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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by 격암(강국진) 2011. 2. 7.

2011.2.7

 

주말에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촘촘하게 늘어선 이런 저런 주택들을 구경하면서 동네를 걷다가 보니 땅 한평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집을 예쁘게 짓는 것도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것도 공간이 있어야 짓는다. 그래도 자기땅이라며 단독주택을 짓고 사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니 고층아파트에 사는 것은 뭐라 할말이 없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서있을 공간도 없어보인달까. 주차공간가지고 싸움이 나는 것만 봐도 이미 세상은 비좁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왜 그럴까. 왜 이 답답한 곳에 살지 않으면 안될까. 그 표면적인 이유는 뻔하다. 직장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며 이젠 시골에 간다고 해도 집값이 그렇게 싸지도 않을뿐더러 여러가지로 불편하다. 소위 문명의 혜택이란 것에서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 먹는것, 입는것, 사는 것, 의식주가 모두 불편하다. 

 

하지만 이 뻔하고 당연한 이유말고 더 깊은 이유는 없을까?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당연함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조금씩 비극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넓고 넓은 땅덩이에 인간이 몇명없으며 자연환경이 뛰어나다면 인간은 노루나 토끼가 그러는 것처럼 그저 살 수 있을 것이다. 살려고 노력하고 아둥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열매따먹고 이따금 사냥해서 고기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풍요로운 환경덕분이므로 우리에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수렵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하루 두세시간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역시 제일 큰 문제는 환경과 인구다. 

 

인간은 지금 문명이라는 게임을 하고 있다. 이것은 칭송받아 마땅한 것인 동시에 질병같고 그 경계가 없어서 제국주의나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게임이다. 그런데 그 게임은 뭘 위한 것일까? 게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인가? 아무래도 우리는 게임 그 자체를 위해 게임을 하고 있는 것같다.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과거의 어느 때 어떤 사람이 더 쉽게 더 많이 생산해내는 법을 배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인구증가에 따른 압박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면적에 사는 인구가 늘면 이젠 그저 채집생활만으론 먹고 살기 어렵다. 사냥도 힘들다. 그러니까 유목생활 즉 가축을 키우던가 농경생활 즉 농작물을 한자리에 머물러서 키우는 생활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산이 늘자 인구가 더늘어난다. 그리고 인간은 환경을 더 많이 파괴한다. 그래서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은 더 힘들어진다. 사람들은 또 더욱 '현명한' 방법을 만들어 낸다. 즉 더욱 엄청나게 생산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사람들은 더 넓은 면적을 더 조직적으로 개발해서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엄청난 생산물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같은 것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결국은 더 거대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고 그만큼 개개인의 인간을 더욱 조직의 일부로 특화시키는 것이다. 

 

역사란 이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흔히 인간문명의 발전사로 말해지는 이 역사는 분명히 비극적인 측면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고 그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앞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당연한 이유를 말했다. 그걸 곰곰히 생각하면 우리가 땅이 싼 곳에 가서 살 수 없는 이유란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럴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영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수영할 물도 잃어버린 물고기같은 존재다. 이젠 환경이 된다고 해도 자유롭게 혼자 살아갈 능력이 안된다. 그리고 물론 이젠 환경도 그런 환경을 찾기 어렵다. 

 

나는 현대문명이 주는 편안함과 쾌락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과거를 미화하는 일도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굶주려 죽어가는 때는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금이 아닌가. 단순히 죽고 굶주리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이다. 물론 예전에도 사람들이 행복에 겨워 웃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 처럼 매일매일을 근심걱정에 싸여서 살아가고 우울증에 빠지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복잡해진 삶은 삶이 단순했던 때를 그리워지게 만든다. 우리는 행복할 방법을 찾기보단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수단에 매몰되었다는 느낌이다. 돈이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돈벌기때문에 더욱 불행해 지는 모습이랄까. 

 

이러한 문명화과정의 가장 비극적인 측면은 그 과정이 불가역적이고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사람들에게는 문명화를 할래 말래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확실히 단기적으로 분업을 하고 팽창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지기 때문에 경쟁우위에 선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래서 이렇게 문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약탈해서 더욱 문명의 달콤함을 누린다. 하지만 그 약탈이 다 끝나고 나면 이젠 자기 내부를 약탈하기 시작하거나 더욱 발전된 문명이 나타나서 앞서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가. 인간이 하고 있는 문명이라는 게임은 주로 이렇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유럽의 약탈자들을 만나서 어떤 길을 걸었는가.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땅에는 임자가 없다. 같이 사는데 도움을 주마. 세상은 어차피 끝없이 넓다. 뭐 이런 식으로 반응했지만 '문명'적인 유럽인들은 결국 그땅을 전부 차지하고 인디언들을 멸종에 가까운 상태가 되게 만들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전세제도를 이용해서 집한채, 아파트한채로 집을 몇채 아니 수십채 수백채까지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투기 게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투기바람이 일어날 때 그것의 비합리성을 말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정말 투기의 거품이 꺼질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사람이 정말 투기바람으로부터 약탈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같은 사회시스템안에 있으면 그건 확신할 수 없다. 투기꾼들이 물가를 엄청나게 올려놓으면 그걸 따라가지 않은 사람은 결국 약탈을 당한 셈이 된다. 

 

이런 문명적 역사의 길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은 조화로운 삶이나 월든같은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게 모든 사람을 위해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아메리칸 인디언이 이미 유럽인을 만났는데 나는 나대로 살겠다고 해도 유럽인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는 투기같은 거 안하고 살려고 한다고 해도 투기꾼들이 세상을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 피해를 피해가기 어렵다. 

