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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공포가 지배하는 삶

by 격암(강국진) 2011. 3. 31.

2011.3.31

 

언젠가 컴퓨터와 체스를 둔 세계 체스챔피언이 인터뷰를 했다. 그에따르면 컴퓨터 체스기사의 강점은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체스를 두면 앞의 몇수를 내다보고 체스를 두기마련인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수순이 옳아보여도 매우 위험해보이는, 다시말해 한번 실수하면 치명타를 입을 수 있는 수순은 피하기 마련인데 컴퓨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포에 약하고 많은 것을 두려워한다. 공포때문에 합리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있다. 나도 그렇다. 크게 보면 내 개인의 장래에 대한 생각에서 작게 보면 약속시간을 지키기위해 넉넉하게 집을 나서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일들에대해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하는 문제는 다르게 표현하면 미래를 어떻게 대비하여 어떤 수순을 따라야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미래를 대비하는 일을 무한정 해도 좋은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모든 위험을 제거하고 안전한 길로만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근면 두글자면 충분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그냥 부지런히 정해진 일을 하면서 살면 되고 미래를 그다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항상 시간과 에너지의 분배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예를 들어 핵전쟁에 대비해서 집안에 엄청난 피난시설을 갖추어 놓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만약 그가 엄청난 부자라면 모를 일이되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일어나기 힘든 일을 대비하기위해 소유한 자원을 너무 많이 지출하고 있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핵전쟁에 대한 공포는 그의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고 만다.  

 

비슷한 예는 우리 주변에 많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비해서 많은 일을 한다. 노후에 10억이 없으면 안된다면서 10억모으기에 신경쓰는 사람도 그렇고 인생에서 어느 대학에 들어가는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에 대학입시에 아이와 가족의 생활을 온통 일그러뜨리는 사람도 그렇다. 건강걱정으로 나날을 보내는 사람도 그렇고 배우자의 불륜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지역감정에 의존하는 정치인들, 좌니 우니 하는 구분에 의존하는 정치인들은 얼마나 상대편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쉽게 말하고 우리가 단합해서 저들을 무찌르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에게 가할 위협이 엄청나다고 자주 말하는가. 정치인들만 그러는게 아니다. 한국사람들은 패거리를 쉽게도 만든다. 패거리가 만들어지면 패거리 안쪽사람들은 바깥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바깥사람들은 패거리에서 바깥에 있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한국사람만 그러는것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만들고 그 차별이 만들어 내는 분노는 결국 진짜 테러리스트를 만들어 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학살했던 유럽인들은 잔인하고 흉폭한 야만인의 전설을 만들어 내고 그걸 또 얼마나 쉽게 믿었던가.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는 공포는 일상적으로 많은 불합리한 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공포의 문제를 생각하면 두가지 측면이 마음에 떠오른다. 첫째는 현대 사회환경의 문제고 둘째는 내적 중심의 문제다.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그를 통해서 타인이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협박을 듣는다. 그러니 자기를 지키지 못하면 일은 엉망이 되기 쉽다. 생선이 맛있는지 어떤지를 생선가게 주인에게 물어볼 때는 조심해야 한다. 생선가게 주인은 생선을 팔고 싶어할 것이므로 세상에서 생선을 먹는 일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환경안에 완전히 잠겨있을때는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어떤 왜곡에 빠지는지는 놓치고 마는 일이 흔하다.

 

암보험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 사회는 온통 암에 대한 공포로 가득찬다. 사람들이 암을 두려워 할수록 더 많이 보험에 가입할 것이다. 그러니 관련 산업은 암의 두려움을 홍보하는데 온 힘을 다한다. 우리 사회에는 주로 아파트를 만들어 파는 건설회사도 엄청나게 많다. 그러니 부동산을 사야한다는 목소리, 지금 사지 않으면 영원히 불가능 할거라는 공포의 목소리가 우리사회에 가득하게 된다. 한국사회의 지식인은 그 주류가 유학파다. 그때문에 미국이 이렇다. 유럽이 저렇다라는 목소리가 많고 우리도 빨리 미국이나 유럽처럼 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흔하다. 바로 자기가 잘 아는 나라로 말이다. 이때문에 우리것을 존중하고 자신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적어진 것이 아닐까.

 

학원이 하는 일의 상당부분은 공포를 조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얼마전에는 이런이야기를 들었다. 한 학부형이 초등학생 아이를 학원에 데려갔더니 학원에서 어머님 아이를 너무 늦게 데려오셨군요하더라는 것이다.  학원의 천국이란 어떤 것일까. 부모들이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학원에 보내는 사회, 거액의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불하는 사회다. 우리나라는 사교육이 큰 사업으로 번창해 있는 나라다. 그 많은 사교육의 종사자들이 힘을 모아 거대한 공포를 만들어 낸다. 국민들을 세뇌한다. 어머님 요즘엔 아이를 이렇게 키워서는 안됩니다. 요즘엔 이정도 지불하지 않으면 아이가 너무 뒤쳐져서 학교를 따라가지 못하고 입시에 실패하며 물론 인생에 실패합니다.  

