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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금방 떠날 사람처럼 사는 것의 장점

by 격암(강국진) 2011. 1. 29.

2011.1.29

 

나는 외국에 산다. 그러나 일본에 뿌리박고 평생 여기서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일본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런 암묵적 가정은 나와 내 아내의 행동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미친다. 예를 들어 가구를 생각해 보자. 이런 생각으로 살면 돈을 많이 들이고 예쁘고 좋은 가구를 살 생각을 하기 어렵다. 돈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을 많이 지불하려면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것은 그래 한번 사면 십년은 쓸건데 하고 생각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마련이다. 책상을 사도 소파를 사도 책꽃이를 사도 티브이를 사도 그렇다. 지금 여기는 임시로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면 크고 무겁고 비싼 것은 아 내가 이걸 사서 몇년이나 쓰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 때문에 비싼 것을 사지 못한다. 

 

나는 애초에 사치품에 크게 아쉬워 하는 편이 아니며 아무래도 아내가 좀더 집안의 장식이며 가구며 자동차에 아쉬움이 크겠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나역시 만약 미래는 이렇게 저렇게 정해져서 난 여기에 뿌리박고 30년이고 40년이고 살것이다라고 생각했다면 좀더 지출을 많이 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아내와 종종 인테리어 가게에서 이런 저런 장식들을 구경하는 것을 즐긴다. 동네에 있는 주택전시장에 가서 다양하게 꾸며진 집들을 보고 멋지게 우리 집을 꾸미고 사는 것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앞으로도 이 자리에서 오래 살거야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런 지출이 합리화가 되질 않는다. 

 

이렇듯이 금방 떠날 것 처럼 살면 돈의 지출패턴이 달라지게 된다. 내가 들고 움직일 수 있는 것에 좀 더 지출을 집중하게 된다. 커다란 티브이와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호텔로 가족여행을 가는 것을 비교해 보자. 좋은 여행의 경험은 내 몸에 남는 것이다. 하지만 이사갈 가능성이 있다면 커다란 티브이는 별로 좋지가 않다. 가지고 갈 수 없거나 가지고 갈 때 또 돈이 든다. 

 

반드시 모든 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아침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  분명 지혜로운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집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나에게 가깝고 그래서 항상 같이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몸이 그렇고 내 가족이 그렇다. 내가 가진 꿈이 그렇다. 나는 꿈을 어디나 가지고 갈 수가 있다. 나는 내 몸과 함께 할 것이고 내 가족과 함께 할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집이나 자동차나 가구는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종종 너무 빨리 오늘같은 날이 매일 계속 될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 옆에 있는 것들이 마치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쉽사리 착각을 하고 그 착각에 기반해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는데 그 착각이 너무 심해지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적자가 난다. 

 

예를 들어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내년도 10년뒤에도 당연히 건강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건강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다. 지금 가족과 문제가 없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쭉 살아도 가족에게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자리에 몇 십년 살 사람이 하는 것처럼 계획을 세운다. 비싼 대형티브이를 산다고 해보자. 그러면 대개 우리는 그 지출에 대해 아 이거좀 비싸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사면 오래오래 볼거야. 영화관도 덜가도 될지모르지. 그렇게 따지면 비싼게 아냐하는 식인것이다. 

 

대형티브이만 그런게 아니다. 어떤 직위나 학위를 따려고 한다던가 누군가와 경쟁에서 이기려고 한다던가 집을 사고 이웃이나 친구에게 어떤 일을 하나해줄 때도 우리는 흔히 알게모르게 너무 긴 계산을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계란 한 개를 들고 이 계란이 닭이되고 다시 닭이 알을 낳고 하면 10년뒤에는 난 부자가 될꺼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길게 생각하면 집착이 생기게 되기 쉽고 우리는 금새 삶의 어떤 중요한 부분에 대해 장님이 되고 만다. 

