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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언론에 대한 글

보이기 위한 언론, 보기 위한 언론

by 격암(강국진) 2012. 5. 8.

2012.5.8

세상일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지만 블로그를 구분하는 방법에는 보이기 위한 블로그와 보기 위한 블로그가 있다고 본다. 보이기 위한 블로그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블로그이며 다시말해 남을 위한 블로그이지만 보기 위한 블로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게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블로그다. 보기 위한 블로그는 어떤 의미로 조금 격식을 갖춘 일기나 생활의 기록일 수 있고 조금 더 격식을 갖춘다면 자기가 쓰는 책, 자기의 문집으로 특별히 누군가의 평가를 받기 이전에 스스로가 다시 읽고 스스로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자료를 남기는 공간이다. 개인이 아니라면 가족이거나 친구모임이거나 하는 작은 집단을 위한 것일 때도 있다. 

 

나는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오늘날의 언론을 보면 생각할 것이 있지 않나 하고 느낀다. 한국에는 좋은 언론이 없어보인다. 나꼼수가 굉장한 인기를 누린다는 것은 뒤짚어보면 그런 정보채널을 위한 수요는 있는데 그것이 기성언론에 의해 외면당해왔다는 이야기다. 나는 나꼼수를 최선의 언론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꼼수의 예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이 있다. 

 

보이기 위한 언론, 보기 위한 언론

 

언뜻 생각해 보면 보기 위한 언론이나 보기 위한 블로그는 그저 자기 혼자 쓰고 읽으니 가치가 없어보이며 특히 뭔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더많은 독자층을 확보해야 하니 좋은 것은 보이기 위한 언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보이기 위한 블로그, 보이기 위한 언론이란 사실 초라하고 힘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바람부는 대로 흔들리는 세상의 시류에 따라 남들이 들어줄 것 같은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일관성이 없고 무엇보다 자기나름의 가치판단이 없으며 조금만 심하면 -지금 많은 언론사가 그렇듯이- 그저 자극이 심한 것만 추구하는 선데이 서울류의 황색언론이 된다. 

 

야한 이야기 나온다고 저질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글을 쓰고, 그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자신이 스스로 그런 자료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점이다. 스스로 음악은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음악DJ를 한다고 하자. 과연 이 사람이 최대한 고객중심으로 음악을 틀려고 한다고 해서 장기적으로 좋은 음악DJ가 될수 있을까? 당장은 인기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을 쓰고 모으다보면 자신의 색깔이 드러나고 그럴 때 누구나 인정해 줄 수 있는 블로그가 되고 언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색깔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기전에 망할지도 모르니 중간타협이 필요할 수 있지만 내가 여기서 잠정적으로 말하는 결론은 적당히 타협하자가 아니다. 결국 자기가 없는 언론, 자기가 없는 블로그는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색깔 찾다가 망할 수도 있지만 그럼 어떤가. 이 세상에 나 혼자는 본다. 나는 그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러한 견해가 매우 비현실적이며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가? 그러나 이런 견해를 극단적으로 보는 그런 시각이 바로 언론을 망친다. 우선 한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나꼼수와 다른 언론의 차이말이다. 나꼼수도 물론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신들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반대를 강조하고 스스로 자꾸 반복한다. 즉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듣기 싫으면 듣지 말라는 것이다. 제발 들어주세요라고 안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건 내 의견이라고 말하고 진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무슨 책이나 학자이름으로 남의 권위에 크게 기대지도 않는다.  내 의견의 책임은 내가 진다는 태도다. 이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인격, 성격이 없는 언론

 

리영희 선생은 기자로써 진실보도를 자신의 좌우명처럼 강조했으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지금도 트위터 같은 곳에서는 작은 리영희가 되겠다는 기자며 시민들이 많다. 그들에 따르면 이 세상이 뒤틀어져 있는 이유는 상당수 진실이 보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을 밝히면 그 진실이 좋은 언론을 만들어 주고 좋은 세상을 만든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하게 들리는 이러한 견해는 사실 매우 낡고 낡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역사란 사실의 기록이라고 주장하던 아주 옛날의 초보적인 역사에 대한 견해처럼 들린다. 지금은 누구나 역사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적극적 해석의 결과라는 주장에 익숙하다. 즉 역사의 해석은 그 해석을 하는 주체의 가치판단이 빠질수 없는 필수 요소다. 주체없는 역사해석이란 무미건조하고 의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언론이란 세상에 대한 투명한 거울이라는 주장은 그렇게 철떡같이 믿는가? 주체없는 현실인식이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물리학같은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이것이 가능한가. 인간의 마음이나 경제학을 쉬뢰딩거 방정식풀어서 전개할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심지어 과학에서도 주체가 없는게 문제라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라도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로, 과거 독재정권때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단순한 언론관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했다는 것이다. 세계의 수준에 비해 한국의 사회적 수준이 말도 못하게 뒤떨어질 때 진실이나 답은 분명해 보인다. 그 진실과 답을 폭로하고 실천할 용기만 있으면 충분해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분야의 발전도 그렇다. 후진국에서 과학발전을 위해 뭘 해야하는가는 비교적 분명하다. 기본적 교육과 기본적 시설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답을 아니까 그걸 실천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돈만 구하면 된다. 