 

감수성없는 요리사가 균형잡힌 맛을 가진 요리를 만들지 못하듯이 감수성없는 부모가 아이를 어떤 메뉴얼에 따라, 공포를 가지고 키울 때 교육은 단지 하나마나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백해무익한 일 즉 소금을 너무 많이 친 요리처럼 된다. 누군가가 사교육의 위험성을 지적할 때 사교육은 무조건 반대라던가 사교육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극단적 태도들중의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 적당한 수준의 사교육, 내 아이에게 필요한 사교육이 있을 것이고 계속 사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은 하다가 또 얼마간은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금을 많이 치면 짜지 않나요라고 누가 말한다고 소금을 전혀 치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상론을 펼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다고 그런 말을 부정하며 소금을 한바가지 넣어서 요리를 망쳐서도 안될것이다. 된장찌개를 만드는가 아이스크림을 만드는가에 따라 들어가야할 소금의 양도 다를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어 소금을 넣어야해 말아야해라고 물으면서 양도 신경안쓰고 무슨 요리인지도 말하지 않으며 질문하는일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수단에 매몰된다. 대학에 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교육의 목적이 대학입시겠는가. 나도 현실적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고 대학입시에서 성공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교육의 목적은 다면적이다. 소화를 잘할수 있도록 아이에게 이유식만을 계속 먹인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씹는 힘이 약해질것이고 심지어 소화기관도 약해질것이다. 삶에 기쁨을 주는 여러가지 요리도 맛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이가 시험을 잘 볼 수있도록 일찌감치 도와준다는 것은 어떻게보면 이유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더 잘설명된 참고서, 더 잘설명해주는 선생님, 자기 일정을 관리해주는 엄마에게 익숙해지면 아이는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본래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나가서도 사교육을 이용하고 엄마에게 매달리는 인간으로 키울것인가. 아니 그전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때부터 과보호로 키워서 나중에 고등학교쯤되면 정말 공부잘하게 될까. 초등학교때 빵점 한번 받아서 뭔가를 배워야할 아이를 이젠 빵점받을 수 없는 대학입시때까지 보호해서 정말 뭔가를 배울 수 없게 하는것이 열혈 엄마와 학원강사들이 아닐까. 아이는 정말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나고 있는것인가.  

 

교육이 뭔지 삶이 뭔지에 대해 난 그런 어려운건 몰라, 그런 골치아픈건 생각하기 싫어라고하면서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란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들은 얼마나 무식한 손으로 자식의 삶을 난도질 하고 있는것일까. 행복이 뭔지, 삶이 뭔지에 대해 고민도 안하면서 자꾸 자식에 대해 간섭하는 부모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묵묵히 근면하는 모습을 보일뿐 공부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자식에게 간섭하지 않는 부모보다 지혜롭지 못한것이다. 심하게 말해 자식의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다.  

 

우리는 내적 중심이 필요하다.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즉 수단을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넘어서 가치있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고 생각이전에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봄의 들판을 이따금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가 없을 때 단지 봄의 들판뿐만 아니라 삶이 통째로 낭비되고 있을 수가 있다. 나는 왜 가족들과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이런 직장에서 이러고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런 질문들이 까마득하게 잊혀지고 결국 진짜로 좋은 일,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일이나 진짜 따뜻한 미소가 생기게 하는 일은 뭐하나 없는 채 평생이 가버리고 말 수도 있다. 도대체 뭘 위한 인생이었던걸까. 그저 짐승처럼 공포에 쫒기는 삶이었지 않았던가.  

 

살다보면 우리는 뭔가에 걸려넘어지는 일을 겪는다. 우리의 공포는 때로 현실이 된다. 그걸 완전히 막을도리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단지 지금 이순간 나는 뭘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걸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날이 된다고 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해야한다. 수단에 매몰된 사람은 그럴수가 없다. 돈을 모으면 행복해질수있다고 돈을모았는데 그걸 쓰기도전에 죽는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출세를 하고 좋은 경력을 쌓으면 행복해진다고 그걸위해 모든걸 참고살았는데 그렇게 되자마자 죽는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누군가가 우리에게 공포를 밀어넣을 때 우리는 공포에 지배되어서는 안된다. 무계획하게 즉흥적으로 살아서는 안되지만 계획에 매몰되어 생각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기계가 되어서도 안된다. 파격을 때로 가져서 생생함을 유지해야 한다.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해야 한다. 조용히 마음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이 뭔가를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게 아니라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어지러운 현대사회에서 자신을 지키고 세파에 떠내려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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