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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안의 지식인, 대학밖의 지식인

by 격암(강국진) 2011. 12. 14.

언젠가 책쓰고 강의다니는 대학 '밖'의 강사인 강유원씨가 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말하길 그는 학교에 자리가 있는 강사가 아니기 때문에 강의를 듣는 사람들을 만족 시켜줘야만 살아남을수가 있다. 그러나 대학교수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안락한 자기자리가 있으므로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쓰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학안의 지식인과 대학밖의 지식인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에서 이미 심각해져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심각해 질것이며 결국 한국의 지성계는 언젠가 공멸하던가 아니라면 크게 뒤집어 질것이다. 그리고 대학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날로 깊어만 질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스템의 안쪽, 시스템의 바깥쪽


대학교수들은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물론 대부분 훌룡한 분들이시다.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문제는 그게 어떤 면인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대학교수가 되며, 대학교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면 알수가 있다. 


대학들이라는 지식시스템은 오늘날 아주 방대하고 아주 세밀화되어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한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면 첫번째 조건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논문을 많이 쓰는 것이다. 논문은 어떻게 쓰는가. 논문은 대개 어느 특정한 세밀한 분야를 세밀히 파고들어야 나온다. 말이 좋아 깊이와 넓이를 모두 달성한다고 하지, 실상 젊은 연구자들은 논문 한편 한편이 너무 아쉽기 때문에 그런거 따질 형편이 안된다. 대부분의 대학교수들은 자신들이 어쩌다 시작하게 된 하나의 연구방향에서 거의 평생 빠져나오지 못한다. 왜냐면 그 분야가 사실은 이미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고 해도 이미 수년에서 10여년 이상을 공부해서 남보다 아는게 있는 그분야에서 뭔가를 하면 논문을 쓸수 있지만 다른 분야로 바꾸면 그 분야의 기본지식을 공부하는 것만해도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다. 김연아같은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어느날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래요 한다면 과연 그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될수 있을까? 된다고 한들 얼마나 오래걸리나. 학자들이 그렇게 분야를 바꿔서 고민하고 논문을 안쓰는 동안 살아남을수 있는가? 논문을 쓰지 않고 많이 아는 것은 학자로 살아남는데 많은 경우 별로 도움이 안된다. 


그렇게 해서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하자. 대학교수로 산다는 것은 뭘까. 그들이 대중에게 책을 팔거나 강연료를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처럼 대중과 직접 접촉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거대한 평가시스템, 거대한 자원배분 시스템의 하부조직이 된다. 결국 동료교수들이 좋아하고, 학교당국이 좋아하고, 재단이 좋아하고, 정부가 좋아하는 학자가 되어야 돈이 생기고 좋게 평가 받는다. 대학교수가 특별히 심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시스템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대학이라는 지식인의 모임을 그 대학을 떠받치고 있는 사회와 격리시키고 대학이 자원을 지원받는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대학안의 지식인은 이미 대중에게서 격리되어 존재하게 되기 쉽다. 


사회적 환경의 변화


그러나 시스템이 커져서 생기는 문제는 더 심화되기는 했어도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대학안도 있지만 대학바깥도 있다. 한국에 박사가 얼마 없던 시절부터 해서 오랜동안 대학이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지식인들이 모여있는 장소 혹은 지식이 모여있는 장소 라는것이다. 둘째는 발달된 선진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라는 것이다. 


20년전 인터넷이 나오기 전만해도 사실 우리는 고급지식을 익히려고 하면 대학에 가는게 필수였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다. 나는 대학에서 코스를 밟으며 어떤 분야에 대한 기초지식을 순서대로 배우는 것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그러나 지식은 대학이라는 장소의 벽을 넘어 세상에 넘치게 된지 오래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그것이 본격화되었고 멀티미디어방송이 흔해지면서 점점 그렇게 되고 있다. 세계최고의 교수가 하는 강의를 원하면 집에서 싼값에 들을수 있다. 얼마지나지 않으면 수많은 대학들은 녹음기가 나오기전의 가수꼴이 될것이다. 즉 삼류가수의 노래를 생음악으로 듣는 것보다 일류가수의 레코드가 더 좋은 것처럼 순수히 배우기 위한 것뿐이라면 삼류대학에 가느니 차라리 최고의 강의를 비디오로 보는게 더 좋은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의 대학들이 세계 1등대학으로 거듭난다면 그 시대를 생존할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계속되어져야 할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규모를 생각하고 한국인의 수를 생각했을때 그런 노력은 형식의 변경없는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안될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그렇다고 쳐도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해도 한국은 작고 힘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껏 몸을 부풀린다고 해도 우리가 중국처럼 거대한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중국은 로켓발사같은 것을 통해 그들의 기술을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걸떠나 재정규모가 다르다. 


