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나꼼수 비판이 화제군요. 그에 대해 써볼까 하다가 전에 쓴 이글이 전부라고 생각되어 서문만 답니다. 한마디로 한나라당도 진보진영도 그들의 리듬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싫다는 거지요. 권위주의와 형식주의가 나꼼수를 비판할거라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나꼼수가 인기다. 나는 최근까지 나꼼수를 몇가지 이유로 듣지 않았다. 한가지 이유는 그런거 안들어도 충분히 피가 끓는 뉴스가 많으므로 나자신의 정신적 건강에 해로울까봐서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몇개를 들었다. 나꼼수에서 나온 한국의 현실이야 지금도 각종 글에서 트윗에서 돌아다니므로 나는 나꼼수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몇마디쓰고 싶다.
나꼼수가 인기있는 두가지 이유
나꼼수는 두가지 때문에 인기다. 하나는 침묵하고 특종을 터뜨리지 않는 다른 매체들때문이다. 나꼼수에서 매주 터뜨리고 있는 뉴스가 만약 노무현에 대한 것이었고 지금이 노무현 정권때라면 나꼼수같은 소규모 방송으로 특종을 터뜨리고 새로운 사실들로 독자를 놀래킬수가 없다. 다른 언론들이 훨씬 자세하게 이미 터뜨렸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때는 노무현이 손녀에게 자기돈 천만원을 줬는데 그 증여세를 안냈다는 것이 특종이었다. 지금 세금이 수십억 들어갔다는 내곡동 사저 논란하고는 비교도 안된다. 마치 모두가 한발 뒤로 물러서면 제자리에 있어도 앞으로 나간모양이 되는 것처럼 각종 방송들이 어느새 침묵하는데 익숙해지고 마니 나꼼수는 각종 특종의 창구가 되어버렸다.
두번째 이유, 바로 내가 좀더 길게 쓰고 싶은 이유는 그 형식때문이다. 바로 김어준이 아 씨바라고 추임새를 넣는 그 형식말이다. 중요한 것은 김어준도 아니고 욕설인지 추임새인지도 아니다. 바로 탈권위주의다. 탈권위주의가 금기를 깨고 자유를 준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속이 시원해 진다.
모든 종류의 예의범절이 아니라면 적어도 대부분의 예의범절과 형식은 차별을 위해 존재한다. 나는 모든 차별이 나쁘고 근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차별을 위해 예의범절과 형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반드시 곧바로 나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물론 많은 차별은 악용된다.
아이와 어른간에 왜 예절이 필요한가. 아이와 어른을 차별하기 위해서다. 아이앞에서는 말도 조심하고, 야한 영화는 틀면 안되고, 어른은 어른인척하는게 예의다. 왜인가. 아이에게 더많은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 이런 차별은 왜 존재하는가. 아이는 너무 많은 정보를 얻으면 자기 파멸적오판을 할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간의 형식과 예의는 알아차리기 쉽지만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예절과 형식도 있다. 우리는 종종 이종격투기를 보면서 거기에 어떤 형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에 진짜로 형식이 없는 게임이란 없다. 아무 형식도 없다면 총들고 몰래 쏴죽이는것도 허용되어야한다. 도구를 쓰면 안된다고? 링이 있고 바닥이 모래바닥이나 콘크리트가 아니라는 것 자체가 도구다. 호랑이하고 참치하고 물속에서 싸우라고 하면서 규칙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흔한 두가지 형식론
대화에는 형식이 따른다. 예의범절이 따른다. 그 예의범절과 형식은 알게 모르게 어떤 사람들에게 매우 유리한 게임을 만들어 준다. 우리나라에는 흔히 존재하는 두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지위적 권위주의 형식이고 또하나는 지적 형식주의다.
한나라당이 좋아하는것이 지위적 권위주의인데 이 형식에 따르면 사람들은 온갖 복잡한 예의범절에 빠져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매우 대화가 비효율적이 된다. 왜 백분토론같은게 대부분 보는 사람 복장터지게 만드는 답답한 게임이 되는가. 이 예의범절 때문이다. 이게 뭔가를 알고 싶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토론을 하거나 늙은 교수와 대학생이 토론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대부분 답 안나온다. 모두 서로를 유(you)로 말하는 영어로 이야기하면 간단할 이야기가 빙빙 돈다. 이때문에 말콤 그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서는 한국의 대한항공이 기장간의 대화를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꿨을때 사고위험율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지적한다.
이 형식의 문제를 알고 있는 전여옥같은 사람은 소위 토론의 달인같은 취급을 받지만 사실은 이들은 예의범절 따지면서 이야기하는 비효율성을 이용하여 결론을 못내리게 만들고 상대방의 성질을 건드리는데 전문가일 뿐이다. 건설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다.
두번째인 지적 형식주의는 무슨 주의, 누구 유명한 철학자, 어떤 역사적 세부사항같은 사실명제를 늘어놓으면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형식주의로 주로 자칭 좌파이론가들이 좋아하는 형식주의로 이 대화도 겉으로보면 마치 무슨 과학을 하는 것같고 엄밀한 결론을 내는것같지만 제대로 쓰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매우 비효율적인 것이다.
