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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은 왜 바닥에 떨어졌는가.

by 격암(강국진) 2011. 12. 7.

여교사 농락사건 비디오 기사가 시끄럽습니다. 문제의 비디오를 보면서 학생들의 태도를 한심하다고 말하고 더욱 강력하게 그들을 혼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특정한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교실에서 그리 드물지 않게 잃어나는 교권추락의 현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순히 교권추락만을 말하는 것은 답없는 곳을 헤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권추락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동시에 학생인권이 신장되어야 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권도 추락하지 않고 학생 인권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둘다가 어떻게 동시에 성취될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허울좋은 표면의 미사어구를 제외하고 나면 이것이 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저는 느낍니다. 학생인권을 무시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것도 문제지만 교권도 더욱 신장되어야 할텐데라고 정말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냥 에이 뭐 다 잘하면 되는거지라고 하면서 적당히 화해시키고 나면 되는 걸까요. 


아이들이 느끼는 학교, 선생님이 느끼는 학교


저는 문제의 핵심에는 오늘날 학교라는 곳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가하는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사회적 모순은 학교의 의미를 지워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거의 지워버린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모순이 폭팔하는 곳이 학교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서 회사에 취직한다는 -물론 모두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종의 정해진 길을 따라가면 안정된 삶을 살수 있다는 기대는 이미 지워진지 오래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극히 작은 몇퍼센트의 학생만 가는 명문대에 가도 취업이 보장이 안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취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오랜 시간과 돈을 교육에 들이는 것이 일견 허무해 진것입니다. 


물론 교육은 단순히 취업과 동실시할 문제는 아닙니다. 교육은 그 이상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학교의 문제, 교권추락의 문제는 여기서 더 큽니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1-20년전의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대부분 깊이 없는 앎이기 때문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해가 되는 경우도 많은 것같지만 인터넷과 방송매체의 발달로 인해서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이 아는 것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 적어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교권추락의 핵심적 문제를 정리하는 말일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이 앉아서 선생님을 볼때 물론 선생님은 교과목에 대해 이러저러한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런 지식을 알려주는 곳은 얼마든지 있으며 사실상 선생님이 학생에게 해주는 것이 없다라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인 경우도 많이 있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학원에서의 교권추락 동영상을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교권추락 이야기는 주로 학교에서 나옵니다. 학교나 학원이나 돈내고 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학원비가 등록금보다 비싸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원은 그 형식상 학생과 학부모가 선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학원에서 누가 계속 수업방해를 한다면 선생님이 주의를 줄 필요도 적습니다. 왜냐면 모든 학생들은 돈내고 배우러 왔는데 특정학생이 수업방해를 한다면 그것은 선생님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현상과 논리가 교실에서는 왜 안통할까요. 그건 교실에 있는 상당수의 학생은 교실이 자신들을 억압할 뿐이며 자신이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즉 졸업장이니 사회적인 압력이니 하는 교육과는 무관한 비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면 거기 앉아있고 싶지 않아하기 때문입니다. 교과목을 공부하려면 과외나 자기에게 맞는 학원을 찾아가고 싶으며 그 이외의 것 학교에서 말하는 인성교육이니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그저 참아내야 하는 억압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학생들은 선생님이 아는 것중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자신이 모르는 것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란 그저 학생들을 억압하는 시스템의 말단으로서 스승이라기 보다는 감옥의 교도관처럼 보여집니다. 


상황이 더 나쁜 것은 그 교도관은 공권력도 없는 교도관이라는 것입니다. 즉 학생들을 체벌하지도 못할뿐 아니라 학교와 학부모로부터 모든 권위를 박탈당한 존재입니다. 문제학생을 처벌하는 엄격한 룰은 모두가 원하지않습니다. 학부모도 원하지 않고 학교도 원하지 않습니다. 학교도 문제학생이 있다는 기록을 남기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문제의 비디오처럼 교사를 농락해도 교사는 거의 무력합니다. 교사의 판단따위는 거의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학교의 의지와 학부모의 의지일 뿐입니다. 어찌보면 오늘날의 학교란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메세지를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보내는 장소입니다. 다수의 학생들은 우리에 갖힌 짐승처럼 억압을 느끼고 있는데 그 앞에 모든 권위를 박탈시킨 교사를 던져줍니다. 어찌보면 교육을 시키는게 아니라 학생들에게 당하면서 그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학생들과 놀아주는게 오늘의 교사가 해야할 일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현직교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답이 없고 문제를 해결할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학원강사나 교육방송강사의 강의보다 일대일로 하는 과외보다 일선학교 교사의 강의가 효과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선발된 사람이고 엄청난 준비끝에 하는 강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방송국에 나오고 음원을 파는 최고가수들과 동네에서 노래좀 한다는 사람이 똑같은 수준의 노래를 왜 못하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았을때 교권의 추락이란 단순히 어떤 학생의 인성문제거나 어떤 특정교사의 무능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다만 학교의 현실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입견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충격을 받을 뿐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놀랄일이 전혀 없습니다. 


