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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인자무적 (仁者無敵)

by 격암(강국진) 2010. 12. 9.

2010.12.9

 

오늘은 꼭 무협지 제목같은 인자무적이라는 것을 키워드로 생각을 좀 해볼까 한다. 시작은 무협지 같고 유교에 대한 것 같지만 실은 유교에 대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며 느낀다는 것, 감수성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될것이다. 

 

보통 인자무적이란 말은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라고 번역된다. 나는 이 번역을 뒤집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인(仁)하다는 것이 뭔지를 생각해보면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는 번역보다 훨씬 그럴듯하고 멋진 메세지가 나온다. 유교를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것이 진정한 공자의 메세지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냥 나의 생각일 뿐이다. 

 

김용옥은 논어를 강의하면서 인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한의학의 용어를 들어서 인이란게 보통 말하는 어질다같은 뜻이 아니라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는 점을 설명한다. 한의학에서 불인이라는 말은 몸이 마비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몸이 뻣뻣해져서 반사작용같은 것이 없어진 상태를 불인하다고 말한다. 

 

김용옥은 거기에 미학이라는 서양단어와 마취라는 단어를 더하는 한가지 예를 첨부한다. 그것은 미학이라는 단어인 aesthetics에다가 부정을 뜻하는 말을 붙이면 anesthetics 즉 마취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열거한 후에 김용옥은 인의 번역은 느낀다라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이란 느끼는 것이란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인자무적은 느끼는 자는 적이 없다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느낀다는 것이 어진 사람이 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느껴야만 하는 윤리적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바로 어진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소위 측은지심을 느끼지 못하면 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부분은 어진행동을 행하는 것이 인한사람이 아니라 인간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한 사람이라는 부분이다. 

 

느낀다라는 것을 반드시 무슨 윤리적 행동에만 관련시킬 필요는 없으며 흔히 그렇게 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경고하고 피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느끼는 것도 느끼는 것이다. 수학문제를 풀다가 기가막힌 영감을 받아서 답을 느끼는 것도 느끼는 것이다. 일찌기 아인쉬타인은 자신이 답을 잘 냄새맡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논리적 증거는 아직 없지만 이런 것이 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서 정리하면 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느끼는 능력을 잃게 되었을까? 그걸 위해서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하루를 잘보내는 방법으로 흔히 말해지는 것은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뭘해야 할지를 적고 그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우고 한가지를 한 다음에는 다음 번에는 뭘할까를 생각해 보고 그것에 따라 일을 진행한다. 나도 때로 이런 방법을 따르며 이렇게 따라서 이런 방법 그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아침에 그 목록을 작성할때는 동네슈퍼가 부실공사로 무너지기 직전이라 출입금지가 되어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그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단지 목록에 슈퍼에 간다라고 써있다는 이유로 무너지는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분명 바보일것이다. 

 

이 바보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 사람은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이 사람은 그저 정해진 것을 하려는 것에만 집착한다. 그러나 정해진 것을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뭘해야 하는가를 느끼는 것이다. 논리 이전에 영감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인쉬타인의 냄새맡기는 논리적 사고 이전의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물론 규칙을 정하고 그걸 지키고 하는 일을 폄하하는 거라고 이해한다면 그게 아니라고 강조해 두고 싶다. 자동차를 타고다니는 것이 나쁜 이유중 하나는 계속 그렇게 하다가 보면 걷는게 불가능할정도로 체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체력이 충분히 강하다면 자동차 타기는 편리한 것이고 피해야 할 필요가 없다. 느끼는 능력이 충분하다면 우리는 논리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피해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걸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그 느끼는 능력이 퇴화되어 버렸을 때는 논리고 뭐고 다 필요없다. 애초에 아침에 뭘해야 할것인가하는 것을 결정할 때부터 뭔가가 잘못되어 있기 쉽상이다. 

