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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충돌 : 전체주의와 자유주의

by 격암(강국진) 2011. 9. 10.

바이브의 술이야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학생운동을 하는 여자와 그를 잡아서 고문하고 괴롭히는 형사의 추격을 주요 이야기 중의하나로 하고 있다. 그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새삼 생각에 잠긴다.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거나 다 시대의 희생양이다 운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걸 넘어서 그들은 왜 그렇게 살까. 그들왜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면서 살수 밖에 없는가. 


내 생각에 그것은 두개의 이야기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개의 이야기는 엄격하게 말하면 다 확실한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형사가 대표하는 시스템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은 정교한 질서와 구조를 가지고 만들어져 있다. 형사의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대학생의 언행은 매우 불순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전체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보는 형사의 시각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이란 마치 고속으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엔진에 모래를 뿌려대면서 그 결과는 내알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 대학생을 말리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형사의 시각에서 시스템이 없이 사회가 존재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유교적 질서에 대해 불만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예의범절을 모두 붕괴시켜서 무정부적 상태를 만들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즉 나쁜 질서, 부족한 질서라도 언제나 완전한 무질서보다는 옳은 것이다. 따라서 자기욕망에만 충실하면 자기를 억제하지 않고 사는 대학생은 악 그자체다. 


대학생의 눈에 전체주의적 시스템은 욕망과 권력의 착취기관이다. 즉 전체 시스템은 그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는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시스템은 그저 소수의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짓과 폭력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다수의 인간들의 감정을 파괴하고 기계가 되도록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대학생은 모든 시스템에 반대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나, 실은 그 대학생도 어떤 시스템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주의의 편, 시스템의 편에선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의 시각과도 생각보다 그리 많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도 그의 반대편에 선사람도 세상은 술이 담긴 술잔처럼 이뤄져 있다고 믿는것 같다. 술이 담긴 술잔에서 술잔에 해당하는 부분이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규칙이고 관습이며 의무다. 이게 깨지면 술이 새버린다. 


순도 100%의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술의 부분이 없는 그저 유리덩어리고 세상은 왕에 의해 독재를 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대개는 누구나 술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 자유가 없으면 모두가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술에 해당하는 부분은 진화론적 자유주의에 의해 저절로 답을 찾아내 주는 자유의 부분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일에 대해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리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자유시장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규칙을 세워놓고 모든 사회적 비극은 그저 법칙의 결과이며 안타깝지만 누구나 늙어죽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경쟁의 결과 생기는 비극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서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거부한다. 자기는 너무 먹어서 비만으로 죽을 지경인데 굶어 죽는 사람이 바로옆에 있어도 그것은 물론 내가 어떤 윤리적 책임을 질일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이 하고 있는 것이다. 


100% 독재는 100% 책임을 져야한다. 그래서 황제는 하늘에서 비가 안와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술의 부분이 생기면 술잔의 책임이 줄어든다. 그건 이제 자연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스템의 책임이 아니다. 자유는 양날의 칼이다. 자유는 때로 더욱 잔혹한 짓을 합리화하기 위해 말해지기도 한다. 부시가 이라크와 아프칸을 침공할때도 그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퍼트리자라는 말을  가장 먼저 말했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을 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은 전혀 다른가. 그렇지 않다. 그 대학생이 생각하는 술잔이 훨씬 더 큰 것이거나 앞에서 말한 술잔과 다른 방향으로 겹쳐질뿐 같지 않거나 본인도 그런 술잔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반항하거나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진짜로 무책임할 뿐이다. 술잔이 없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열한 고민도 없이 함부로 말할 것은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라고 말한다고 모두 선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도 자유시장주의처럼 자유주의를 믿는다. 그의 생각에 사상적 자유를 막고 사회적 규칙의 진화를 막는 것은 범죄다. 왜냐면 자유가 극대화될때 가장 공평한 세상이 -다시 예의 그 보이지 않는 손 혹은 진화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지며 가장 훌룡한 시스템이 저절로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것은 끝임없이 수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술잔이 아니라 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대학생은 때로 술잔같은게 있을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완전한 상대주의는 윤리적 허무주의다. 대학생의 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는 아니지만 종종 다시 자유시장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는데에 활용된다. 이 세상에는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범죄자들의 입에서 자유주의자들, 진보주의자들, 새로운 심리학과 철학의 문구가 흘러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그건 내탓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자유주의가 다시 쓰이는 것이다. 


