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6
나는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살아본 적이 있거나 살고 있다. 대학생시절 처음 영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올 때 나는 그게 내 마지막 외국여행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지만 돌아보면 정말 누구못지 않게 세계를 보고 다녔다. 이런 나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 단 한마디만 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한국은 작은 나라고 할 것이다. 한국은 작다. 정말 정말 작으며 내 생각에는 한국 사회의 여러 사회악들과 위기들은 이러한 사실에 기반하여 생겨난다.
일단 땅크기야 말할게 없다. 우리는 한반도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말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조그만 남한이 우리의 생활공간이다. 이것은 북한때문에 진짜 섬나라인 일본보다 고립된 땅이다. 이때문에 우리는 여행자유화가 이뤄진 지금에도 한국에서 외국으로 자연스럽게 나가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비행기는 차나 기차로 가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건 마치 달이나 지구반대편에 가는 것과 같은 단절된 경험을 준다. 우리가 북한을 통과해서 중국을 가고 러시아를 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 단절의 경험이 얼마나 큰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편향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느끼게 될것이다. 우리는 한마디로 습관화된 장님이다. 보는게 너무 작다.
인구도 작다. 물론 중국이나 미국과 비할 바가 아니며 일본보다도 훨씬 작다. 그나마도 출산율이 낮아서 급격하게 노령화 하고 있다. 노인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회의 생동감이란 젊은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같은 인구라도 젊은이가 많은 쪽이 발전 가능성이 클것이다.
여기에 더해야 할 중요한 점은 땅크기나 인구가 작은 것보다 한국이 더더욱 작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보다 한국은 인구비례로 2배반쯤된다. 그러니 한국은 일본보다 2배반 작은것일까? 한국은 미국과 인구비례로 6배쯤 된다. 그러니 한국은 미국보다 6배 작은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한국은 미국은 물론 일본보다도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훨씬 뒤떨어진다. 내가 한국이 작다고 말하는 것은 주로 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그런 것이다. 이 점을 단순히 우리는 가난하고 그들은 부자니까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도 역시 문화의 문제다.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살게 만들려고 하는 힘, 승자에 대해 패자가 재도약의 기회를 가진다던가 나름의 삶을 가질 방도가 한국에는 훨씬 적다.
일본도 이랬던 적이 있다. 바로 막부시대다. 전국에 금을 죽죽 그어 영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해서 너는 어디 소속이냐고 묻고 소위 번을 허락받지 않고 나가면 탈번의 죄라고 해서 극형에 처해지던 시대다. 한마디로 일본이란 개념이 희박하고 각자 자기 기득권차지해서 사람들 꼼짝못하게 해놓고 먹고 살던 시대다.
이 시대가 무너진것은 미국의 개항요구에 대한 충격으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은 신분제를 철폐한다. 신분도 번이라는 구분도 사라지고 천황밑에서 하나되는 일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메이지유신이다. 그런 혁명이 필요했던 이유는 물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미국같은 선진국의 강대한 힘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항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단 개항하면 그리고 번끼리 나눠져서 각자 작은 나라처럼 구는 상황이라면 강대한 선진국의 힘앞에서 더욱 빨리 각개격파당하거나 심지어는 민족간의 상잔처럼 서로 싸워서 모두가 선진국의 종이되고 마는 상황이 되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개항을 하지 말자고 하는 쇄국파도 비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개항을 요구하는 선진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개항을 하자고 하는 개항낙관론자도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개항하면 선진국이 들어와 식민상태가 되버릴 것이므로). 유일한 현실론자는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던 메이지 지사들이었다. 그 현실론자들이 승리한 일본은 세계에서 지금의 위치를 차지할 토대를 메이지 유신으로 쌓았다.
이 이야기는 FTA를 하니 마니가지고 싸우는 21세기 한국 사람들이나 기업형 슈퍼마켓을 우리 동네에 들여와야 하니 마니가지고 싸우는 지역주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쇄국파도 개항파도 모두 무지하다.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적 질문은 일본이란 실존하는가 하는 것이고 21세기 한국의 질문도 지역사회의 질문도 한국이란게 실존하는지 지역사회라는게 실존하는지하는 질문이다.
