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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인디고서원, 어린 왕자 그리고 나를 지키는 일

by 격암(강국진) 2011. 3. 4.

2011.3.4

 

인디고 서원에 대해 소개를 받고 검색을 하다가 인디고 서원에 대한 글들을 몇개 읽었습니다. 인디고서원이란 부산남천동에 있는 서점으로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교육을 하는 곳이라고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조국교수가 몇 년 전에 강력한 추천의 글을 한겨례에 쓰기도 했고 시사인이나 오마이뉴스등 여러매체에서 선전되기도 한 곳이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이 토론하고 책도 쓰고 기부도 하고 잡지도 만드는 곳입니다. (홈페이지 : http://www.indigoground.net)

 

사실 저는 인디고서원을 잘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고 검색된 기사들몇개를 대충 훓어보고 한 블로거가 쓴 방문기를 하나 읽었을 뿐입니다. (http://blog.naver.com/gotozoo3/109130620). 이 블로거는 인디고서원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거대한 성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것을 말했고 그는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으며 이 들이 열려있지 못하다는 것을 불편해 했습니다. 

 

저는 인디고 서원을 잘 모르고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인디고서원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블로거가 쓴 불평의 말이 어느정도나 중요한 부분인지, 현실과 부합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블로거의 글을 읽으며 문화운동과 공동체 만들기 그리고 나를 지키는 일에서 공통된 어떤 어려움을 새삼 느끼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둘까 합니다. 

 

이야기를 바꿔서 소설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오래전에 읽었습니다만 거기엔 여우와 사귀는 어린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우와 어린왕자는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만 바로 얼싸안고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야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먼 곳에서 그저 앉아만 있다가 점점 더 거리를 가까이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둘은 어린왕자가 여우를 만질 수 있을만큼 가까이 앉게 됩니다. 

 

저자가 이 부분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고 하는 메세지는 제가 말하려는 것과 꼭같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만 저는 이 에피소드에서 위에서 말한 나를 지키는 것의 문제, 공동체 문제, 그리고 문화운동의 문제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문화운동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해봅시다. 아니 보다 소박하게 우리가 세상과 똑같지 않게 나 나름의 감각과 시선으로 나로서 살아가려고 한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보통 낭만적으로 말해지는 열려있는 사람이 되자는 말의 어려움을 당장 알게 됩니다. 

 

우리가 왜 '나'를 인식하게 되는가 하면 그것은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거나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문화운동을 일으킨다고 하면 그것은 다수의 세상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뭔가 정상이 아니다, 그것에 공감할 수 없다, 그것을 무작정 따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나를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자체가 경계라는 벽을 발견하거나 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남과 틀리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가 아니라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적어도 일정부분 남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듣는다고 해도 너무 많이 들어서 내가 없어지지 않게 하고 듣고 내 나름대로 소화할 수 있을정도로만 듣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공동체를 만들면 우리는 그 공동체 안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벽을 허물고 소통하고 더 많은 것에 대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 서로를 한 몸처럼 느끼게 되도록 서로 걱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공동체 내부에 대한 것이며 그 공동체와 공동체 바깥사이의 경계에 이르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공동체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폐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공동체는 외부와 소통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소통은 결국 그 공동체의 정체성자체가 없어져서 공동체가 붕괴하지 않는 수준에서 행하는 것이며 또한 외부의 영향력을 그 공동체가 주체적으로 소화할수 있는 한도내에서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붕괴하면 소통할 주체도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인문학책을 공부하고 읽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공동체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공동체에 외부인들이 엄청나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슬슬 만화는 안되는가, 야한 성인비디오는 왜 문제가 되는가라는 말을 합니다. 만약 기존의 사람보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은 경우 다수결에 따라서 이 공동체의 본래 목적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독재를 해야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민주적 공동체는 붕괴합니다. 본래목적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 수가 더 많지 않아도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생명체가 생존하기는 어렵지만 독약 몇방울에 죽기 쉬운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들어와도 그 사람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경우 공동체는 붕괴합니다. 단 한 사람의 회원때문에 어떤 집단이 와해되는 일은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미묘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텃세를 느끼고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며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지는 텃세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지한 사람들이 비극적 희생자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소위 기득권의 악이란 것도 그 근원의 상당부분은 이 문제와 연루되어 있습니다. 기득권세력을 이루는 사람들은 신참자들을 잠재적으로 올바른 질서를 어지럽힐수 있는 독으로 여기며 방어벽을 쌓습니다. 그런데 신참자나 그 세력의 바깥쪽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것은 차별이 됩니다. 조직이 거대해지고 불투명성이 가미될경우 이런 방어는 실제로 지나친 것이 되어 바깥쪽에 있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 되곤합니다. 그런데 조직 내부의 눈으로보면 이런 일들이 당연한 것,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식적인 일처럼 보이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한 신사가 깡패만 있는 마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신사는 항상 자신의 주관을 지키고 평상시의 행동패턴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무식한 깡패들만 사는 이 마을주민들은 그게 꼴보기 싫습니다. 그 신사가 술을 절제하면서 먹는다던가 자기들이 먹는 더러운 것은 안 먹고 여자들에게 추파던지는 사람을 보면 상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면 금방 되게 잘난체 하네, 그렇게 잘났으면 여기서 왜사냐하는 말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 신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과 잘지내기 위해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고 남이 권하는 일을 굳이 마다하지 않고 적당히 어울려야 할까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척하며 친해져야 할까요. 그럼 이웃사람들이 바뀔까요? 아마 겨우 겨우 욕이나 면하는 정도일것입니다. 적어도 자기를 더욱 수련한다는 차원에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겠지요. 

