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곳이야 있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문제인데 세상을 보면 내용이 광고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보편화되는 문제가 있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사회문제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현실들
예를 들어 신문을 한번봅시다. 이미 신문이나 잡지는 신문안에 있는 내용을 팔아서 운영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광고주의 광고로 먹고 산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집어넣지 말라고 하는데 경품이며 돈까지 주면서까지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찌라시는 많이 뿌려야 광고주에게 많은 광고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며 만약 그게 그안에 있는 내용을 팔아서 수익을 올리려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리가 없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구조는 당연히 그 신문의 내용에 크게 영향을 미칠것입니다. 월급쟁이는 봉급을 주는 사람을 위해 일합니다. 그러니까 광고비가 언론을 먹여살린다면 그 언론이 전달하는 내용은 광고주를 위한 것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문이나 잡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에 저는 우리나라 출판시장의 현실에 대한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변정수, http://charmisle.tistory.com/215) 이글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중의 하나는 책이 얼마나 팔리냐 하는 것이 책이 얼마나 좋은 책이냐 하는 책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책이 좋아서 잘팔린다기 보다는 잘팔리는 책이 잘팔린다는 이상한 자기 순환논리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읽는 책이라고 하면 좀 사서 볼뿐이라서 출판사가 자기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사들이는 일도 벌어집니다. 잘팔리니까 베스트셀러가 되는게 아니라 베스트셀러니까 잘팔린다는 것입니다.
때로 이 유명해지는 것의 중요성은 아주 기묘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그냥 보통사람인 것보다는 차라리 악명을 떨치는 것이 사회적으로 보상받는 것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사장이나 고문전문가 이근안, 탈옥수로 유명한 신창원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들은 범죄자이며 삼품백화점 사장같은 경우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잃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마치 무슨 유명연예인처럼 상품가치를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강용석의원이 그런 좋은 예로 떠오릅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서울대와 하버드 그리고 한국국회의 수치로 여겨져야 할 사람입니다만 온갖 이유로 언론을 뒤덮더니 마치 한국의 중요한 정치인중의 하나처럼 다뤄지는 경우도 봅니다. 이제 강용석의원이 한나라당의 현재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하면 사람들이 그걸 읽습니다. 전혀 무명의 국회의원이 의견을 내도 언론에 실어주지도 않고 보지도 않겠지요. 그런데 온갖 추태를 부리고 근엄하게 한마디하면 사람들이 읽습니다.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저는 절대로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평가와 주목은 상식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이 몰상식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에게도 인생의 교훈을 받을수는 있지만 평범하게 사는 사람보다 유명한 살인자, 유명한 사기꾼이나 도박사가 인생에 대한 더 좋은 교훈을 줄수있다는 것은 몰상식한 기대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물론 언론이나 사회니 하는 거대한 규모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옷과 좋은 집으로 또 그럴듯한 언변으로 뭐뭐인척 하는 것에 그렇게 매몰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차분히 어떤 사람들의 진실된 내부를 들여다본다기 보다는 멋진 옷이나 명함, 직위따위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은 것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다시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 자기를 부풀리게 하는 세태를 부추키게 되고 그안에 있으면 잘안느껴져도 한걸음 떨어져 있으면 뭐 좀 있어보이는 사람이면 우 몰려가서 아양을 떨고 그래보이지 않으면 갑자기 매우 냉정해지는, 추해보이는, 그런 모습을 만들게도 됩니다.