여는건 시기의 문제일뿐이고 열던 닫던 잘 열고 잘 닫는 것이 문제이지 열자고 하는 사람은 전부 똑같은 사람, 닫자고 하는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개항이냐 아니냐가 핵심이 아니고 '내'가 있는가가 핵심이다. '내'가 있어야 이건 되고 저건 안되고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작은 한국으로 돌아가보자. 한국은 가족윤리를 사회전체로 너무 쉽게 확장해서 공과사가 잘 구분이 안된다.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 한 것을 알아도 차마 그 아들을 고발하고 처벌받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한다. 그게 옳은 일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 그게 가족의 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너도 나도 아주 쉽게 가족처럼 행세한다. 호형호제하는 사람들 뿐이 아니다. 기업의 사장은 자기를 직원들의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부대의 상관도 그러하며 교수는 제자들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부분만 그랬으면 좋겠지만 윤리적 판단자체가 그렇게 돌아간다. 장관이나 대통령중에는 자기가 국민들의 아버지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게 아닌가 싶은 경우도 있다.
안그래도 작은 나라에서 사회에서 권력 좀 가지고 힘쓰는 자리에 있다는 사람들이 두 세 다리만 건너면 다 진짜 친인척이거나 친인척인거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남이가다. 이러니 진정한 법치가 될 리가 있는가. 우리는 언론이나 사법기관이 얼마나 고무줄처럼 관점과 판결을 늘였다 줄이는지 항상 본다. 왜 그러겠는가. 방송앞에서나 안 그런척 할뿐 힘 쎈 사람들이 전부 우리가 남이가로 뭉치고 그걸 거부하면 망치질을 당하는데 법치가 될 리가 있고 원칙이 다 뭔가. 이러니 자연스레 다 평균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튀면 당장 망치가 날아오니까.
이렇게 해서 자연스레 한국은 더욱 더 작아지고 더욱 더 다양성이 없어지고 더욱 더 불투명해지고 더욱 더 독과점과 담합이 넘치는 나라가 된다. 결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질적인 신분제 사회로 고착화 되고 만다. 태어날때 천출로 태어났냐 양반으로 태어났냐로 그 아이의 일생이 결정되고 마는 사회다. 지금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학원도 제대로 못가면서 공부해서 대학가봐야 등록금 빚내서 다니고 결혼해서 전세값까지 빌리고 나면 그동안 빌린 빚을 평생 일해서 갚아야 할 판이니 나자마자 빚더미에 앉아서 노예로 태어난 것과 그리 차이가 없다. 전세계에서 한국식으로 나이를 따져서 23살인 사람을 집단으로 묶고 22살인 사람을 집단으로 묶어지게 만드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뭐든지 집단으로 묶고 표준화하고 그래서 다양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더 나쁜 것은 한국이 문을 열었고 더 많이 열리고 있는데도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제대로 태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한국에는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국적따위 뭐가 중요해 우리가 모두 미국사람되고 일본사람 되면 되지라고 내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가 생각하는게 실질적으로 그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민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도 요즘엔 많다고 들었다. 몇나라 살아본 나도 말하는데 다른 나라라고 천국이 아니며 특히 한국사람에게는 그렇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한국식으로 사는게 제일 행복하다. 한국안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렇다.
실은 많은 것이 내가 말해온 것의 반복이긴 하지만 다시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어디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을 대표하는 삼성, 그리고 미국기업 애플에 대해 말해보자. 세계화시대라지만 한국이 있고서야 삼성이 있다. 미국이 있고서야 애플이 있다. 이 점을 잊어버리거나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같다.