 

대개 길게 미래를 생각하고 계산한 일들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아라라고 나는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치를 부린다던가 어떤 높은 직위를 얻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지불해야할 댓가가 있을 뿐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길게 계산한 것 치고 맞아떨어지는 것이 거의 없으니 욕심에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또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다르다. 그때의 나는 생각이 달라져서 지금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예들은 무수히 이야기할수가 있어서 어느것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한국의 장래를 논하는 자리가 있다고 하자. 어떤 한 젊은 학생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 정부가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외교권이 강화될것이고 외교권이 강화되야 통일이 될것이고 통일이 되야 민족이 부흥할것이며 민족이 부흥해야 한반도 경제도 지금보다 훨씬 활성화될 것이다. 내가 대충 쓴 문장이 옳고 그른것은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말들은 틀린게 없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별가치가 없다는점이다. 독립, 외교, 민족 부흥, 경제같은 단어들은 확실한 의미를 가진것같지만 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말들이다. 이런 말들을 이어붙이고 붙여서 머릿속에서 달걀하나로 거대한 농장을 만들고 따라서 이런 저런 사람이 구의회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이 민중중흥의 첫걸음이 된다고 해봐야 그렇게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비약에 비약이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너무 진지하게 그걸 받아들인다. 거짓말하는 초등학생의 행동하나를 보고 이걸 놔두면 커서 이런 저런 일이 생긴다고 크게 크게 생각해봐야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모른다. 명문대에 들어가거나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교수가 되거나 사장이 되거나 대통령이 되면 행복해 질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른다. 행복해 질수 없다라고 말해도 틀리고 행복해 진다라고 말해도 틀린다. 우린 모른다. 

 

모르지만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르지만 우리는 그래도 여러가지 일들의 가치판단을 하고 그걸 결정한다. 앞에서 내가 말한 긴 사고의 사슬을 늘어놓고 뭔가를 결정하는 것이 의미없으니 뭐든 좋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땅바닥에 엉덩이를 너무 오래 대는 순간, 언제고 일어나 금방 떠날 사람처럼 살아가는게 아니라 어느새 계산을 길게 길게만 하는 버릇이 드는 순간 우리가 어떤 중요한 것들에 대해 장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공자님이 제사에 쓰일 소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소가 불쌍하니 양으로 바꿔주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논리적이지 않다. 양은 안불쌍한가? 양도 생명인데. 앞뒤를 맞춰서 넓고 길게 생각하는 논리로 보면 말이 안된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불쌍한 것을 보고 불쌍하게 느끼는 인간적 감정이 남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가난한 사람들이 애를 더 많이 낳거나 해서 결국 원조가 소용없어진다는 주장같은 것이 있다. 바로 멜서스의 인구론에 나오는 주장이며 이거 아니라도 많은 경제적 법칙이 세상에서는 주장된다. 나는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런 것이 옳을 확율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물리법칙처럼 정밀한게 아니다. 그런 계산도 길어지면 예측이 반드시 틀린다. 문제는 내가 지금 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감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인간적인 사람이 사는 곳인가 기계가 된 사람이 사는 곳인가가 문제다. 그걸 빼고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계산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생각하나에 우리가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그럼 계산이 맞질 않는다. 계산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이걸 왜하는가.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소용없는줄 알지만 그래봐야 뭐가 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이 안되지만 그래도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다. 이런 행동이 실종될 때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논리적이고 길게 계산 잘하는 사람은 대개 염세주의자가 된다.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말하면서 살았던 것도 지금 내가 말하는 맥락과 비슷한 것이 있다. 언제나 툭털고 일어나 떠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자유롭다.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모두 가지고 갈 수 있게 작게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마치 그자리에 앉아서 영겁을 살 것처럼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끌어모은 것들의 무게에 눌려서 그것의 노예가 되고 결국 삶을 낭비하게 되고 만다. 그리고 언제나 나와 함께 해야할 작은 꾸러미도 잃어버리게 되기 쉽다. 

 

꿈을 가지라는 말이 있다. 그것과 꿈에 집착하는 것과는 서로 다르다. 꿈이란 실현하는게 아니다. 제대로 꾼 꿈은 꿈을 꾸는 순간 실현된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것이다. 과학자가 되기로 꿈을 가졌는가. 그렇다면 과학자로서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 된다. 

 

이름과 실질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이름에 닿지 못한다. 이름은 실질이 아니다. 난 질질이가 되고 싶어요라고 꿈을 꾼다고 하자. 그런데 질질이가 뭔데라고 누가 묻자. 나는 그걸 모른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정말 꿈을 가진 것일까? 자기가 그게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꿈을 이룰수가 있는가. 