대학에는 도대체 뭐하러 가겠는가. 물론 대학에는 졸업장을 위해서 간다. 그래야 취업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대학원에 가서 학위를 따고 학자가 될수 있으니까. 그러나 학생으로 대학에 간다의 본질은 배우러 간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적거나 대학에 안가도 지식이 넘친다면 그 본질이 흔들리는것이다. 형식이 본질을 위배하는 현실이 언제까지 유지될거라 믿을수는 없다. 나날이 비싸져만 가는 등록금앞에서 이미 교육버블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즉 대학등록금을 낼 가치가 있는가 하는 말이다. 대학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계속 존재하기에 문제가 있다. 


두번째로 선진국의 문물을 배우고 소개하는 장소로의 대학이라는 사명도 물론 이미 끝이 났다. 20년전만 해도 미국에서 학위받고 돌아온 교수들에게서 학문을 배운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외국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도 별로 없었다. 


지금은 아예 고등학교때부터 미국으로 가는 사람도 많고 미국대학으로 가는 사람도 많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외국의 문물을 한국에 소개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인터넷을 보라. 전세계에서 한국인들이 현지의 자세한 소식을 바로 전한다. 이제 외국 어디에 대한 부족한 설명과 이론으로 만족할 시대는 지났다. 


전문 분야의 연구도 그렇다. 인터넷이 나오기 전에는 사실 논문한편 구하려고 하면 미국에 편지써야 하는 판이었다. 그러니 관련분야의 연구를 하고온 교수의 말이 훨씬 더 값어치있을수 밖에 없다. 어떤 박사과정학생은 외국에서는 이미 인기가 한참전에 끝난 연구주제를 가지고 지도교수와 공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전세계의 연구들을 인터넷에서 바로 확인하고 그 흐름을 쫒아갈 수 있다. 


한마디로 선진문물을 배우고 싶으면 대학교수가 아니더라도 되고 외국으로 가기도 쉽다는 것이다. 지식의 원천으로서 한국대학이 가지는 경쟁력이 어느정도 사라진 것이다. 


지성계의 공멸


지성계의 공멸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국민들이 한국의 지식인들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 이제까지 내가 비제도권의 지식인들을 옹호하는 식으로만 쓴것 같지만 나는 변화를 위한 사회적 압력으로만 볼뿐 비제도권 지식인들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제도권이 바뀌던가, 그게 아니면 혁명이 일어나서 제도권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비제도권이 제도권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즉 건전한 비판수준의 야당으로 머물던가 그게 아니면 혁명으로 주류가 되어 지금의 주류를 무너뜨리던가 해야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뒤흔들기가 정도 이상으로 커진채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혼란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불신만 가득해서 대학교수보다 지식인보다 초등학생의 음모론이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 세상, 그것이 바로 한국 지성계의 공멸이다.


사실 한국 제도권 지식인들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이미 상당하다. 삼성경제연구소가 국민을 위한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4대강 개발을 막지 못한 한국 학계는 어떤 입장에 있는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 왜 비제도권 인사들- 김용옥이나 강유원등-의 역할만 커보이는가. 나꼼수가 제도권인가. 미네르바 구속사건은 한국의 지성계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보여준다. 


김용옥은 대놓고 한국의 교수와 기자들이 제정신만 차리면 한국이 산다고 말했다고 한다. 모두에게 선망의 직종이었고 지식인의 상징같았던 교수와 기자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조선일보보다 뉴욕타임즈를 신뢰하고 이명박보다 오바마를 신뢰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즈와 오바마가 한국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겠는가. 그런데 나는 그래도 뉴욕타임즈보다 오바마보다 조선일보와 이명박을 더 신뢰한다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대중이 그나라의 지성계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는것은 팔다리와 몸통과 허파와 심장이 남의 두뇌의 명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정상일수가 있을까? 생존이 가능할까.


원흉은 권위주의


이런 현실의 가장 큰 원흉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의 권위주의적 문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주류라는 우파들이 자유시장이라는 주장을 자주하는 나라치고는 우리나라는 사실 자유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다. 사람들이 칸칸이 차별하고 권위를 세우는 것이 우리나라 문화다. 


