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글을 쓰고 나서 제글을 많이 읽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글을 이리저리 정리하다가 글을 다시 읽는 편입니다. 근래에도 제글들을 모아다가 다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블로그며 메일을 통해 사람들이 제글을 읽고 한 말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어렵다고 하는 사람, 뭔가 균형을 맞출려고 노력하는 것같다는 사람, 자기의 한계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같다는 사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제가 쓴글들을 읽어보면서 몇가지 키워드가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경계, 불확실성, 과학, 가치판단, 윤리, 공동체, 정체성, 합리성 같은 것들입니다.
아는 것을 지운다는 것.
저는 아는 것을 지운다같은 말을 종종 합니다. 이것은 어떤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해는 동쪽에서 뜬다라는 말은 절대적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둥근 지구가 태양주위를 어떻게 돌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고서 생각해 보면 그다지 절대적 운운 할것도 없는 지식입니다. 우주에는 동서남북이나 위아래가 정해져 있는게 아니니까, 인간이 편의상 이리저리 방향에 대해 약속을 만들어 놓은 것뿐입니다. 지자기 역전현상같은 것도 있었던 적이 있어서 지금의 북극이 영원히 북극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해가 동쪽에서 뜬다라는 말은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은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어려운 점입니다. 뭔가를 알기전에는 그것을 쉽사리 지운다거나 절대적이지 않다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 평생 수학문제만 풀던 수학자나 과학연구에 종사하던 과학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여기 피리만 만들던 피리장인이 있거나 집만 짓던 목수가 있다고 해봅시다.
뭔가를 전문적으로 하려면 대충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규칙이나 선배들이 만들어 낸 지식을 잘 외우고 그걸 따라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랄까요. 장기의 고수나 바둑의 고수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시합을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그래서 온갖 장기며 바둑에서 이전에 있었던 경기들을 외우고 여러가지 전략을 외웁니다. 어떤 전략이 고전이되고 유행하는 것은 그 전략이 그만큼 여러가지 테스트를 거칠 만큼 강력한 장점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는 것을 지운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머릿속에 그 전략을 눈으로 보고 외우면 줄줄이 지나갈정도로 몸에 체화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는 것을 지우는 것입니다. 결코 제대로 정면으로 부딪혀 자기 것으로 해본적도 없는 것을, 그야말로 이거야말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할 정도로 나름대로 확인하고 철저히 익힌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아는 것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생명이 진화하는 것은 개체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냉혹하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에게 자손을 퍼뜨릴 자격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것이 자연선택의 법칙이 작동해서 진화를 만들어 내는 방식입니다. 죽느냐 사느냐하는 정도로 냉철하게 자기 일관성을 추구하고, 하나를 쫒지 않는다면 거기에 다음은 없을 것입니다.
아는 것을 지운다는 것은 그렇게 추구한 그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한 부모가 아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고, 논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수많은 시간을 그것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고, 승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할정도로 어떤 승부에 집착한 사람이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는 것을 지우는 것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제대로 부딪히지도 않고 쉽사리 절대적인게 어디있냐면서 뒤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재능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래서 저는 우리는 적어도 한가지에는 미쳐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한가지에는 장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과학일수도 있고, 철학일수도 있고, 노래일수도 있고, 농사짓기일수도 있고, 공학일수도 있고, 사업일수도 있으며, 야구나 농구일수도 있습니다. 뭔가 돈이라던가 출세라던가, 어떤 편안함 같은게 아니라 순수히 그것에 매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죽자고 노력한 끝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자기가 좋아했던 것에 상관없이 보편성을 가진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같습니다.
불교에 정통하지는 않으나 스님들의 수도에도 계율이 있지요. 그리고 깨닫고 나면 규칙이란 필요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깨닫지도 못하고 처음부터 계율알기를 우습게 해서는 아무것도 안되는것입니다. 반대로 그 계율을 어기느니 죽겠다는 정도의 각오로 그 계율지키기에 철저히한 끝에서야 부처님이 말한 것처럼 내가 설한바 법이 없다라고 하는 말을 해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는것이 다르다
그런데 모두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태어나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의 경험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누구는 구두를 닦고 있고 누구는 냉장고를 닦고 있는데 냉장고 닦는 사람이 구두를 닦는 사람의 흉내를 낸다면 냉장고가 엉망이 될것입니다.
