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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표할까.

by 격암(강국진) 2012. 4. 13.

선거가 끝나고 왜 부자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를 할까와 같은 주제가 새삼 토론주제로 떠오른 모양이다. 부자정당으로 말해지는 새누리당은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로 버텨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지웅 (http://blog.ohmynews.com/litmus/176713) 을 포함한 몇몇 분들의 의견을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러한 한국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해 한번 써보기로 한다. 


나는 지금 한국을 바꿀수 있는 것,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자기자신으로 돌아가서 다시 우리로 돌아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척 추상적으로 들리겠지만 한줄로 쓰자면 이렇게 쓸수 밖에 없다. 이것이 소위 진보하는 길이고 선진국 되는 길이며 국민통합을 하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정확히 뭘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부자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하는 이유같은 주제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하는 것이 이글에서 내가 쓰고 싶은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과 쫄지마


허지웅은 그의 글에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나꼼수는 쫄지마라는 구호를 계속 던진다.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고 그것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변화처럼 대단한 일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허지웅이 쓴 것처럼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라는 사실을 느끼고 김어준이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이 쫄기 쉽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점들을 잘못이해하는 방식은 그것이 일부 사람들이 어리석거나 약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거나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우리 사회의 악으로 말해지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럼 어떤 것인가. 그건 이미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이름아래 잘 설명해 둔바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게 아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아래서 살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것이다.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것은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세계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을 가진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그렇지가 않다. 현실세계에 대한 부정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왕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더 좋은 왕을 뽑자고, 지금의 왕은 썩었다고 말하는 것은 패러다임의전환을 말할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진정 새로운 시각이란 좋은 왕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왕같은거 없이 살수 있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챈 시각인 것이다. 문제의 본질이 특정한 사람의 인격같은 것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그와 다른 시스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은 한가지를 명백하게 한다. 현실에 불만가졌다고 자칭 진보라고 말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떤 때는 현실에 대한 더할나위없는 긍정이다. 좋은 왕을 찾아헤매는 사람이 지금의 왕을 아무리 싫어해도 결국 왕정이라는 시스템의 강력한 옹호자인거나 마찬가지이듯이 현실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가 아니다. 진보는 헤겔의 정반합과 같은 변증법적 과정에서도 정에 대한 반이 아니라 합에 이르는 수준에 이르러야 진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지난 총선에서 야권의 문제중 하나는 단순한 정권심판 즉 반이명박, 반새누리당으로 현실의 부정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이점은 대안으로서의 진보라는 야권의 정체성을 매우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대안이란걸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진보로서 대안적인 삶에 대한 고민과 갈증이 심하지 않은 가운데 그저 현정부의 반대세력으로만 존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야당체질이라는 것이다. 즉 비판하고 현시스템에서 긴장도나 좀 올리고 도덕성유지에나 좀 도움이 되는 그역할에 그치는 것이다. 


진보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 관한 것이지 도덕적 결백증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도덕성이 높은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가 뭔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바로 위에서 말한 나쁜 왕을 좋은 왕으로 대체하려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인간도 100% 무결점으로 세상을 살수 없다. 문제는 어떤 행동은 가치있는 것이고 어떤 행동은 매우 나쁜 가치를 가진, 용서할수 없는 죄악 인가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현실에 대한 단순 부정만 강력해지면 오히려 대안이나 새로운 시각은 그로 인해 죽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선거에서도 새누리당은 반새누리당을 악으로 적으로 인식하고 이기자고 하고 야권은 새누리당과 이명박 정권을 악으로 적으로 인식하여 그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첫번째 덕목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세상을 흑백으로 갈라버린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라고 하거나 나는 정당이름따위와는 상관없이 인물중심으로 뽑겠다고 하거나 하면 당장 그사람은 배신자라는 딱지를 가지게 되기 쉽다. 전에도 이런 양쪽 진영이 존재했다. 나는 지금 이명박도 좋은 점이 있다와 같이 반 이명박이 옳지 않다고 물타기를 하는 적당한 중간을 말하는게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다만 반이명박은 대안이 아니라 그저 현실부정이며 그것은 충분치가 않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쫄지말라고 말한다. 시대가 변할때 쫄지말아야 할 대상은 새누리당이나 이명박 정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모든 악은 새누리당이나 이명박 정권이 만들어 내고 있다는 싸구려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 쫄지말아야 할 것은 낯설고 불확실한 삶이다. 그런 것이 불안해서 살던대로 관습적으로 하던대로 돌아가는 그런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시기에는 우리는 불확실성을 크게 느낀다. 많은 것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응당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래의 원칙이 달라진다. 그럴때 하던대로 관습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살던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그게 바로 쫀것이다. 쫄지말고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나침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안가본 미지의 세상으로 가야한다. 그게 바로 쫄지말라는 메세지의 진정한 의미다. 반 이명박이나 반 새누리가 중요한게 아니다. 


