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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는 왜 왜 사는가를 물어서는 안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1. 1. 5.

2011. 1. 5.

 

소설 철학을 위한 여행을 읽고 조금다른피드러스님이 어떻게 사는가하는가가 아니라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없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올려주셨습니다. 좋은 질문인것같아 그 질문을 읽고 마음에 떠오른 것을 써보기로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일종의 언어가 만들어낸 문법적 혼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질문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그 질문을 논하기보다는 왜 왜 사는가를 물어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다른 설명을 해보기로 합니다. 

 

왜라는 질문을 세상 전체에다가 던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숭고하지만 우리는 항상 세상에 질문을 가진 상태로 남을 것이라는 겸허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세상전체에다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다만 내 인생에만 그렇게 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승엽선수같은 유명 야구선수의 중요성은 프로야구 리그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전혀 이해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개인의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그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것이라면 그 개인이 존재하는 세상, 그 개인이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왜 사는가, 내 인생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약간만 파고들어도 결국은 세상전체의 존재의미나 이해로 확대됩니다. 내가 지금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주인공인건지 베트맨에 나오는 악당역인건지를 모르면서 나의 배역의 의미를 찾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 난 그렇게 대단한 것을 원했던 것이 아니야라고 해도 이런 문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난 고층아파트의 어느 층인가에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라고 하면 그 아래층 이야기가 나오고 더 아래층 혹은 더 윗층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걸 더 확대해봐야 어디선가 멈춰야 하는데 결국 그 멈춰선 곳에서 독단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구가 움직이지만 우리는 지구를 멈춰선 땅처럼 생각하고 지구를 기준으로 자동차나 비행기속력을 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존재의미를 어떤 커다란 존재에 기대어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문이라던가 국가라던가 민족이라던가 인류라던가 하는 거대한 존재입니다. 즉 그런 거대한 존재의 존재의미자체는 독단론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존재와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의 인생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는 나는 한민족의 일원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데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다라는 것이겠습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법은 오늘날에도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답이며 편리한 도구입니다. 다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특히 현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은 훨씬 빠르게 변하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어떤 개념과 우상도 쉽사리 비판받고 무리한 것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편리한 관점을 사용하되 지구도 사실은 맹렬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약간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만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일종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서양의 전통적 사고에서 핵심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칼 포퍼가 본질주의적 태도라고 부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사고는 바로 환경과 분리된 사물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쇠구슬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 쇠구슬을 제외한 우주의 모든 것에 상관없이 쇠구슬은 쇠구슬이며 우리는 쇠구슬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생각하는 사고의 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피타고라스 정리를 공부하면서 세상의 기후 문제나 뉴욕의 주가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것은 과학에 뛰어난 명쾌함을 주지만 재현성에 있어서는 문제를 만듭니다. 이 우주에서 똑같은 조건이란 단한번도 반복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주의 일부분이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되어서 정의될수 있으며 그래도 변하지 않는 성질이 있다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재현될수 있는 실험이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쇠구슬이라던가 바위라던가 원자라던가 하는 것들은 인간의 수명같은 시간기준으로 보았을때 변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물리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적합합니다. 그런데 주변과 맹렬히 결합하고 변하는 것들은 그런 시각이 착각을 만들고 그런 방식의 연구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제가 자주드는 예입니다만 토끼모양의 풍선은 풍선안의 공기와 바깥공기의 압력이 균형을 이뤘기때문에 토끼모양을 유지하는것입니다. 그 풍선을 지구바깥의 진공으로 가져가면 풍선은 터져버립니다. 그러니까 풍선바깥쪽을 제외하고 풍선을 정의하면 착각이 생겨날수 있습니다. 토끼모양이라는 그 성질은 풍선의 안쪽이상으로 바깥쪽의 영향의 결과인 것입니다. 

 

생명이 그러하고 인간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닫혀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는 우리의 몸뚱아리안에 있는 것,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 이상으로 그 바깥에 있는 것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는 우리 몸뚱아리를 가르켜 '나'라고 부르는 것, 이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고 묻는 것은 개념상의 혼돈인 것입니다. 토끼풍선의 모양이 그러하듯이 나의 나다움은 나의 성질이기 전에 세상의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은 정말 엄밀히 정의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버지가 없이 아들이 될 수 없고 열등생이 없이 우등생이 될 수 없고 가난뱅이가 없이 부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에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부 세상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부족한 식견으로 다시 재해석해서 받아들인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나라고 말하면서 바깥 세상과는 상관없이 이 그림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는 일에 골몰해 봐야 어떤 이득이 있을리 없습니다. 어떤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가 만들어낸 환각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하는 것은 지금 이순간 여기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느끼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수성을 확대하여 세상을 점점 더 크게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이란 것을 가지게 된다고,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의미를 느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때로 말로 전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되지만 말입니다. 말로 전부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장을 멈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직 성장해 나갈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면 당연히 그걸 전부 다 말로 할 수 없지요. 삶의 의미는 상당부분 이런 외경심, 분노, 신비감에 의존합니다. 단순히 명쾌히 질문하고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고정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봄비를 손바닥에 느끼듯이 순간 순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성실하게 살다보면 그리고 운도 따른다면 어느 순간 그 삶에 대한 왜를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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