 

우리가 특히 느끼는 능력이 떨어질 때는 언제인가. 그건 바로 아플 때다. 몸이 아플 때는 제 아무리 엄밀한 논리와 증거로 사고를 해도 태산처럼 거대한 것을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쉽다. 바로 무너지는 건물에 그냥 들어가는 바보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안 아프기만 하면 우리는 잘 느낄수 있는가. 뭐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 건강하면 잘느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건강이란게 뭐냐는 거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련이 필요하고 생활의 조정이 필요하며 필요없는 일에 끼어들어 몸과 정신을 소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느끼면 중요한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한걸음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만으론 되지 않는다. 느낀대로 살아야 한다. 자기를 단련해야 한다.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나 무거운 바벨을 들어올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쓸 수단을 얻는 것이다. 힘이 세고 지식이 많으면 우리는 그것을 도구로 활용해서 많은 것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느끼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술교육이니 호연지기를 기르니 하는 것은 이런 것인데 현대의 한국 교육현장에서는 이 점이 거의 실종되어 있다. 모두들 도구로서의 지식을 얻기위해 혈안이 되고 더더욱 공부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하다보니 오히려 고의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마비된 아이, 마취된 인간들을 양산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새를 취한다. 공부하는 바보들이란 표현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가. 

 
인자는 왜 무적인가. 느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이웃이 나에게 독한 말을 한다고 하자. 이럴때 우리는 그 이웃에게 복수할 좋은 방법이나 그 이웃으로 부터 나를 보호할 방법을 찾을 수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이 때로 필요하지 않은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해결책은 상자안의 생각이랄 수 있다. 즉 정해진 틀속에서만 사고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미니까 버티려고 하거나 반발하려고 할뿐 왜 그는 나를 밀까라는 수준으로 사고를 넓히지 않는다. 나는 애초에 왜 여기에 살고 있는가라는 수준으로 사고를 넓히지 않는다. 


그 이웃이 나를 미워하는 이유는 사소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웃은 알고보면 불쌍한 사람이라 나를 시기하고 있을 수 있고 나의 존재자체가 그 이웃에게 어떤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나같은 사람이 이런 곳에서 이런 사람들과 이런 식으로 얽히면 오해가 생기기 쉬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선의로 행하고 말한 것이라고 해도 이러저러하게 살면 이런저런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따라 내가 해야할 행동은 전혀 다르게 된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어진 사람이란 그저 참는 사람, 욕해도 웃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사람이 적이 없을 리가 없다. 


느끼는 인간은 적이 없다. 가장 현명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적이 많다. 자기가 누구를 어떻게 찌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행이 나쁜 정치가들에게서 그걸 쉽게 느낀다. 그들은 분명 지능적으로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불인하다. 마비가 되어 있고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러니 어떻게 적이 없을 수가 있을것인가. 우리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자주하는 말인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지금 이순간 내가 뭘해야 하나를 '느끼고' 그걸 행할뿐이라는 뜻이다.

 
그럼 느끼는 능력은 어떻게 개발하는가. 건강이 중요하다 같은 말은 이미 했지만 그건 이거다라고 결정적인 말은 할 수가 없다.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건 없을지도 모른다.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사색하고 운동하고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이 뭔가를 숙고해서 행하다보면 늘어나는 것이 이 능력이되 타고난 것도 있는 것같다. 물론 정도 문제지만 모두가 예술가가 되거나 수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기업가가 되거나 훌룡한 가장이 되거나 좋은 연인이 되거나 효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타고난 느끼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같다. 그래서 오랜동안 인형처럼 장님처럼 여기저기 부딛히고 밀려다니고 남의 말에 따라 살았다. 그러나 태어난 것이 어떻다던가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떻다던가 하는 말은 언제나 부질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5분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행하는 것이다. 할수 있는 것을 모두 다했다면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따지고, 비교하고 자랑하고 주눅들어서 뭘할 것인가. 남은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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