이나 골치덩이가 아니라 자기와 한 테두리안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는 구제불능의 멍청이와 악인이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있겠지만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 영화에 나오는 11명의 배심원처럼 의견을 바꿀수 있고, 피고를 자신의 이웃과 가족의 일부처럼 진지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결국 진짜 권력은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열만 일으키는 싸움은 승리를 가져오지 못한다. 다수가 하나되는 공감만이 승리를 가져온다. 

 

여기까지 읽으면 알겠지만 결국 그래서 나는 진정한 혁명이란 감동을 가지고 일으키는 것이며 악을 무찌르고 테두리를 그어서 저 테두리 바깥의 저사람들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공감하고 그런 공감대를 유지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깥이전에 나와 우리를 찾는 것이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것이다. 그 틀의 시작은 감동일 것이고 그 틀에는 역사와 철학이 포함될 것이다. 

 

영화를 본 밤에는 핸리폰더와 꿈속에서 대화를 나눈것 같다. 밤새도록 그는 내앞에서 서성거렸다. 하지만 뭐라고 대화를 나누었는가는 깨어나니 전부 잊혀졌다. 그러나 내 입에 미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다지 나쁜 만남은 아니었던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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