 

우리는 제대로 꿈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정말 제대로된 꿈을 가진것일까? 천만에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이라는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충은 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충 아는 것들이 앞뒤가 맞는지 어떻게 아는가. '여기 진토닉한잔 주세요. 진과 토닉워터는 빼고'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기는 농담이 된다. 진토닉에서 진과 토닉워터를 빼면 남는게 없으니까. 미국의 대통령이란게 뭔지 어떻게 아는가. 당신이 그 단어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상호 모순되어 그런게 존재하지 않는지 어떻게 아는가. 

 

이건 억지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해보지 않은 것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을 모른다. 모르는 것을 꿈꾸고 욕망하는 것은 가게에 가서 X를 주세요라고 하면서 나는 X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꿈이란 사실 우리 내부에 가진 욕망의 연장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것이 연장된 어떤 것이 우리 바깥의 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꿈꾸는 것이다. 꿈의 본질은 그래서 우리 자신이고 우리가 나갈 방향이며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가진것도 모른다. 다만 살면서 그게 뭔지 발견할 뿐이다. 뭔지 모르는 것을 꿈이라고 부르고 그 이름과 껍데기에만 집착하면 진과 토닉워터를 뺀 진토닉을 원하는 사람이 할것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먼저 진토닉을 만들고 진과 토닉워터를 뺀다. 그런데 잔에 아무것도 없으니 다시 진토닉을 붓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다. 왠지 살아가는 모습이 이런 것같은 사람이 세상에는 많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해봐야 나는 사실 과학자가 뭔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걸 원하는 것이다. 만약 과학자라는게 대학의 교수직함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집착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그것을 얻었다면 그결과 그 사람은 남들이 교수라고 과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실질에서 그사람은 도둑, 사기꾼, 아첨꾼이 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다. 이름에 집착해서 억지를 부렸으므로 이름만을 얻은 것이다. 그게 처음에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아이의 마음속에 있던 것일까?

 

그러므로 꿈을 가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내가 가지고있는 것에 기반하여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될수가 없다. 실은 꿈에는 이름이 없다. 꿈은 언어를 초월한 내가 느낀 가치다. 다만 그것을 누가 물으면 억지로 정치가니 과학자니 농부니 하고 말하는 것이다. 

 

정치가가 된다는 것은 정치가로서의 삶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이고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삶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이다. 댄서가 된다는 것은 댄서로서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것이다. 진정으로 그런 꿈을 가졌다면 꿈은 꾸는 순간 바로 이뤄진다. 꿈이란 내가 해야만 할 것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이며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는 것뿐이다. 아무도 내게서 꿈을 가져갈 수는 없으며 내가 나를 댄서라고 부른다면 나는 팔다리가 없어도 댄서다. 누구도 그 꿈을 가져갈 수 없다. 그건 직업이 아니라 삶의 태도고 방식이다.

 

껍데기에 치중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융통성이고 삶의 지혜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또 100% 순수만 추구하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 때문에 껍데기에 코가 꿰여서 본래의 순수한 꿈따위는 다 잊은 사람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 거의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 저것 욕심을 낸 끝에 어릴 적 순수한 꿈은 잊고 바쁘지만 뭔가 이뤄지는 것은 없이 그래도 나는 이것 저것 많이 가지고 있다며 위안하고 살 뿐이다. 진짜 자기가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게 아니다. 

 

금방 떠날 것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중요한 것을 미리 챙기고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 중요한 것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 있겠지라고 하면서 자잘한 것들을 끌어모으는 계산에 몰두하지 않는다. 내일 죽을 거란 것을 아는사람이 이번 승진심사의 결과를 걱정하거나 커다란 티브이를 사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죽을 것을 알아도 오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수확을 해서 그걸 즐기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리는 것 자체가 내가 해야할 일 즉 나의 꿈이므로 그것을 하는 것이다. 그나 그녀는 진정 내게 중요한 것을 비로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죽음앞에서 시간을 낭비하는게 아니라 죽음앞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내가 정말하고 싶었던 것, 내가 꿈으로 삼기로 한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작은 꾸러미를 단단히 챙기고 있는지 땅바닥에 엉덩이를 너무 오래 대고 있는 나머지 그걸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할것이다. 너무 무거워진 우리의 삶은 그걸 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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