 

이런 난관에 대해 장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심재입니다. 장자에 이르기를 공자의 제자인 안회가 위나라로 가서 위왕을 섬기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위왕이 제대로 정치를 못하니 내가 한수 가르쳐주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이루는 것은 적고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면서 도대체 위왕을 어떻게 섬기겠냐고 묻습니다. 

 

먼저 안회가 위왕을 인의와 도덕으로 섬기겠다고 하자. 공자가 안된다고 합니다. 시시비비따져서 가르치면 듣겠냐는 거지요. 왕의 분노나 사서 위험해지기나 할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위의 예에서 신사가 무식한 사람들에게 잘난 체하는 소리하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엔 단정하고 겸허한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합니다. 겸손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면 위왕이 보고 스스로 알아서 변하지 않겠는가 하는 건데. 공자는 이것도 퇴짜를 놓습니다. 겉으로는 어쩔지 몰라도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분명 대개 그렇습니다. 신사가 깡패들에게 잔소리 안한다고 해도 깡패들이 신사의 행동을 보고 스스로 알아서 변하지는 않습니다. 위선자라고 하거나 아니면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안회는 고개 숙여 예절을 지키고 충고를 해야 할때는 자기말로 하는것이 아니라 성현의 이야기를 들어서 하겠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친근하게 굴고 높일땐 높여주다가 내가 잘났다는게 아니라 위대한 성현의 말씀이 이러니 저러니 하겠다고 하는 것인데 공자는 이에 대해서도 답이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 화나 면할 정도이지 너무 복잡해서 이것도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가 말하는 것이 바로 심재인데요. 공자는 만사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나아가 기로 들으라고 합니다. 말해서 들어주면 듣는 것이고 아니면 하나를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이 심재라는 것인데. 심재의 의미는 당연히 추상적입니다. 저는 심재를 '내가 없어진 상태' 혹은 '나의 정체성이 온 세상으로 확대된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것도 물론 추상적인데 일상어로 표현해 보자면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궁리해서 행동하는게 아니라 평상심을 가지고 성공과 실패, 득과 실을 따지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매순간 그저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사는게 심재라는 것입니다. 


대단하죠? 저는 그러나 이 글을 그러므로 우리 심재합시다. 그렇게 하면 나를 잘 지킬 수 있으며 공동체의 문제, 화합의 문제도 다 풀립니다라고 마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심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만 그렇게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다 하지 못한 것을 남보고 당연한 듯이 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심재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람직하며 어떻게 보면 모든 인간이 심재하는 시대가 오기전까지는 사회적 불화와 비극은 계속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죠. 저도 못했을뿐만 아니라 저는 그걸 한 사람을 실제 눈으로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모두가 못했는데 심재하고 나면 된다고 하는게 답이 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항상 적당한 거리라는게 있다고 말입니다. 심재를 이룩한 사람은 거리개념을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아직 '내'가 많이 남아있는 보통사람들은 서로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어린왕자와 여우처럼말입니다. 
너무 멀어서도 안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되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 집단과 개인간의 거리가 어느정도가 적당한가 하는 것은 각각 개인의 능력,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지킬 수는 있을 정도의 거리 그리고 남을 상처입히지 않고 소통할 수는 있을정도의 거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린 거리에 대한 예의, 거리에 대한 조심성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너무 바짝들이대면 그것자체가 민폐입니다. 왜냐면 원하지 않아도 내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그 집단의 화합이나 정체성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둔감하게도 자기한테는 별 피해가 안된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로마에 가서 로마법을 따르는게 아니라 내 법을 당연하다는 듯이 강요하는 것입니다. 


누가 너무 좋아도 여우의 지혜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그것은 내가 허약해서 일 수도 있고 상대방이 그래서 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심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제 아무리 달려들어도 괜찮을것입니다. 아니 달려들 수가 없을것입니다. '내'가 없는 사람은 바람같이 잡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왠지 불편해지고 원망이 생기고 섭섭해 집니다. 그래서 애초에 더 거리가 있었던 것만큼의 우정과 사랑도 지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모하게 거리를 0로 하겠다면서 달려드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들은 대개 무시당해서 상처받거나 남에게 이용당하는 일을 겪습니다.

 
거리에 대한 예의, 거리에 대한 조심성은 사회적으로도 기억해 둬야 할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다양성이 파괴됩니다. 서로에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살만한 사회가 것입니다이것은 많은 차원에서 많은 경우에서 기억해 둬야할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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