나는 한번은 노무현정부가 신자유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토론을 들은적이 있다. 그 토론은 금새 과연 그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빠지더니 결국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무한한 세부사항으로 무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가 어딘가에서 자세를 잡고 다시 원래의 토론내용으로 돌아온들 그런식의 태도는 말하자면 바로 옆이 먼지내는 공사판인데 거기서 보다 깨끗한 과학실험하겠다고 마스크하는 것, 레고로 우주로케트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엄밀성? 언어로 논하고 역사를 논하면서 엄밀성에 너무 큰기대하면 곤란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느 이상이 되면 배가 산으로 간다. 사실을 늘어놓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핵심과 적당한 수준의 합리성을 느낄수 있는 직관, 경험, 감수성 그런 것이다. 나는 이명박과 노무현의 차이를, 나경원과 박원순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못느끼겠다고 하는 정도에 이르면 이건 논리 이전의 문제다. 대화가 안된다.
이런 형식들은 왜 존재하는가? 물론 특정한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판을 만들기 위해서다. 한나라당이 좋아하는 지위적 권위주의는 내가 이사인데, 내가 교수인데, 내가 여당총수인데 하는 지위로 토론을 누르면 이야기하기가 편해져서 그렇다. 기본적으로 사회는 피라미드니 아랫것들은 조용히하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토론은 말장난만하면서 감정만 건드리다가 결론없이 끝내면 기득권의 승리다. 이런면도 있고 저런면도 있으며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박원순이나 나경원이나 모두 다 더럽기도하고 깨끗하기도하다. 다 똑같다가 되면 승리다.
좌파이론가가 좋아하는 지적 형식주의는 그들이 책몇권읽은걸 무기로 쓰고 싶어해서 등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실무를 많이 해 본 사람들은 개념에 휘둘리지 않는 실용주의를 보여주지만 그저 어떤 유명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식만 알뿐 자기가 뭔가를 스스로 생산해 내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고생해서 읽은 지식나부랑이를 강력한 무기로 쓸수 있는 판을 원한다. 끝없는 회의주의에 의존하고 자기만 알것같은 어떤 지식에 대해 답을 요구한다. 사실 그사람들은 거의 내 인생을 고쳐줘, 나를 교육시켜줘라고 강요하는 식이다. 그게 지적 형식주의가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일이다.
진보의 헛발질, 보수의 위선
나꼼수는 권위주의를 깨고 아 씨바라고 추임새를 넣어서 일단 많은 금기를 깨버린다. 남 이야기하는데 예의바르게 듣고, 무슨 정밀기계만들듯이 자기 논리를 세밀하게 만들어 넣지 않는다.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고 처음부터 말한다.
그런 나꼼수는 형식좋아하는 보수가 보기에는 천박한 것이고 형식좋아하는 진보가 보기에는 근거없는 유사종교행위나 자위행위가 된다. 안그래도 얼마전에 진중권이 나꼼수를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김어준이 모세냐고 비아냥 거리는 글이 웹에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내생각에는 (물론 내생각인데) 그런 사람들은 나꼼수의 티끌같은 문제점에는 민감하지만 태산같은 자기들의 문제점에는 무감각하다. 왜 사람들이 나꼼수에 박수를 치겠는가. 바로 위에서 말한 그런 형식주의, 권위주의로 사람들을 옭아매서는 결국 자기들 맘대로 하는 진보와 보수, 방송, 교육등 여러 의견을 내는 사회의 채널을 독점하지만 국민을 대표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국민들이 질려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가 채널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진보도 보수도 아닌 무당파가 최고의 파벌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안철수 열풍이 분다는 것에서 잘나타난다.
진보도 보수도 모두 다수의 국민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답답한 소리만 하고 귀멀고 눈먼것 같은 소리만 해댔기 때문에 아 씨바의 탈권위주의가 국민적 지지를 받는 것이다. 국민들이 이렇게 답답해 할정도로 이런 증세는 분명한 것인데 진보나 보수의 일각은 그걸 못본다. 다수의 국민을 광신자 즉 미친사람으로 이야기한다. 눈멀고 귀먼것은 그들이다. 깊은 생각이 없고 뭐하나 생산적이지 못한 것은 그들이다.
아 씨바하는 추임새로 형식이 흔들리는 순간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던 독점과 아집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이게 진보도 보수도 모두 거부하고 무당파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나꼼수에 특히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김어준의 쫄지마는 반드시 보수층에게만 해당하는게 아니다. 형식과 전문용어로 군중을 위압하는 현학적 진보에게도 쫄지말라는 의미다.
맺는말
그러나 지겨운 옛노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은 새로운 노래다. 다시말해 완전한 무형식으로 세상이 돌아갈수는 없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천재도 성인도 아니라서 그렇다. 수만번 같은 노래 듣다가 지겨워서 아 씨바 하고 중간에 추임새 넣으면서 불량하게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좋다고 깔깔거린다. 이 형식파괴의 행위는 우리가 지금 부족한 것이 뭔가를 잘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분명 생산적 행위다. 그러나 대안 자체는 아니다.
대안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그런단계에 가려면 멀고도 멀었지만 아씨바의 추임새가 너무 길어지면 그건 그것나름대로 사회적 악이 된다. 나꼼수가 가카 전용방송이 될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새로운 노래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박원순이나 노무현이나 안철수의 노래는 재즈적으로 즉흥적이다. 새로운 이론적 정리가 없으면 낡은 시대가 무너져도 새로운 시대는 오기 힘들것이다. 오직 천재만 춤출수 있는 시대는 재미없기 때문이다.
'주제별 글모음 >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기 한국과 천년전의 한국 (0) | 2011.11.01 |
---|---|
반성의 깊이. 우리는 뭘 반성하나. (0) | 2011.10.24 |
폭력없는 국민통합이란건 가능한 것인가. (0) | 2011.10.20 |
때로 늦은 밤에 깨어있게 되는 이유 (0) | 2011.10.18 |
호모 이야기쿠스, 인간은 이야기로 살아간다. (0) | 2011.10.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