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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한국과 개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

by 격암(강국진) 2012. 5. 22.

2012.5.22

 

한국의 미래는 일본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뭘 걱정해야 할것인가라는 글을 써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한국과 일본은 이런 저런 점이 다르다라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지적은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지적을 통해 한국이 미래에 일본처럼 변할 것이라던가 일본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던가 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에는 만족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포퍼는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었습니다만 저는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마치 무슨 동역학 방정식 풀듯이 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용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은 무의식중에 어떤 변화의 법칙을 상정하고 말로 그렇게 표현하며 경제학이나 수학을 전공한 분들은 조금 더 정량적으로 그걸 표현하지만 결국 표현을 어떻게 하건 그런 시각에는 지금의 x,y,z 변수의 값은 이러저러하니까 미래의 x,y,z 변수의 값은 이러저러하다라는 주장이 깔려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국가 부채가 이만큼이니까 라던가 프랑스의 인구대비 외국인 고용률이 이러하니까 하는 식으로 말한 후 비슷한 경우에 이러저러하게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난번 세계대공황직전에 이런 저런 부채비율이 있었다라는 숫자를 읽으면서 이 숫자가 이러저러해 지면 공황이 시작된다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언과 경고의 차이 

 

여기에 대해서는 조심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불조심을 합시다라는 주장과 같습니다. 겨울철에 강우량이 적어서 숲이 마르면 산불이 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불조심을 합시다라는 주장은 필요한 것이며 옳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한국의 미래는 일본이라는 말을 할 때는 한국은 일본사회처럼 될거라는 예언이나 주장을 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기 쉬우니 조심하라는 뜻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심하라는 경고와 예언의 차이를 너무 쉽게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책을 안 읽은 사람은 물론 책을 읽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을 하면 사람들은 종종 그럼 그런 일은 안 일어나겠네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숲이 마른다고 반드시 산불이 난다고 예측할 수 없다라고 하면 불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래는 너무 뻔한 것으로 이러저러하므로 반드시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해버립니다. 즉 숲이 말랐으니 반드시 산불이 난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또 미래가 예측불가능하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산불의 예측은 현실적 미래예측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와 미래사이에는 산불이 난다 안난다같은 극적인 차이를 보이는 사건이 한 개만 있는게 아니라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잘치는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가 훌룡한 피아니스트가 될까요라고 묻는다면 이 아이가 성장기를 거치면서 생길 수 있는 무수한 극적인 변화에 대해 답을 다 아냐고 묻는 것이 됩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고 어떤 연인을 만나고 어떤 스승을 만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크는 도중에 음악따위는 지긋지긋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즉 산불이 난다 안난다같은 격변이 한번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수없이 많은 비선형적 사건들때문에 미래는 예측 불가하다는 말로 할 수 있겠습니다. 아래에도 말하겠지만 결국 아이의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가 뭘 의지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의지의 중요성

 

그렇다면 정말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라는 메세지로 충분한 걸까요 아니면 역시 미래는 예측할수 있는것일까요. 뭐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일까요. 미래가 예측불가능하다면 뭐하려 경고도 하는 것일까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봅시다. 한국의 미래는 지금의 한국이 보여주는 어떤 수치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해방직후의 한국사회에 대한 수치를 보고 지금의 한국경제발전을 예언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수치몇개 나열하면서 우리의 미래는 어디와 다르다던가 같다던가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노벨상수상자들 다 모여도 당장 다음달 주가도 예측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미래가 무작위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는 결국 한국이라는 곳을 움직여나가는 주체의 의지에 크게 의존합니다. 한국이란 바윗돌같은 무생명체에 가깝다기 보다는 생명이 있는 유기체에 가까우며 유기체는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보존하고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누가 한국을 움직여가는가 그들의 의지는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상당부분 그것들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만약 그 주체가 일본사회처럼 되는 것을 원하고 그렇게 의지한다면 모든 외적 내적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가 한국사회의 미래가 될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누가 조종하고있습니까. 누구의 의지가 한국사회를 움직여 갑니까. 시장의 의지입니까? 한국이 정말 자유시장이 맞습니까? 세상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의지에 따라 움직입니다. 경고는 미래를 만들어 내는 법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로 미래를 만들어 낼 의지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이런 미래가 좋냐고.