아는 것을 지운다는 것은 어찌보면 각자 자기의 구두며 냉장고를 닦는 것입니다. 가진게 다르니까 남이 하는 것을 그대로 흉내만 내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엉망이 될수 있습니다. 법정스님같은 분은 일찌감치 출가하여 부모님의 초상에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가족과 절연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뭏튼 출가한 법정스님이나 신부님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또 그에 맞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정스님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출가한 스님도 아닌 사람이 똑같이 따라하면 좋을때도 있을수 있지만 제대로 될리가 없습니다. 중소기업 사장이 돈을 벌어야 직원들 월급을 줄터인데 자꾸 무소유 무소유하면 과연 사업을 제대로 할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화성인과 금성인도 아니고 같은 한국인이고 같은 남자고 같은 지구인이고 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해도 같은게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일반론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저는 과학에 대한 이해가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에 대해 무식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과학적 논리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현대사회는 과학적 논리로 짜여져서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과학에 대해 단 한줄도 안배운 사람도 알고보면 과학적 논리에 중독되어져 있는 경향이 있으며, 실은 과학에 대해 잘 모를 수록 더더욱 과학에 중독되어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다른 것입니다.그래서 제가 관악산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관악산이 똑같은 의미를 가질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이 대신 밥을 먹어 줄수는 없는 것이니 이것은 소통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 구원해 주려고 해서도 안되고 구원해 줄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 자신으로 내 자리를 지켜서 그것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기를 기대하는 정도 밖에는 할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인데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내가 개로 보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 소리는 그저 멍멍하는 개의 소리로 들릴수 있습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 가르쳐 줄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자기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것은 각자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일을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느낍니다. 제 아이들은 물론 매우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며 저는 거의 불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같이 호흡하고 살아도 제 마음이 모두 잘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같이 호흡하고 같이 사는 아이들, 저를 전적으로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제 아이들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믿음과 신뢰의 중요함
이 세상에는 엉터리같은 말도 아주 많습니다. 이 세상에 엉터리 같은 남자며 여자가 많은데 그중의 하나를 골라 사랑에 빠지는 일처럼, 우리는 여러가지 말들을 듣고 뭔가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물론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하고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한다면 인생이 망가질것이라는 것을 예측할수 있듯이 아무 말이나 믿어서는, 아무나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듣기만 하고 구경만 하고 있다면, 그저 조심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실은 영원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의 가장 낭만적인 부분은 실은 사랑이 시작하자마자 끝나 버립니다. 그건 사랑을 고백하거나 상대방을 믿기로 결심한 순간입니다. 사랑은 구경만 하면서 완벽한 사랑을 기다린다고 그렇게 할수 있게 되는게 아니라 알수 없는 불확실한 순간에 한걸음을 더 걸어나가는 순간에 진짜로 시작됩니다. 그 용기와 행동이 사랑을 시작시키고 우리를 바꿉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과학을 하기를 꿈꾸는 아이가 과학자가 되기를 소망하게 되는 순간, 누군가가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나는 과학자가 될꺼야라고 고백하는 순간도 그런 순간일지 모릅니다. 그 사랑은 반드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아닐수 있습니다. 우리중 많은 사람은 그 사랑의 끝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사랑에게서 도망치고 결국 미워하는 것으로 끝이납니다. 마음에 복수심만 가득차서 거기서 영원히 풀려나지 못합니다. 미움이란 집착이고 결국은 끝나지 않았을뿐 사랑의 다른 형태입니다. 사랑의 진정한 끝이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 커져서 모든 것을 다 포용했을때 더 큰 세상을 볼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학을 사랑했으니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과학인것과 과학이 아닌것의 경계를 보고, 그렇게 해서 과학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야 과학에 대한 사랑이 승화되어 끝나고 다음 단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불신이 넘칩니다. 불신의 소리들이 우리가 뭔가를 믿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야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합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뭔가를 믿을때 그리고 한발을 내딛을때 우리 앞에는 전에 없던 길이 생겨나게 될것입니다. 일단 생겨나고 나면 마치 당연한듯이, 마치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던 것처럼, 길은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길이 있을때 우리는 행복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울 것입니다.
'주제별 글모음 >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FTA 날치기 통과. 이래도 세상은 안바뀔것인가. (0) | 2011.11.23 |
---|---|
이명박 정권은 왜 FTA에 목을 맬까. (0) | 2011.11.22 |
당신은 성형수술을 찬성하십니까? (0) | 2011.11.18 |
SBS 앵커발언과 상식의 문제 (0) | 2011.11.18 |
대학입시, 모두를 죽이는 현실 (0) | 2011.11.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