술잔은 대학생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윤리 감각이다. 문제는 그 대학생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며 대학생은 사소해 보이지만 작은 윤리적 감각의 차이라는 술잔의 차이가 현실사회에서 얼마나 큰 차이를 줄수 있는가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대학생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윤리적 덕목이 사회적 합의로 인증받은게 아니라는 점이다. 


헌법에 나오는 말이 실질적으로는 별의미가 없는 것일수 있으나 형식적인 의미에서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은 이때문이다. 형식적으로라도 헌법에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합의한 가치의 기본이 실려있다. 때로 사람들은 그게 좋은 말이니까 지키자는 의미로 거기에 씌여있다고 생각하지만 무한히 넓어지는 술잔의 크기 속에서 당연히 좋은 말이란 이세상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하나의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하나의 유기체로 죽어버린다. 


그런데 헌법이나 민족문화는 많은 사람의 동의를 형식적으로 얻어내거나 무척긴기간동안 자리잡아서 그 사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응당 해야할 일로 공감대를 가진 일이다. 누군가가 나는 사람이 모두 옷을 입고 사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하며 누드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윤리적 감각을 가졌다고 하자. 그가 누드로 살아갈 자유를 외치는 것은 무조건 용인될수 있을까? 


그런 미친사람의 예를 들지말자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게 아니라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긍정할 만한 윤리적 감각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문제다. 몇사람의 세계에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지만 국가차원에 이르면 사소한 윤리적 차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다. 지금 4대강 공사에 대한 찬반으로 나라가 갈라져 있다. 이것은 당연히 추진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치판단이 투영되어 발생한 결과다. 추진하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한다. 그 당연한 것때문에 죽어간 생명체며 역사적 사회적 기억들은 얼마나 많은가. 공사만 봐도 이렇게 규모가 큰데 과연 당연하다는 말 몇마디로 술잔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까.


당신의 윤리감각으로는 중국 조선족은 당연히 모두 자유롭게 한국에 들어와 취업할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수많은 한국노동자들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일일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거대한 사회적 댓가를 치뤄야 하는 일일것이다. 나는 어느쪽이 옳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당연한게 아니고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아이가 돈 몇푼이 없어서 죽어가도 돈가진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내 아이가 죽는다면 전재산을 쓰고서도 더 돈이 없는 나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수 있다. 당연한게 당연하게 아니다. 우리는 결국 어딘가에 선을 긋고 사회적 정체성을 만들수 밖에 없다. 


항상 그렇지만 글이 길어지므로 결론을 몇가지 독단적으로 내리고 글을 정리하자.


첫째, 그래서 술잔의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의 섬세한 고민이 필요하고 신용의 문제를 고민하는게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가르켜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으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 죽 선을 그어 반대족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으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수 있고 이해가 될만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이다.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볼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때 형사가 대학생을 악으로 볼수밖에 없는 것처럼, 대학생이 형사를 악으로 볼수밖에 없는 것처럼 되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자면 투쟁이 아니라 사랑과 온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때 그들은 그들의 세상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물론 사랑만으로 안된다. 이야기를 퍼뜨리는것은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이야기가 있어야 퍼뜨릴것이 아닌가. 술잔의 고민이란 결국 사회적 정체성, 윤리적 가치적 정체성의 고민이다. 이것은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며 누구 혼자서 해낼수 있을 만한 능력의 일이 아니다. 무딘 감성으로 욱하는 기분으로 정의를 찾는게 아니라 섬세하게 많은 것을 생각하는 집단이 필요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하다. 학문과 인격자들, 사회윤리의 기둥이라고 불릴 집단이 그 집단의 윤리적 기둥을 지키고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 모두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체성이 상실된 사회는 죽어가는 유기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회속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정체성, 술잔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갖춰야 하지만 결국 개개인으로서 자신의 술잔,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 술잔도 자기 그릇도 키워야 한다. 천천히 너무 빠르면 우리는 죽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회적 정체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다. 결국 법이나 관습이 뭐가 되건 좋은 사람들이 모여야 좋은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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