 

한국 사회는 너무 작고 그나마 정신분열증적인 증세를 보이는 사회입니다. 사회적 정체성이 약합니다. 조선은 망했으며 해방은 남의 힘에 의지해서 했습니다. 적어도 온전히 우리힘으로만 한것은 아니죠. 해방이후에도 -미국이 아무리 존경할만한 대단한 나라라고 하고 한국에 대해 좋은 일을 많이했다고 해도- 미국에 의해 교육받은 지식인으로 가득채워지거나 여전히 일본적인 미덕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한국은 스스로 성장하기 보다는 외부에 의해 키워진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해방직후 너무나 가난했을 때에는 어쩌면 국민통합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구호하나면 한국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21세기의 지금에 이르르면 과연 '우리'라는 게 뭔지, 그것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 애매합니다. 한국안에는 인구 5천만이 안되는 나라에서 외국인 천만명을 들여오는 것을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대다수의 한국인이란 석유나 목재같은 자원처럼 보일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미래를 의지할 주체가 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빈부격차같은 문제들은 그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합니다. 한국사회가 국민통합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어떤 식으로건 한국사회 구성원 전체의 고통이 줄어드는 쪽으로 의지를 행사하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 한국이라는 몸의 어느 한 쪽은 그냥 잘라내어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군더더기로 인식될것입니다. 

 

본질적인 의지

 

한국 대신에 개인을 집어넣어도 미래는 마찬가지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경우에도 이 의지라는것에 대해 너무 통속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많은 것들을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어제가 그제와 다릅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외적 내적 자극에 따라 혼동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 매순간 변해가는 의지가 미래를 만들어 낼리가 없습니다. 미래를 결정하는 의지는 그보다 더 깊이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어린시절에 무시당하고 컷던 것이 너무나 서러웠던 나머지 높은 자리에 올라서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도 강하게 자리잡았을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고 싶은 욕망이 변하지 않고 모든 것의 뒤에 있을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소년은 다른 많은 것도 원하지만은 결국은 한발한발 권력을 탐하는 자리로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따스한 가족안에서 웃으며 사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며 그것이 행복의 결정적 조건이라고 믿는 소녀가 있습니다. 이 소녀는 가진 것에 따라 재능에 따라 이런 저런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만 결국은 한발한발 작지만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는 쪽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대신에 국가도 이런 원천적 의지나 욕망을 가지는가는 각자 믿기 나름이겠지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 국가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것들을 이상향으로 만듭니다. 미국의 경우는 풍요와 자유가 계속해서 미덕으로만 말해집니다.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롭게가 사회적 욕망으로 작동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좋은 덕목이지만 세상에는 그림자없는 관념이란 없습니다. 그런 덕목들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냈지만 그런 덕목들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생길수 있는 어두운 부분이 미국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결국 미국의 의지가 미국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어떤 의지가 있으며 그 의지가 정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분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꿈도 못꾸고 있는 것이 현실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이밥에 고깃국먹는 게 꿈이라고 한다면서 비웃지만 실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남한에서의 꿈도 그 정도 수준에서 별로 더 나간게 없습니다. 이밥에 고깃국이 뭐냐고 나는 10억짜리 강남아파트에 BMW를 꿈꾼다면서 비웃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공허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

 

대선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선같은 국가적 행사야 말로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것을 꿈꿔야 하는가를 토론할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이것을 허비하고 맙니다. 말도안되는 공약을 날려서 세금 펑펑쓰면 다들 행복해 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에서 멈추고 맙니다. 

 

예를 들어 교육에 대해서 더 좋은 빌딩과 더 학력좋은 선생들을 투입하면 정말 좋은 교육이 되는걸까요? 어른들은 결국 자신의 꿈에 대해 가르칠 뿐입니다. 해방직후의 빈민국에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는 탐욕이 아니라 비참한 상태에 있는 한국사람들을 구원해 보자는 공공의 목표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꿈이라고는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밖에 없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겠습니까. 짝이 굶더라도 도시락 나눠주지말라는 정신? 비싼 옷입지 못하는 애들은 비웃고 놀려주라는 정신? 그런 아이들이 커서 세계적인 학자가 되고 정치가가 되고 엔지니어, 사업가가 될거라고 믿을 수는 없지요. 

 

한국도 우리도 자신이 스스로 되고 싶고 의지하는 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한국안에도 우리 안에도 과연 의지의 주체가 될 나가 존재하는것인지 그게 뭘 의지하고있는지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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