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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왕따, 아이들 그리고 불편한 진실

by 격암(강국진) 2012. 6. 4.

오늘도 대구에서 투신자살 기사가 났다. 지난해 12월 대구 수성구의 중학생이 자살을 한후 6개월사이에 대구에서 자살한 중고교생이 8명이고 자살시도까지 합치면 10명이라고 한다. 자살의 이유는 왕따였다. 몇년간에 걸쳐 돈을 뺏기고 폭행당하고 모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한 학생의 선택이었다. 


자살을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할것이고 또 사람마다 다를것이지만 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주제는 과연 우리가 중고등학생들을 아이로 봐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왕따문제뿐만 아니라 학생인권이라던가 체벌에 대한 논쟁에도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문제이며 기본적으로는 정답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택의 문제다. 전에도 이미 한말이긴 하지만 기사를 본김에 다시 한번 간단히 언급하고 싶다.  


나는 한국의 왕따아이들이 자살하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한다. 


한국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이인지 어른인지 모르는 정체성 분열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를 아이로 볼것인가 어른으로 볼것인가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제의 학생은 몇년간에 걸쳐 지속적인 폭행을 당하고 금품을 갈취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어른들의 세계 예를 들어 직장생활속에서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럴리가 없다. 어느 직장에서 동료를 지속적으로 폭행하는데 퇴사를 안시키는가. 경찰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 대개의 상식적인 상황일 것이다. 있을수 있는 아주 사회의 어두운 부분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한가. 그 답도 우리는 뻔히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을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어른과 구별하고 어른과는 다른 잦대를 가져다대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심지어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기마련 이라는 식으로 아이들사이에서의 폭력에 대해서는 장난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인식은 학생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구분할수 없이 붙어버릴때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실제로 어린 학생들이 친구를 매춘을 시키는 현실이 기사에 가끔 나기도 하면서 지금 우리가 그저 어린 아이일뿐 운운하는 학생들의 범죄행태가 어른의 그것과 아무차이가 없다는 것을, 심지어는 더 심해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는가?


어른과 아이는 존재하는가


이미 미국에서는 영상 매체의 발달이 어린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라는 구분의 벽을 없앤다는 주장이 수십년전에 나온바 있다.  닐포스트만은 유년기의 실종이라는 책에서 실은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라는 것이 오히려 활자매체가 대중화되면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책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즉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무식했던 시절에는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강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이미 글을 읽고 쓸수 있는 어른과 학교에서 그것을 배우고 있거나 그러기전인 아이들간의 문화적 차이가 커지면서 어른과 아이라는 구별이 생겼다. 구별이 존재하게 되자 어른들은 아이앞에서 어른처럼 행동할것을 요구당한다. 물론 아이는 항상 아이로 취급되는 일이 생겼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7766). 


그런데 영상매체가 등장하자 아이들은 이제 어려운 글을 읽지 않고 어려운 신문을 읽지 못해도 세상에 대해 알게 되고 문화적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같은 어른, 어른같은 아이를 만들어 내고 어른과 아이의 구별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든다. 


게다가 21세기의 한국에는 이런 TV매체의 영향을 훨씬 넘어서는 강력한 무기가 두개나 있다. 그 하나는 한글이고 또하나는 인터넷이다. 일본어는 사실 한글보다 훨씬 어렵다. 사실 한글처럼 쉬운 글자는 세상어디에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때문에 한국의 아이들은 훨씬 더 어른 세계에 가까이 와있다. 


예를 들어 일본 초등학생의 경우는 한자같은 것때문에 인터넷에 접속해도 어른들의 세계에 바로 접속하지 않는다. 일본의 아이들도 물론 말썽장이가 있고 모범생이 있지만 일본의 학생들에 비하면 한국의 학생들은 훨씬 일찍부터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와같은 것은 물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훨씬 일찍부터 아이를 아이로 취급하지않는 민주적인 풍토가 존재한다. 일단 영어라는 언어자체가 매우 민주적이며 문화도 민주적이다. 아이를 아이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른처럼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되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폭행이나 절도 컨닝, 숙제베끼기 같은 것에 대한 인식이 한국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미국이라고 해서 차이가 전혀 없을수는 없지만 그 근간이 되는 것은 학생도 어른처럼 대우받는 대신 문제를 일으키면 거의 어른처럼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규칙이 엉망이 된 한국


한국은 언제까지 이렇게 규칙이 엉망인채로 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학생들은 어른인가 아이인가. 이 선택은 어른들은 물론 학생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인권을 말한다. 그것은 물론 당연한 권리지만 그 인권에 대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의무가 따라온다는 것을 한국학생들이 얼마나 자각하는지 나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예를들어 이렇게 생각해보자. 복지회관에서 어른들이 듣는 수업이 있다. 거기서 어른들이 수업을 듣는데 강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심지어 강사를 놀려대는 어른들이 있다고 하자. 어떻게 될것같은가? 전부 퇴학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게 어른들의 세계다.