 

그러나 한국사회도 그런 말도 안되는 수준은 벗어났다. 선진국이 되었거나 그 수준에 근접해 있다. 뭔가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뭔가가 정말 용서못할 짓인가 아니면 별거 아닌가가 복잡한 판단이 필요로 한다. 그렇게 되면 과학분야가 그러하듯이 세상에 대한 정답같은 것이 있으니 진실을 폭로하면 세상이 좋아진다라는 식의 단순한 견해는 도움이 안된다. 도움이 안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래에서 말할 것처럼 대개는 방해가 된다. 

 

언론의 역할에 대한 착각이 일어나는 두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맹신자이며 스스로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데올로기, 세상에 대한 어떤 설명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믿는 사람일수록 이 세상이 단순해 보인다. 단순하니까 어떤 팩트들, 숫자들을 죽 나열하고 사람들이 그걸 죽 들으면 세상이 좋아질텐데 사람들이 어리석거나 게으르거나 탐욕스러워서 세상이 엉망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불교신자에게 성경구절 하나 읽어주고 당장 신자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욕하는 몇몇 몰상식한 기독교신자같달까. 

 

진중권을 포함한 진보, 좌파세력과 나꼼수의 불화는 사실 좀 심각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 언론이란 진실을 폭로하는 단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은 이념적이다. 이념적인 사람들은 인격, 성격을 가진 언론창구를 사이비 언론 혹은 부흥회 운운하면서 비판하게 된다. 

 

그들은 조중동과 나꼼수는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그들이 보기에 세상이 조중동때문에 나빠진다는 것을 인정해도 그 이유는 조중동이 나쁜 인격을 가진 언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중동이 진실보도를 안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중동과 나꼼수의 인격적 차이 운운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완전히 무감각하며 비웃기 까지 한다. 이것은 그들이 부정할지 모르나 많은 이념적인 인간들이 노무현과 이명박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과도 이어져있다. 이것은 왜 한겨례와 경향이 흐지부지하게 한가한 중립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 조중동에게 끌려다니는가와도 이어져있다. 

 

이 모든 것이 언론이란 사실을 보도하는 창구다라는 명제를 얼마나 믿는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자칭 좌파 대부분이 이것을 믿는 것같다. 언론이 성격, 인격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발전된 사회에서 그런 언론은 무능하다. 이것이 한겨례와 경향이 별다른 영향력이 없고 몇사람이 만드는 나꼼수가 더 영향력이 큰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이것은 나아가 심지어 진보는 무능하다는 세간의 시각과도 연결된다. 요즘 트위터 공간에서 잘나가는 사람들 이외수 박원순 안철수들이 모두 이념적 진보처럼 보이나? 그들은 그럼 통상말하는 우파인가? 

 

이렇게 볼때 이것은 언론과 관련된 근원적 문제중의 하나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당면과제 일수 있다. 

 

또다른 근원적 문제의 존재

 

이야기를 잠깐 돌려보자. 우리 사회를 보면 한국사람들은 대개 중앙정부 이야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낀다. 즉 제주도 사람도 경상도 사람도 강원도 사람도 전라도 사람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대개 정부가 나라가 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또 외국이야기도 자주하는데 한국에서 문제생겨도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 이야기 많이하고 고종이 헤이그밀사보내듯 외국에 한국의 문제를 호소하려는 경향도 많다. 즉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며 거기에는 거의 경계가 없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은 흔히 언론을 전국민을 향한 혹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확성기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내 목소리를 전체국민들에게 퍼뜨리기 위한 확성기다. 이런 견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폭력적이다. 말을 들으려고 하기 보다는 말을 퍼뜨리려고 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말을 들으라고 강제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경계가 없는 불특정다수가 왜 내 말을 들어야 하겠는가. 그들과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나는 그 관계에 대해 신경이나 쓰고 있는가? 그저 우리는 인류애나 진실로 묶여있다고 하면 충분한가? 

 

이런 경향은 적어도 한가지 문제를 만든다. 바로 언론장악이다. 사람들이 KBS, MBC를 핵무기나 미사일같은 무기로 즉 강력한 확성기로 생각하면 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언론장악을 시도하게 된다. 나는 주요방송을 지켜려는 작금의 여러 행동들을 의미없다고 말하지 않으며 정부의 언론장악을 나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현실속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부동산 투기판이 벌어져서 강남의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하자. 이럴때 우리는 강남의 무슨 주상복합아파트의 소유가 특정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그들만 부동산 상승의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과 만날 수 있다. 즉 부동산 상승의 이익은 되도록 공평히 분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둘째치고 더 큰 그림을 보면 이런 주장은 문제의 근원은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문제의 근원은 부동산 버블을 막는 것이지 강남아파트의 소유를 공평하게 하는게 아니다. 강남아파트가 부당하게 특정인들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분명 당면한 과제일수는 있으나 부동산 버블이라는 근원적 문제가 계속되면 강남아파트는 더 큰 탐욕의 대상이 되고 따라서 더 추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지는 것이다. 