하나의 핸드폰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것에는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 조합이 힘을 발휘할 때 그 핸드폰은 비로소 인기있고 쓸모있는 제품이 되는 것이다. 이 조합을 강조하기 위해서 요즘은 생태계라는 말을 쓴다. 애플의 아이폰은 미국인들의 문화를 꽤뚫어본 스티브잡스 이상으로 미국문화의 산물이다. 그것에는 스티브잡스가 병가를 내니까 애플의 주가가 출렁이는것을 보면 알듯이 능력에 대한 신뢰도 있지만 인간자체, 기업자체에 대한 신뢰가 큰 몫을 한다. 기술만 있으면 아이튠즈같은게 만들어지는게 아니지 않는가. 거기에는 윤리적, 가치적 신뢰가 있어야 하며 지금 그런 부분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이 스티브잡스다. 한마디로 스티브잡스가 있으니 애플은 이런저런 최악의 짓은 하지 않을꺼야라는 믿음이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뢰는 그냥 허공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그건 미국 사회에서 오랜동안 쌓아올린 사회적 문화적 이미지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아이튠즈를 쓰면 어떤 면에서 속박을 당하고 애플이라는 회사로부터 이득도 얻지만 내 자유를 빼앗기는 측면도 있다. 그런데 왜 기꺼이 그렇게 하는가. 상호신뢰를 통해 상호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때문이다. 삼성이 한국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으면 삼성은 망한다. 그런데 외국의 시장만 보고 있는 삼성은 그 위험성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
이건희와 스티브잡스중 누가 더 공평하고 도덕적 사람이라고 믿는가. 하버드대학의 교수와 서울대학의 교수중 누가 더 공평하고 도덕적 사람이라고 믿는가. 한국의 대통령과 미국의 대통령중 누가 더 공평하고 도덕적 사람이라고 믿는가. 이건 우스운 질문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물었을 때도 압도적으로 대답이 스티브잡스라고, 하버드대학이라고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대답이 나온다면 한국 사회의 정체성이 위태롭다는 증거다.
내가 이건희와 서울대학교수와 한국대통령 찬양이나 옹호를 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차라리 이런 그림을 그려보라. 막부시대에 번주의 무지함과 부도덕함에 지긋지긋해진 나머지 각번의 사람들이 이런 번주를 따르느니 차라미 미국을 따르고 미국의 힘으로 번주를 망하게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옳을까?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 대한 답도 알고 있다. 조선말엽에 조선사회를 개혁한다고 러시아니 중국이니 일본이니 다른 나라 추종자가 되었던 사람들이 날뛰니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던가. 이완용이다. 나라가 망하고 식민지가 되어 사니 좋더라고 역사에 남았던가?
내가 보기엔 대학강의라는게 무서운 속력으로 무의미해지고 있다. 동영상강의를 보고서도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가 있다. 졸업장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서울대에 가서 공부할 것인가. 그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위기는 코앞에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영상강의로 보고 듣는 것의 의미를 느껴야 한다. 서울대를 졸업해도 취업에 확신이 안서더라라는 이야기의 무서움, 서울대 졸업생을 채용해보니 그냥 미국주립대 나온 사람이 훨씬 쓸만하더라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것의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
이미 좀 잘사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아이들 보내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한국에서 버글대는 것에 비하면 놀면서 공부하고 경쟁에 그다지 시달리지 않으면서 커도 훨씬 대접받는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대원고니 민사고니 하는 학교들이 미국 명문대 입학을 자랑하는 나라는 내가 보기엔 정상이 아니다. 나라가 깨지고 있다.
한국사회의 요구를 반영하는 대학, 한국적인 시각과 가치판단을 전제로 행해지는 인문학이 없어지면 나라는 점점 위기로 간다. 기술적 발전에 따라 한국의 지식계층은 통째로 서구의 그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미 조중동을 사람들이 많이 안본다. 미국 잡지나 신문, 일본 잡지나 신문을 더욱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의 교수나 언론인, 작가등 지식인들이 한국적 필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순식간에 쓸모없는 직업들이 될 수 있다. 이메일과 핸드폰이 일반화된 나라에서 손으로 쓴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의 상황이랄까. 영화가 무성영화일 때 소리를 내는 변사같은 직업도 있었다.
세계는 무서운 속력으로 더욱 연결되고 시스템은 커지고 있다. 작은 한국을 칸막이 열심히 쳐서 더욱 작게 만들고 그 시대를 맞이하면 미래가 없다. 우리는 더 구분하지 않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통일해야 한다. 외국에 대해 폐쇄적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이던 일본이던 미국이던 더 대화하고 교류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을 반미정권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요즘 정권을 잡고 있다. 친미를 외치고 미국처럼 되자고 하면 미국하고 친해지던가? 오히려 미국인들에게 한국이 대접받고 존중받았던 시대는 김대중, 노무현 시대다. 남으로 부터 폐쇄되기위해 나를 찾는게 아니다. 내가 있어야 남과도 잘지낼 수가 있다. 사회적 정체성이 확실하면 나라의 경계선을 확열어도 안전하다. 포용력이 생긴다. 한국. 너무 작다. 이젠 좀 커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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