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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살고 싶은 마을

저성장 시대는 가족과 커뮤니티를 요구한다.

by 격암(강국진) 2011. 11. 16.

한국에 부동산 거품 붕괴가 임박했다던가, 세계적 경제장기불황이 임박했다던가, 실업율이 오르고, 양육비가 비싸지고 하는 말이 나온지는 한참이다. 한국은 이제 본격적인 체질변화를 겪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뭐든지 새것이 좋다는 시대, 경제성장속에서 껍데기만 치장하는 삶에서 안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며 두드러진 변화의 외양은 가족과 커뮤니티가 강조된다는 것이 될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젊은 세대가 부모와 함께 살고 싶어하는 이유


최근에 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어떤 사람들에게는 뜻밖이라고 생각될수도 있는 결과가 나왔다. 그것은 자식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할것 같은 노인들은 따로 독립해서 살고 싶어하는 반면에 결혼한 자식들은 부모와 함께 살고 싶어한다는 결과였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물론 그렇게 되었을때 많은 돈과 시간을 절약할수 있기 때문이다. 맞벌이 부부는 아이들이 외로울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고 은근히 가사를 분담한다던가, 주거비를 절약할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워낙 집이 비싸니 결혼하지 않은 총각처녀는 더 답이 없다. 요즘 전세값이 없어서 결혼못한다는 남녀의 이야기는 사방에 가득하다. 


사실 자급자족형 공동체는 그 자체가 일자리창출이며 돈을 절약하는 길이고 특히 저성장시대에 신뢰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돈이 뭔가. 돈이 신뢰고 신용이다. 별 근거도 없는데 은행이 돈을 펑펑 빌려주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신용이 넘쳐서 당신이 돈을 구하기 쉬울것이라고 믿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정규은행에서 돈을 구하지 못하면 사채업자에게 간다. 그런데 그것은 위험한 인생길의 시작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다시 경쟁력을 얻게 되는 것은 신뢰가 존재하는 작은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그 대표적 사례가 가족인 것이다. 외식하는 대신에 집에서 밥을 먹으면 돈이 덜든다. 가정부를 고용하거나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는 대신에 식구가 많은 가족이나 동네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는 상황에서는 일을 분담하면 돈을 쓸 필요가 없다. 


고성장의 시대에 우리는 가족이나 커뮤니티를 파과하면서 더 많은 기회를 찾아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저성장의 시대가 오면 이제 가족과 커뮤니티로 돌아오고 싶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서로 돕는 상황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돈이 무한정으로 나간다. 억대연봉도 맘대로 쓰다보면 남는게 없어진다. 


껍데기 뿐인 인생의 전환


고성장 시대에는 말하자면 뻥을 잘치는 것이 효과가 좋다. 다시 말해 내부적으로 어떤 것을 알고 있는가,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상으로 능력있고 좋아보이는 것이 효과가 좋다. 효과가 좋다는 것은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실제로 그런 것을 창출한다는 뜻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 어느날 사법고시에 합격한 남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이 남자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전에는 세상사람들이 그를 쳐다도 안보는 것처럼 느꼈다. 그런데 일단 합격을 하자.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차이는 단순히 사법고시합격만큼만 나는게 아니다. 일종의 되먹임 작용이 일어나서 증폭현상이 생긴다.


즉 그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사방에서 그에게 신용을 주고 인맥이 생긴다. 그런데 이 신용과 인맥자체가 다시 그의 능력이 된다. 전화 하면 부탁을 들어줄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마치 자신의 능력처럼 변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수 있고 누가 나에게 뭔가를 부탁하면 부탁을 들어줄수 있다. 이건 분명히 탄탄히 검증된 능력같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건 마치 아파트 한채를 산 후에 그걸 담보 삼아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백채를 산다는 부동산 투기꾼의 재산증식방법이나 양심불량으로 사방에서 돈을 끌어다가 사업을 하는 위험한 사업가의 사업방식과 같은 것이다. 


돈이 부풀어 오를때는 기적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미국에서 서브프라임사태가 난것처럼 어떤 문제가 생겨서 신용의 흐름이 멈춘다싶으면 이제 신용을 부풀리던 바로 그 방식이 거꾸로 작용해서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망하고 마는 것이며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똑똑한것 보다 똑똑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실제로 돈이 있는 것이상으로 돈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능력이 중요하며, 실제로 인기가 있는 것보다 인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게 중요하다. 뭐뭐 처럼 보이는 것이 실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옷은 최고급으로 입고, 명품을 들고 다니고, 자랑할 만한 학력이며, 호칭을 걸고 다니고, 유명한 사람과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서 자기 인맥을 자랑하고, 여러가지 처세술을 익혀서 속은 텅텅 빌지라도 겉으로는 훌룡한 사람인척 하는게 좋은 것이다.