 

이제 지구상에 신개척지는 없다. 식민지화하고 약탈할 곳도, 문명을 전해주겠다면서 이득을 취할 곳도 부족해진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같은 게임을 계속한다면 이제 남은 것은 내부적 약탈 뿐이다. 이것은 비참한 미래 예측이다. 우리는 한 때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말이 약속했던 것처럼 영원한 성장을 할 수 없을 것같다. 

 

중국이나 인도등 인구많은 개발도상국의 경제규모가 올라올수록 선진국들과 그들의 분쟁은 더욱 커질것이다. 한쪽은 소비 수준의 감소를 감내하지 못하겠다고 할 것이고 다른 쪽은 더 이상의 착취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할것이다. 유럽의 세계대전도 결국 비슷하게 촉발되었다. 중국의 경제규모는 2020년이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미국인들처럼 소비하면서 사는 시대는 자원의 한계로 결코 올수 없다. 결국 뭔가가 비싸지고 결국 누군가가 소비 수준을 내려야 한다. 그걸 거부하면 그것이 다른 곳에 대한 착취나 압력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엔 인류에겐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세계대전으로 인류의 대부분을 쓸어버리고 다시 인구가 늘어나고 하는 비극을 반복할 뿐일 것이다. 유일한 길. 그건 우리 사는 방식, 우리 문명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다. 모두가 모두를, 모두가 자연전체를 사랑하게 되는 길이다. 우리는 특히 서구문명을 반성해야 한다. 사랑이란 단어는 쓰기가 주저되는데 이 말은 오염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걸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환경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걸 자아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핵심은 느끼는 것이고 연결하는 것이다. 제대로 연결하고 제대로 느껴서 제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굶어죽을 필요는 없지만 지나치게 먹지 않는 것이다. 빈 손이 될 필요는 없지만 너무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 극한 경쟁을 자제하는 것이다. 상대를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죄수의 딜레마처럼 모두가 손해보는 상황으로 가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침략하면 그쪽도 침략해 오고 결국 모두가 침략의 두려움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게 된다. 

 

어떤 의미로 많은 사람들은 현대문명이라는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있다. 가고 싶은곳에 가지 못하고 걱정없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쫒기며 산다. 그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접착제가 바로 분노, 차별,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시스템을 다른 시스템으로 교체하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시스템을 이겨낼 분노와 두려움을 더더욱 증폭시키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분노나 시스템교체가 필요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세상은 생각만큼 가치가 없다. 독재자를 독재자로 교체하는 꼴이랄까. 어떤 사람은 우린 다르다라고 한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린 다르다고 강조하며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별로 안 달라 보인다. 그들은 제대로 느낀다는 생각이 없다. 그들도 다른 시스템을 들고 나왔을 뿐이다. 그들도 자기 손가락만 아프게 느낄뿐 자기가 남의 발을 밟아도 뭘하고 있는지 모를 그런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르다는게 뭔지 정말 곰곰히 생각이나 해본걸까. 

 

이 길은 분명 윤리적 반성과 문화의 길이지만 과학기술의 길이기도 하다. 미디어와 정보처리의 기술이 발달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느끼는 길, 사랑하는길, 공동체의 길, 자아를 확대하는 길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모두가 모두를 느끼며 산다는 것은 다같이 추는 춤과 비슷하다. 확실히 내가 제대로 손을 내밀고 발을 내민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그걸 쳐내거나 밟아버릴수도 있다. 이 길은 그리 쉽지 않다. 아니 매우 어렵다. 

 

그러나 두가지 사실이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 길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가 이 길을 가도록 강요할 것이다. 쉽게 가는가 아니면 아주 비싼 댓가를 치루고 가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게 어렵고 당장 그렇게 되는게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싸우면서 상처입고 불안하게 사는것을 유지하는게 답일 수는 없다. 우리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비극의 역사를 반복할 수 있을것이다. 세계대전으로 인류가 모두 죽는 일은 거의 없을테니 인구를 싹쓸어버리고 다시 한동안 발전의 신화대로 살고 그러다가 다시 지구가 금방 꽉 차면 또 한번 쓸어버리고 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반복할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반복에서 탈출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다른 길이 없다. 

 

또하나는 우리는 어렵고 쉽고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응당해야할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시스템을 바꾸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나쁜 사람은 몰아내고 나쁜 시스템은 고쳐야 한다. 그러나 밥을 잘지으려면 요리법에 앞서서 쌀이 있어야 한다. 돌맹이를 아무리 잘 요리한다고 밥이 안된다. 뭘하건 우리가 뭘 목표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고 '느낌'이 없다면 그건 돌멩이로 밥을 만들겠다는 소리와 같다. 결국 누군가에게 나중에 사기로 불리게 될것이다.  

 

또한 갑자기 범세계주의, 박애주의가 모든 구별과 선을 없앨 수 있을리도 없다. 우리는 열려있어야 하지만 또한 우리의 원칙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한도내에서만 그래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없어지도록 열리는 것은 개방이 아니라 멸종이다.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공감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어떤 문화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특히 젊은세대는 이 길을 잘 익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게 분노를 주입하고 싸워 이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길은 원하는 걸 이룩할 수 없는 길이다. 젊은 세대의 최고의 무기는 문화운동이다. 젊은 세대는 응당 사랑의 길을 가야 한다. 공동체의 길을 가야 한다. 자아확대의 길을 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서로 돕고 나아가 다른 나이든 세대들까지 하나로 아우를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자체를 바꿔야 한다. 사기고스톱판에서 돈을 딸 수 있는 잔재주나 능숙한 도박꾼의 비장함를 배우는 것은 신참이 가야할 길이 아니다. 사기고스톱 판자체를 그만두자고 해야 신참도 한 몫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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