 

언론에 관련된 두번째 근원적 문제는 바로 공동체의 실종이다.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나는 듣는다. 내 가족이 소식을 전하면 나는 듣는다. 이런 정보는 불특정 다수에게서 날아온 정의나 진실에 대한 것 이전에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소식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듣는 것이 아니라 주로 말하기 위한 확성기로 생각되어지는 주요이유는 거기에 애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정보채널이 서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할때 언론은 말하기 위한 확성기 이상의 역할을 하며 내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존재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광고전단지가 될뿐이다. 그리고 애정의 실종은 바로 공동체의 부재라는 현실과 연관되어 있다. 

 

이와 관련되어 한가지를 지적할수가 있겠다. 성격과 인격을 가진 언론은 독자층이 보다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게 만들고 따라서 독자층이 서로 애착을 가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짚으면 소위 진보니 좌파니 하는 사람들이 냉철한 지성운운하면서 분위기 썰렁하게 만드는 그 행동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큰 방해가 된다는 이야기다. 논리 좋아하지만 엉성한 논리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분위기를 깬다. 그들은 바로 그 '부흥회' 분위기를 못견뎌하며 그것을 세상의 악의 근원으로 느낀다. 그들은 탐욕과 사랑을 구분못한다. 

 

자기 세계를 가진 언론, 성격을 가진 언론이 나와야 그 창구를 통해 소통하는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국가적 공동체의 정체성이 점점 더 약화되기만 하는 가운데 언론들이 자기 색깔없이 그저 전체만 보려고 한다. 5명도 행복하게 못만드는 사람이 5천만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시끄럽다. 

 

조중동은 확실히 상위 1%의 부자 공동체를 위한 언론일지 모른다. 문제는 조중동이 그렇다는게 아니다. 문제는 99%가 그 1%에 낄려고만 하는가 다른 99%끼리 애정을 가지는가의 문제다. 다른 99%끼리 애정을 가지면 오히려 1%가 왕따가 된다. 그들이 스스로 우리도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 끼워달라고 할것이다. 그런데 다들 자기가 그 1%에 끼려고 하면서 다른 99%에 대한 애정의 소중함은 종종 무시하면서 1%만을 위한 언론이 나쁘다고 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논리가 아니라 애정이고 행복하기 위해 뭐가 필요하다고 믿는가, 어떤 생활양식이 가치있는가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맺는 말

 

진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은 세상온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들이 어울려서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자신들이 추악하고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면서 내가 한방에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 방법에 대해 잘알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자기가 보기 위한 블로그나 언론은 자기의 세상이다. 자기의 세상이란게 있으면 그게 초라하더라도 사람들은 아 저사람은 저런 세상에 사는구나하고 보고 느낄 수가 있다. 우리는 잡놈이라면서 좌충우돌하고 자기를 비웃기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방송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의 세상이란 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저 세상이 완벽은 안해도 나름 합리적이고 따뜻하네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거기에 끼면 행복할 것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에게 보이기 위한 블로그나 언론은 그렇지 않다. 자기의 세상이란게 없으니 설혹 잠깐 좋아보여도 곰곰히 보면 깊이가 없고 고민이 없다. 그냥 사탕발림이거나 공허하다. 지금의 언론들은 그런의미에서 대부분 다 공허하다. 나쁜 성격이라도 성격을 가진 것은 오히려 조중동이며 그렇기에 조중동을 다른 언론들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진보가 아름다운가? 내가 본 진보들은 내가 본 새누리당 지지자들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오해하지 말라. 나는 새누리당 싫어한다. 진보의 메세지는 아름답고 옳은 때가 많다. 그런데 새누리당 지지하는 사람들중에 남을 돕고 합리적이고 그런 사람은 없는것 같나? 반새누리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정치판에 가면 아름다운 모습들이 연출되나? 민주당도 그렇고 NL이니 뭐니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통합진보당도 그렇고 다른 어떤 당도 그렇다. 나는 이웃집에 그런 이웃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을때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다. 

 

나는 나꼼수 이상으로 인격있고 성격있는 언론이 나오고 그걸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실천하는 진보적 공동체가 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기를 바란다. 뭔가 확실한 자기 가치관을 보여주는 집단이 나오기를 바란다. 공동체나 언론이 안된다면 한명의 인간으로서라도 자기 세계를 아름답게 꾸민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냉철한 이성 좋아하는 몇몇 진보들은 사교집단 비슷한 교회나 나꼼수의 부흥회같은 분위기를 싫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들은 인간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으로 선택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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