유럽은 그 형식에 있어서 대학이 이미 비권위적이다. 대학이 뭘 가르친다기보다는 지성인들이 모여서 알아서 공부하는 장소라는 식의 전통이 남아있다. 따라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자유롭고, 박사학위때도 필수강의를 들어야 졸업시켜준다는 식의 것이 없다. 박사논문을 제출해서 교수들이 이사람은 박사급의 지성이다라고 인정하면 박사다. 난 영국에서 박사학위하면서, 실제로는 미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사람도 알고 있다. 


이러다보면 엉터리 졸업생도 물론 나올수 있다. 미국식은 그보다 훨씬 스파르타식으로 필수강의를 수강할것을 요구하고 시험도 더 많이 요구하는 편이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은 매우 민주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대학교수와 학생간의 관계가 한국처럼 딱딱하지 않다. 고등학교같은 교육방식을 따라도 그 해독을 문화가 해소하는 셈이다. 


한국은 권위주의가 높다. 그래서 체면을 위해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 바로 핵심으로 가는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바로 이런 공부가 도대체 뭐에 도움이 되는가. 이런 공부는 이 세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물론 교수만의 문제도 아니다. 학생들도 어느새 권위주의적 문화에 젖어 커서 질문자체를 하지 않는다. 소비자가 불평하지 않으면 생산자는 결국 나태해진다. 아니 다른 일에 신경쓰게 된다. 교수들 아주 바쁘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 다만 그것이 대중과 학생을 진정으로 위하는 일에 대한 고민이 아닐 뿐이다. 


맺는 말


교육기관은 그 본질이 나날이 지식의 전달, 판매 장소에서 대인 멘토링 서비스로 바뀌고 있고 바뀌어야 한다. 지식이 아니라 대인접촉과 상담을 통해서만 도움을 줄수 있는 지혜와 철학의 전달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학의 전체 시스템은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것과는 무관하게 혹은 반대로 흘러가는 편이었다. 대학교수는 오히려 점점 단순한 셀러리맨이나 단순 조립공처럼 변해간다. 전문화와 경쟁때문이다. 그들은 잠정적으로 산업이 옮겨가서 실직하게 된 신발공장 노동자의 운명을 따를 위험에 처해있다. 오늘날 대학이 줄수 있는게 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마치 세계1등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에서 1등을 안하느니 죽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경제적 사회적 규모로 보았을때 모든 대학이 아니면 대부분의 한국대학은 1등이 되지 못할 것이니 그런 식으로 가면 다 죽을 것이다. 틈새를 찾아야 살아남을수 있다. 그것은 대학이 지금 뭘해줄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학들도 사회적 압력으로 물론 변하고 있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 커리큘럼을 바꾸고 사회적으로 인기가 높은 사람들을 강사로 초빙해서 강좌를 열기도 한다. 그러나 신통치가 않다. 그것은 결국 태생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암촘스키가 사회적 발언을 계속하자 엠아이티에 그를 사임시키라는 압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트위터에서 들은적이 있다. 그러자 엠아이티는 오히려 그에게 종신재직권을 주었단다. 


한국대학들의 태생은 전부 친주류적, 친기득적 느낌이다. 대중을 위해 존재한다기 보다는 대중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교육하고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이랄까. 좀더 순화해서 말해도 한마디로 그들은 철학적으로 차이가 없다. 같은 철학, 같은 삶의 방식, 같은 정치적 태도를 공유한다. 


대학은 탈 정치적인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탈정치적인 것이란 없다. 탈정치라는 태도도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며 그것은 현재의 사회에서 어떤 한쪽편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차라리 여러가지 정치적 구호가 맘대로 나오게 하는 쪽이, 그래서 정치로 가득해 보이는 쪽이, 진정한 탈정치에 가깝다. 


한국의 대학들이 실상 매우 정치적이라는 것, 동일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정치적 태도와 철학이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한국대중은 한국대학을 버릴것이다. 대안적 지식인계층, 대학학교가 대안적 철학과 태도를 가지고 대안적 형태를 띄고 등장할수도 있다. 뭐가 되었건 그것은 현재의 대학의 담을 크게 허무는 일이 될것이다. 물론 사학법논란처럼 현재의 대학은 그것에 저항할 것이고 말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서 지적인 혼란만 계속된다면 한국의 지성계는 공멸하고 물론 한국은 3류국가가 되거나 파시즘적인 불도저 지도자에게 뒤흔들릴지 모른다. 이미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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