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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이야기 : 오즈 야스지로의 오차즈케의 맛

by 격암(강국진) 2011. 10. 25.

11.10.25

흑백영화인 오차즈케의 맛은 일본 감독인 오즈 야스지로가 1952년에 찍은 영화다. 오즈 야스지로는 중하류층 가정의 생활을 다루는 가정극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감독으로 유명하며 섬세한 인물묘사와 아름다운 화면으로 칭찬받는 감독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되면 나의 아내처럼 많은 사람들이 웃거나 비판적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영화에는 촌스러운 점들이 많다.  화면이 흑백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대화를 할 때 각 인물을 잡는 장면이 나오면 항상 무슨 주민등록 사진 찍듯이 정확히 똑같은 구도로 화면을 잡는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지가 않아서 대화를 할 때면 마치 서둘러 정해진 대본을 무미건조하게 읽듯이 한다. 그래서 감정의 기복이 안 느껴질 때가 많고 특히 주인공 여배우는 표정에 기복이 없다.  더구나 선을 봐서 결혼한 두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나 싶더니 매우 매우 허무하게 오차즈케를 같이 먹으면서 딴사람처럼 여자가 변하고 마니 어딘지 속은 느낌이 들고, 헛웃음이 날 정도다. 

 

그런데 116분으로 비교적 길이도 긴 이영화, 아무 특수효과나 폭력이나 복잡한 전개도 없는 이 영화가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매우 참신하게 느끼면서 재미있게 이 영화를 봤다. 도대체 왜 이런 영화가 재미있을까? 거기에는 뻔한 이유가 한가지 있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한가지 있다. 뻔한 이유란 이렇다. 이 영화는 1952년의 일본을 보여준다. 빠징코장이 그때는 저렇게 생겼구나, 여자들이 저렇게 옷을 입고 다녔구나, 야구장이며 경륜장이란게 저 때도 있었구나 가정집은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것들이 오히려 반세기가 시간이 지난 현대인에게는 더욱 흥미롭다. 즉 1952년의 일본 문화 자체가 영화의 흥미를 만들어 낸다. 

 

이런 경우는 오늘날에도 많아서 많은 영화가 일종의 어디 관광영화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호우시절은 사천지방의 풍물을 보여주면서 그 위에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덮기에 흥미가 배가 되는 것이고 투스카니의 태양은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의 풍물이 있기에 영화가 흥미로워 진다. 

 

오차즈케에 나오는 일본의 모습은 화려하고 신기한 것은 거의 없지만 반백년이라는 간격과 한국과 일본이라는 간격때문에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흥미를 끄는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그때의 가정집 소파는 저렇게 생겼고 일본 니코의 여관집은 저랬구나 하는 것을 보는 것만도 재미가 있는 것이다. 

 

사실 영화속의 일본은 놀랍도록 부유했다. 몇가지를 제외하면 영화속에서 일본인들이 사는 것은 오늘날과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물론 라면은 일본의 대표적 음식이 되었고 빠칭코는 엄청 거대한 사업이 되었지만 말이다. 잘사는 일본인들의 모습 때문에 우리 부부는 저 때 한국은 해방직후에 진짜 가난했는데 일본은 잘먹고 잘살았구나 하면서 툴툴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재미있는데에는 이런 뻔한 이유를 제외하고도 중요한 이유가 적어도 또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세상이 단순했던 시절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영화속의 세상은 매우 단순하고 여러가지 제약속에서 살고 있다. 영화의 중심주제가 되는 선봐서 결혼하는 풍습만 해도 그렇다. 요즘도 선보는 사람도 있지만 영화속에서 처럼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속의 인물들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뭐랄까 닳고 닳은 도시사람이 시골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 단어를 몇만단어쯤 쓰는 사람이 백단어나 천단어쯤만 구사하는 사람을 보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사람들의 사고는 단순하고 고민도 소통도 단순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문에 생기는 갈등구조의 이해도 단순하며 인간에 대한 묘사도 갈등의 전개도 단순하다. 단순해서 나쁜가? 단순해서 좋다. 음 뭐랄까. 게임을 하는데 규칙이 복잡하다고 게임이 더 재미있어 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더 재미가 없다. 온갖 핑게와 편법이 난무하면 뭔가 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반면에 단순한 규칙이 있는 게임은 속임수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보인다. 뭔가 직구만 있다는 느낌이다. 그게 바로 옛날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오늘의 세계는 그렇지가 않다. 오늘의 세계는 (세상이 그래서 영화도 그런데) 말하자면 인간관계가 무한히 많은 예외조항으로 덕지덕지 발라져서 도대체 규칙이란게 뭔지 알기 힘든 세상이다. 그것은 분명 선보고 결혼하는 풍습이 만들어 내는 문제같은 것을 해결했는지는 모르나 동시에 그보다 더 고약할 수도 있는 문제를 만들어 냈다. 도대체 사람들이 투명하질 않다. 진짜 정보는 마음속에 두고 빙빙 돌려서 유리한 판을 짜는 느낌이고 그래서 순박한 사람들은 대개 닳고 닳은 사람들과 만나면 별다른 일을 당하지 않아도 속은 느낌이고 불쾌한 느낌을 받곤 한다. 자기는 곧장 자기마음을 다 말하는데 상대방은 뭔가를 빙빙 돌리기만 하면서 자신을 안개속에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영화나 소설 만들기가 어려운것 아닌가 싶다. 오차즈케의 맛같은 영화를 보면 이건 마치 회처럼 음식의 재료 그자체로만 맛을 내는 요리같다. 반면에 오늘날의 영화나 소설은 엄청나게 조미료를 쳐대서 도대체 원재료가 뭔지 알 수없을 정도다. 그건 그만큼 오늘날 사람들의 행동방식이 전과는 다르게 복잡해서 갈등이 쉽게 발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단순해야 갈등이 고조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문제가 너무 복잡하면 고조도 없고 전개도 없다. 얼마전에 한국 영화 하녀가 개봉되었는데 별로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옛날 영화 하녀에 연연하면서 새 영화를 만들었다면 현대판 영화는 별로 관객에게 공감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옛날 영화 하녀에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좀 이런 것같다. 우리가 간단한 게임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게임을 하다보니 어딘가 불공평하다. 그래서 게임의 규칙을 좀 덧붙인다. 분석과 비판 그리고 상황의 분류와 차별이다.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된다. 나중에는 게임의 법칙이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새로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입장에서 게임의 법칙은 사실상 그저 위선인 것같다. 너무 복잡한 규칙이 사람들을 묶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아들에게 한번 결혼하면 이혼하지 말고 사는게 옳은 일이라고 가르치고 싶은가? 진보적 영화는 이혼은 삶의 선택이라고 열심히 강조한다. 이혼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말하는 것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인으로서 나는 그 둘다 옳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그걸 어린 아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다. 삶의 경험이 다르니까. 그냥 결혼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말 것이다. 성적인 억압과 성적인 방종도 마찬가지다. 모순되는 규칙과 해석 그리고 끝없는 다양화와 복잡성의 증대속에서 자유로워진건지 자유가 하나도 없어진건지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 현대다. 나는 세상사는 규칙같은걸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같은걸 들이대면서 이걸 읽어봐하면 아이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제국이나 문명은 규모가 점점 성장하다가 급몰락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체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규모를 늘리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 규모의 비효율성때문에 급하게 몰락한다. 문화도 그럴지 모른다. 어느날 너무도 복잡해서 누구도 뭐가 사는 규칙인지 모를 때 누가 이거 난장판이잖아, 싹쓸어 버리고 간단한 규칙으로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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