문제의 재구성


결국 문제는 교육을 취업과 동일시하게 된 현실. 학교와 교사의 권위가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 교사를 포함한 어른들 스스로가 자기의 공부는 고등학교나 대학교 나오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른들 스스로가 교육은 돈과 취업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믿을 때 정말 고등학생들에게 어른들은 가르쳐 줄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것 이상으로 고민해 본것이 없다면 사실 말해줄것이 없습니다. 말해줄것이 없는데도 권위를 세우는 것은 권위주의입니다. 권위주의는 억압이므로 학생들은 반발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른세대가 전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교사는 물론 많은 어른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있게 살아가기 위한 고민을 하고, 나날의 경험들을 축적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워가면서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스템이 그런 것을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먼저 말합니다. 실력이 좋으면 취직하고 성공하는거 맞냐고. 그냥 빽이 좋고 집안이 좋아 여러번 기회를 얻을수 있는 인간들이 그렇게 되는거 아니냐고. 아이들이 먼저 말합니다. 법지키고 질서지키고 착하게 살면 손해만 보는 바보가 되는거 아니냐고. 무수한 범죄자와 병역기피자들이 날마다 인터넷과 방송에서 나와서 스스로를 사회지도자라고 말하고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과연 어른들은 아니라고 할수 있을까요? 


사회까지 나가지 않아도 학교자체도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불투명한 일처리로 유명한 곳이 학교재단들이지요. 거기의 이사장이며 이사들이 과연 제일 열심히 공부한 사람, 제일 인격적으로 뛰어난 사람 뭐 그런 사람들일까요. 학교와 사회는 극명하게 교사는 권력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있는 비루한 존재일 뿐이라고 보여줍니다. 그런게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계속 아이들에게 알려집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가서 내가 니 인성을 향상시키겠다고 하면 아이들은 화가 날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고민하고 살고 있는가. 선생님은 얼마나 향상된 인격을 실천하고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 내 인성을 바꾸겠다는 말은 나를 비루한 말단에서 일하는 말잘듣는 기계로 만들겠다는 말인가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 밑바닥에서는 왠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맺는 말


교육문제에 대한 확고한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면 학교는 그 사회의 거울이기 때문에 교육문제의 확고한 해결이란 사회자체의 향상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어떻게 한번에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회가 학교라면 뒤집어 말했을때 학교가 사회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영향이 개인의 내부를 만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명 한명의 아름다운 개인이 그 영향과 향기를 세상에 미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좋은 학교를 만들때 우리나라의 미래도 밝아지는 것이겠지요. 


저는 교육정책을 좀 그만 바꿨으면 합니다. 현재의 정책이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이란 본질적으로 정책으로 하는게 아닙니다. 교육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극단의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정책하에서도 좋은 학교나 좋은 선생님은 좋은 교육을 할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스템의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고칠 방법도 마련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대규모로 시스템을 확뒤짚으면 자꾸 미래가 불투명해 집니다. 그결과 선생님과 아이들은 더더욱 바빠집니다. 입시는 대개 과거로 갈수록 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과거로 갈수록 아이들은 더 한가했습니다. 아이들은 입시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그래도 요즘 아이들처럼 초등학교때부터 학원이며 과외로 바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시스템은 간단한게 좋고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인간들이 보완해야 합니다. 제도가 저절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시스템이 있는게 아니라 인간들의 마음이 최루의 보루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점점 복잡해 지는 제도 속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선생님도 문제입니다. 학교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위에서도 언뜻 언급했습니다만 기술의 발달로 선생님은 이제 진짜 스승이나 친구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선생님이란 테이프 재생기처럼 사라져가는 존재입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입니다만 가수와 녹음기를 생각해 보십시요. 녹음기가 나오기전에는 노래는 직접 인간이 불러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노래를 듣고 싶은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많은 가수가 필요했습니다. 3류가수도 자기 자리를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녹음기가 나오자 3류가수의 노래보다는 전국최고 가수의 노래를 녹음으로 듣는게 더 만족스러워졌습니다. 세상이 확 뒤짚어 질수 밖에 없으며 가수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는 사건일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일이라면 즉 대인접촉이 적어도 할수 있는 교육이라면 미디어의 발달과 좋은 교재의 개발로 보통사람들이 할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집니다. 한명의 교사가 교재들을 죽 소개해 주고 알아서 공부하고 문제생기면 상담하자고만 해도 되는 시대가 금방올것이며 어느정도는 이미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부는 단순히 교재와 강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공부는 예전부터 그런 것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 태도의 문제, 철학의 문제였습니다. 예전에도 공부잘하는 학생들은 학교선생님강의가 거의 필요없었습니다. 좋은 참고서면 혼자공부할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더욱 그렇게 된것뿐입니다. 


교사는 더더욱 정신상담의 같은역할만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상담하는 사람이 수십명 모아놓고 정해진 교과 진도나가는 스케쥴대로 상담하는 일이 있을까요? 오늘의 교사들은 높은 경쟁을 뚫고 교사가 되기는 합니다만 과연 이런 일을 잘하는 것으로 선발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 일관된 철학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이런 쪽으로 깊은 고민이 있고 그에 따라 학교를 재구성하지 않으면 문제는 나날이 심각해 질것이며 억압된 힘은 학교를 무너뜨리거나 혹은 억압된 힘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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