진보의 메세지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속에 품어야할 이 시대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나는 그걸 자신으로 돌아가서 우리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르네상스적 메세지고 근대적 메세지 과학의 메세지다. 우리 시스템이나 어떤 권위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어떨때 자신이 행복한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게 살자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자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학교와 직업을 결정하는가. 나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어떻게 말하면서 사는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관습과 권위에 의존해서 결정하지 않는가? 자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곰곰히 직접생각해 보고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그냥 남이 그렇게 하니까, 잘산다는 선진국에서, 미국에서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일본에서 그렇게 한다고 하니까, 아니면 그냥 전에도 쭉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런데 해방이후 반세기동안의 사회적 변화만해도 비교하기 불가능할정도로 크다. 세계가 혼란에 빠져있고 우리가 누굴 복사해서 성장할수 있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그럼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 바로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나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결국 우리로 돌아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파고들어서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를 묻고,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수가 있다. 그리고 나면 우리가 생각하던 나라는 게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나의 가족과 뗄수 없이 이어져있다. 생명으로서의 나란 애초에 환경이라 말해지는 내 주변과 확고한 경계선을 가지고 구분되는게 아니다. 내가 나의 가족과 이어져있고 지역사회와 이어져있으며 한국 공동체와 이어져있고 세계와 이어져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우리는 결국 나에게로 돌아가서 그안에서 다시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자기로 돌아가서 우리로 돌아와야 우리는 이 사회의 여러가지의 것들에 대한 의미, 이웃과 가족의 의미,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무슨 신자유주의니 FTA니 하는 커다란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 우리 가족, 우리 직장, 우리 동네, 우리 이웃에 대해 얼마나 신경쓰면서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는가를 신경써야 할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모든게 삼성을 위한 것이거나 노후자금 10억모으기를 위한 것이거나 한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수단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 있는 수없이 많은 권위주의는 무너질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쫄지마라는 구호와 함께 씨바라는 구호로 탈권위주의를 강조하는 나꼼수는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고 따라서 커다란 호응을 받을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를 단순히 허무는 것은 대안이 아니다. 거기에는 개개인의 삶에서 우리 사회전체의 삶에 의미를 줄수 있는 이야기구조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개인의 수양에서 시작되어 공동체에 눈뜨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 이젠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가? 언젠가는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어떤 장미빛 약속을 쫒아서 분주하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떨때 정말 행복할수 있는가를 질문던지고 그 답에 따라 각자의 삶을 사는게 옳지 않은가? 


25년전만해도 한국대학사회에서는 지금보다도 더 큰 구호가 더 많이 굴러다녔다. 그래서 남녀가 쌍쌍파티를 하는 것은 퇴폐적인 행사로 여겨져 학생회가 반대할 정도였고 많은 사람들이 걸핏하면 민족이나 국가같은 거대한 단어를 많이 썼다. 지금의 한국은 그렇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 특히 나이든 계층은 자기 자신이 없다. 자기 자신이 없기에 그들은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는 새누리당에게 매여있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새로운 세대들에게 이런것이 새로운 삶을 사는 거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야당이 아니다. 그게 바로 안철수고 박원순이며 시골의사고 법륜스님인 것이다. 그러나 인기없는 자칭 타칭 진보나 야권인사들은 그들과 종종 겉돈다. 심지어 나꼼수를 부흥회운운하면서 비하한다. 낡은 계급의식운운하면서 그런 걸로 진보를 자처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도덕성에 대한 결백증이나 노선에 대한 순혈주의가 진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맺는 말


우리가 직업을 잃으면 종종 우울증을 겪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의미가 직업이라는 것에 기반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직위가 아니지만 오랜간 나와 함께 있었던 직장의 위치를 잃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미를 잃고 우울증에 빠져들기 쉽다. 


나에게 돌아가서 우리로 돌아가는 것은 그렇게 해서 나와 우리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대개 여태까지 있었던 어떤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람은 빵만을 위해 살지 않고 의미와 가치, 신뢰와 믿음을 위해 산다. 왕조에서 살던 백성은 대개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말에 기쁨의 탄성을 지르기 보다는 불안해 한다. 당신이 평생 사기꾼 같은 은행과 거래해 왔다고 하자. 그 은행은 사기꾼처럼 불공평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당신은 그 은행과 평생거래해왔고 그나마 가진 것이 전부 거기에 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은행 전부 문닫게 하자고 하면 그러자고 할것인가. 


과거의 시스템에서만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시스템에 불만이 있어도 그 시스템을 버릴수가 없다. 그가 자기 인생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수 있는 기회가 있을때만이 그는 변화하고 새로운 삶을 살수가 있다. 진보는 노인들의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방법을 제시하는가. 어떻게 노인은 행복할 수가 있는지 답하고 있는가. 적어도 각자의 이익에 충실한 계급투표를 하자 운운하는 소리가 그런 일을 해낼수 있을리가 없다. 


정치판에서 우리는 종종 몰상식한 정치인들을 보게 된다. 그들도 물론 어떤 기능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부끄럼을 모르는 범죄자들이거나 상식이 없는 인간인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우리가 부속품으로서의 인간의 기능에만 주목할뿐 자기 성찰과 공동체에서의 의미찾기의 과정같은 것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여러가지 잡범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경제를 잘안다고 하면 선거에서 당선되고 그러는거 아닐까.


선거는 누가 이기던 사회적으로 국민들이 새로운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대선이 남았으니 세상을 좀더 좋은 곳으로 만들수 있는 더 좋은 메세지들이 더 많이 퍼질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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