그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여러가지로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유행에 민감하고 남들이 한다면 투기열풍에 빨리 뛰어드는가 같은 것에 대해 얼마든지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할 것이며 그런 것도 다 재미있고 중요한 분석일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문맥이라는 키워드아래에서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음악에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록큰롤 같은 음악이 나오기 전에는 물론 록큰롤 음악이 없었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런데 록큰롤음악이 히트를 치자 너도 나도 여러가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모두가 록큰롤 음악을 듣습니다. 록큰롤음악이 뭔가를 엄밀히 정의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사람들은 하나의 문화적 운동이 일어난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패러다임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가능해 보이지도 존재하는 것같지도 않았던 음악이 갑자기 온 세상을 가득채웁니다. 천재는 좀 다를지 모릅니다만 개개의 작곡가나 가수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영감을 얻고 시장의 반응도 얻어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한국에 등장했을때 음악평가 프로그램에서 혹평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음악이 평가받는 것은 개개의 음악을 넘어선 더 큰 문맥과 흐름이 필요합니다. 그걸 뛰어넘어서 좋다나쁘다를 논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밑도 끝도 없이 가장 훌룡한 단어를 찾는거나 마찬가지랄까요. 조선시대로 가서 랩을 틀어주고 그때 사람들이 그걸 형편없는 음악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조선시대사람들이 음악이 뭔지 모른다고 말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종 고전으로 불리는 책은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는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말하며 이런 표현은 분명 그나름의 진실을 가진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뛰어넘고 좋고 나쁘고를 말할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진실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금의 고전을 한국 사회에 죽 풀어놓고서 그것을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이 좋은 컨텐츠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맥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책이나 글이라도 그것은 그저 소음에 불과한 것이며 이해불가한 것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은 이런 거대한 문맥이 혼돈되어 있거나 존재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바다건너에서는 훌룡한 보석같은 컨텐츠도 한국에 오면 소음에 지나지 않으며 별것도 아닌 컨텐츠가 한국에서는 대단한 베스트셀러로 너도나도 주목하게 되는 일이 가끔 벌어집니다.
제가 가끔 하는 말입니다만 된장국에는 치즈를 넣지 않고 그라땅에는 치즈를 넣습니다. 그러니까 요리에 대해 말하는데 처음에는 된장국 이야기로 나가다가 나중에 치즈넣는 이야기를 하면 말도안되는 엉망인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문맥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별로 지적되지 않고 자주 일어납니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만 떼어다가 맘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니 대화는 하나마나고 말장난에 가깝게 되며 고작해야 입으로하는 검투사의 싸움같은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문화의 탄생
물론 많은 분들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런 부분을 느낍니다. 총론과 각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박원순은 우리나라에 총론은 많은데 각론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엔 반대입니다. 총론들이 부실하니까 각론에 혼돈이 옵니다. 지금 된장국을 만드는지 그라땅을 만드는지를 모르니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은 총론은 많은데 각론이 부족하다. 각론에 집중하자고 하는 그것자체가 프래그머티즘 적인 총론입니다.
문화는 여러가지 가치판단을 조화시켜 놓은 관습입니다. 주전자의 손잡이와 주둥이가 각자 존재하는게 아니라 상호 연계되어 존재하듯이 한 문화의 여러가지 측면은 여러가지로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 상호의존하는 전체에 대한 조망이 총론이고 사회적 개인적 문맥입니다. 문맥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프래그머티즘은 세상을 정적으로 파악하지 말고 나와 상호소통하고 서로가 서로를 결정해 나가는 되먹임을 가진 곳으로 인식합니다 ( 존 듀이의 철학의 재구성을 읽고 http://blog.daum.net/irepublic/7888195). 그런 태도와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총론입니다.
총론의 부재는 불안과 고통을 줍니다. 저는 도올의 인기가 높은것, 정의란 무엇인가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같은 것, 불교건 기독교건 종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들이 전부 이것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이 표면적이고 일관성이 없다고 느낍니다. 매순간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기반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느낍니다.
불교던 기독교던 종교의 참뜻을 아는 것은 어렵다고 해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안에 앉는 것은 어떤 다른 길보다 쉬운 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이렇게 종교가 번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안에 가도 다시 고민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종교는 결국 내적인 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나쁜 진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어떻게 봐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혼자서 어떤 깊이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재능도 인연도 따르는 일일 테니까요. 그러나 고민조차 없다면 남의 고민의 결과를 배울수도 없고 서로 고민을 나눌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화는 탄생되지 않습니다.
맺는 말
결국 광고가 내용을 압도하는 한국의 현실은 사람들이 멈춰서서 고민하는 일에 게으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 끝에서 공감대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아닌가 합니다. 너무 빨리 판단하고 너무 빨리 표면적인 일에만 매진하고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컨텐츠가 퍼져나가지 못하고, 그저 겉에 설탕만 잔뜩바른 것들이 유명세를 타고 번져나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저 우리자식 어떻게 하면 이번 수능 잘보게 하나만 고민하면 즉 더 큰 문맥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코앞의 일에만 자꾸 몰두하면 늘상 열심히는 하는데 인생은 괴로움뿐인 일이, 티끌모아 겨우 한그릇쯤 되는가 싶으면 한방에 싹다 날리고 마는 그런 일이 계속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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