요즘 날이면 날마다 학교에서 교권이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생들은 수십명이나 되는 아이들 앞에서 놀림감이 되곤하며 아무런 지도도 할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가 자꾸 터져나온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아이들이 어른이 된 상황에서 어른들은 그들을 아이로 다루려고 하며 사회적 통념이 그것을 용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아이들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부모들이 그것을 더욱 부추키는 가운데 교육시스템은 교실이라는 공간안을 선생님이 장악하는 것은 그저 선생님의 임무라고만 말한다. 잘못을 저질러도 학생을 처벌하는 행위는 학교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록으로 남고 그 교육기관의 평판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쁜 일이 벌어져도 자꾸 화해해라 하지마라 하는 식으로 말로 때우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선생님은 나는 이제 어른이니 내맘대로 하겠다는 학생을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처벌하지 않고 조절하는 신기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 


많은 아이들은 어떤 때는 스스로를 아이들로 안다. 그들이 절도를 하건 폭행을 하건 거짓말을하건 욕을 하고 남을 놀리건 그들은 아이들이므로 다른 잣대가 적용되며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대부분은 또 다른 상황에서는 그들이 어른과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어른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이 가지는 사고방식의 비일관성에 대해 자각이 없거나 무시한다. 


무능한 어른들의 잘난체


나는 이제까지는 아이를 아이로 취급해야 하는가 어른으로 취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일단 정답의 문제라기 보다는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해왔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라는 것이다. 규칙과 의무가 일관적이면 기회주의자들이 날뛰는 난장판으로 변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수가 있는데 한국은 일단 그 일관성이 상실되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점을 전제하고 나서 어른들이 어른들의 무능을 인정하고 한국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인권을 인정하고 더 높게 평가하는 사회로 갈수밖에 없지않나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학생들의 의무역시 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어른으로 대접받기 원하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그들은 어른의 책임도 져야 할것이다. 아이들싸움운운하는 봐주기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


사실 권력은 상당부분이 아나면 전부가 정보에서 나온다. 이건 어른들 세상도 마찬가지다. 누가 권력을 가지는가 바로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며 고용인은 그들만큼 정보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이 없는 것이다. 이때문에 예로부터 군주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을 모두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군주론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어른들이 학생들앞에서 잘난체를 해봐야 그게 안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어른들몰래 배우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을 아이들 취급하려고 하는 어른들의 행위는 종종 얇팍한 속임수정도로 이해되고 만다. 


공부는 왜하는가. 선생님은 학교에 왜 다니는가. 왜 학생들은 이러저러한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이미 학생들은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 바라는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이 가질 답과는 다른 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우리는 왜 왕조를 유지하지 않고 공화국을 하고 민주주의를 하는가. 이 세상이 정보가 널리퍼져서 왕이 백성들을 아이들취급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왕조에서는 모든 정보는 왕이 독점하고 백성에게는 그저 적당한 설명을 준다. 백성이 너무 많이 알면 위험하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런 이야기가 나돈다. 그러나 기술적 환경이 달라지자 이런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국민의 권한을 인정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면 사회적 안정을 지킬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요즘의 환경에서 보면 학생들을 아이들로 취급하기보다는 어른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의무를 지게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적 문화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같다. 심지어 어른사회도 권위가 넘쳐서 어른이 다른 어른을 아이들취급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사람들은 정보를 독점하려고 하고 불투명한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제대로 된 설명보다는 아이들 달래듯 엉터리 답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문화가 학생과 어른이라는 경계선에서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지체시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장에게 아이취급을 받는 교사가 학생을 어른취급해주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사회적 민주화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이미 아이들취급하고 안심시키기에는 너무 많은것을 보고 듣는다. 그런데도 계속 사회적 통념은 그들을 아이의 자리에 남게 하려고 하고 어른들은 그게 잘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에서 고개를 돌린다. 문제는 알맹이 없는 권위인것이다. 


그리고 그때 피해자들은 만들어 지는 것이다. 당연히 죽은 아이들만 피해자가 아니다. 한국 교육전부가 피해자다. 내 아들 딸만 지키겠다고 학교와 선생을 닥달한다고 해결될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민주적인 규칙의 권한뿐만 아니라 의무까지 제대로 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맺는 말


어른들도 다 똑같은 사람들은 아니다. 따라서 학생과 어른간의 경계가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말이 학생들이 어른들에게 배울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눌수 없는것을 나누려고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어른들을 불신하게 되고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데도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같다. 이런 불행을 한시바삐 제거해야 할것이다. 


또 개혁이 느리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당장 선생도 학생도 모두 일관성에 대한 고민만 하더라도 현실은 많이 좋아질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권한을 주장할때와 의무를 지켜야 할때 자신에 대해서 다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우리사회에는 남이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날마다 반복된다. 좋은 규칙보다 나쁜 건 나쁜규칙이고 나쁜 규칙보다 더 나쁜 건 규칙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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