물론 실질이 전혀 없기야 하겠는가. 흑과 백처럼 나눠지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저성장시대에는 이제 반대가 된다. 저성장시대에는 허풍선이가 되어 신용을 잃으면 재기가 불가능하다. 이젠 내부를 채우고 실속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남에게 그럴싸하게 보이면 댓가가 큰 시대가 아니다. 선진국의 부자들이 늘상 검소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저성장하는 부자나라 사람들은 대개 자랑이나 허세에 돈을 덜쓰고 그런 걸 경멸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마다 다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건 어느쪽 사람들이 더 착하다 그런 차원을 따지기 전에 어떤 환경에서 어떤 정책이 댓가가 큰가하는 문제다. 저성장 시대에 허풍은 별로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다. 


결국 세상이 빌려준 능력을 자기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대 망상이다. 유명해지기 전에는 겸손해 지기 쉽다. 그러나 유명해지면 뭐든지 다 자기 능력같아서 자신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빚을 엄청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크게 느끼는 과대망상인 것이다. 유명해 질수록 겸손해 져야 하는 것은 이것때문이다. 


지역 커뮤니티


성미산 공동체같은 곳의 사례를 보면 이런 것을 가족을 넘어 지역의 단위에서 활용하는 예를 볼수가 있다. 공동육아 같은 것이 물론 가장 중요하다. 지역 내부에서 자원봉사와 친목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SSM 이야기는 내가 자주하는 주제인데 이걸 막는 것은 그냥 부자가 가난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는 논리로는 절대 되지 않는다. 오직 지역커뮤니티가 존재할때만 말이된다. 사실 규모의 경제학때문에 소규모 상인이 SSM이 하는 서비스나 가격을 따라오기 어렵다. 사람들은 일단 지역소상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SSM이 소비자를 착취할거라고 말한다. 그럴수도 있지만 그건 사실 절반은 그럴수도 있고 절반은 근거없는 음해에 불과하다.


진짜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더 싸고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수 있다고 해서 그걸로 충분히 좋은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더 공부잘하고 예쁘면 당신 아들을 남의 아들과 바꾸나? 안그런다면 왜 안그런가? 당연하자나 같은 이야기로 흥분하지 말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물론 이 이유뿐이 아니지만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가족이니까. 우리 아들도 내가 힘없고 어렵다고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아버지로 삼을거라고 생각지 않는 신뢰가 있으니까 그렇다. 


앞에서 지역공동체를 이야기했다. 지역내에서 강력한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를 돕는 시스템이 있으면 각각의 가게나 사람은 단순한 기계부품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유기체로 채소가게 아저씨 물건이 좀 안좋으면 다른 채소가게로 확 바꿀수 있는 그런게 아니라는 것이다. 


공동체가 직업을 만들어 낸다. 대기업은 일자리를 줄인다. 중소기업이 거기에 비하면 일자리를 늘리고, 더더 작은 공동체일수록 사실 일자리는 더더 많이 만들어 낸다. 


고성장 시대란 모든 사람들이 미친듯이 뛰어다니기에 작은 커뮤니티가 다 망가지고 거대한 규모를 달성하는 시기다. 저성장 시대란 이제 다시 사람들이 더 작은 자치 공동체로 뭉쳐야 경쟁력이 생기는 시대다. 그래야 일자리가 생기고 사는게 사는 것같아진다. 사방으로 돈이 줄줄 새지 않고 말이다. 


가장 극단적으로 작은 공동체에 대해 세상에서 하는 말이 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되야 돈을 모을수 있다. 이건 결혼해본 사람들은 대개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저성장시대에는 결국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야 -좀 더 큰 규모의 가족이라던가 작은 지역공동체라던가- 돈을 모을수 있는 시대다. 


맺는말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므로 공동체의 복원은 이뤄질 것이고 시도될것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공부가 필요하다. 자기 내부를 들여다 보는 공부도 필요하고, 작은 조직안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하는 공부도 필요하고, 누굴 어떻게 믿어야 할것인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것인가에 대한 공부도 필요하다. 


노인들이 왜 결혼한 자식들과 함께 살기 싫다고 하겠는가. 하나의 공동체로 다시 결합하자면 그안에는 내부적인 규약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한쪽이 한쪽을 착취하는 시스템이 될뿐이다. 결국 지금의 중년내지 그 이하의 세대가 별로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엉터리같은 가장이 있는 가족이 만들어 내는 비극은 지금도 날마다 막장드라마들이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부모재산 다뺏고 내쫒는 극악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가끔 들린다. 


그러나 공동체 시대로의 복귀는 시대적 요구사항이다. 겨울이 왔는데 땔감도 두꺼운 옷도 없으면 얼어죽는다. 준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저성장시대에 큰 댓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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