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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언론에 대한 글

언론의 미래

by 격암(강국진) 2017. 5. 16.

2017.5.16

요즘은 소위 조중동보다 한경오에 대한 비판이 인터넷에서 더 뜨겁다. 조중동은 그렇다치고 한겨례나 경향, 오마이뉴스의 기사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대개 두가지다. 하나는 그 진보적 언론들이 실은 문재인에게 불리한 기사만을 내보냈다는 의구심이고 또하나는 독재자들에게는 굽신거리던 언론이 문대통령이 취임하자 갑자기 거만하게 군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언론과 대중의 싸움으로 이것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국민 모두가 문재인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문맥에서는 이것을 진보진영의 언론과 문재인 지지자와의 싸움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언론과 대중과의 싸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한 이유가 있다. 이 싸움은 단순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시대적인 조류가 만들어 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도대체 그들이 누구인가를 보자. 문재인의 지지자는 우리 사회의 소수파가 아니다. 게다가 통상 대선에서 2등을 한 홍준표보다 진보적 후보로 말해진다. 그렇다고 할 때 진보진영 언론과 문재인 지지자들간에 다툼이 있다는 것은 분명 일정정도 기괴한 일이다. 언론이라는 것이 물론 사과가게나 피자장사와는 다른 면이 있지만 극소수를 위한 언론이 아니라면 어떤 언론이 그 언론의 소비자가 되어줄 대중과 감정 싸움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연일 터져나오는 소란이 도대체 무슨 소란인가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은 더 깊어진다. 표면적으로 지금의 분란은 매우 사소한 일에 대한 것이다. 문재인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은 한마디로 독재자로 군림하지 않을 테니 이명박이나 박근혜때 대통령이 존중받던 것의 일부정도만이라도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문재인이 군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문재인의 지지자들은 참여정부당시 노무현대통령이 탈권위적으로 행동했더니 진보언론을 포함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철저히 무시하여 정부의 개혁동력마저 망가뜨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얼마전에는 언론들이 대통령이 왜 일회용컵을 안쓰냐, 대통령의 청와대생활비는 누가 내는가 같은 것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건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다. 탄핵정국의 끝에서 전임정권이 자신들이 일했던 기록을 모두 파쇄한 상황같이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언론은 정말 이래야 했을까? 뭔가 지나치게 한가한 관점 아닌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의 핵심은 언론이 뭘 잘했냐 못했냐 이전에 오늘날 언론은 어떤 형태를 가질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언론이 대중과 싸우는 것이 이상하다는 지적에 대해 물론 언론은 우리는 대중에 영합하지 않으며 오직 정의를 위해 싸울 뿐이다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정의를 위해 싸우는거 맞나? 왜 별 시답지 않은 것을 가지고 대중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나. 대중은 고객이 아니던가? 언론인은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그게 지금 비판의 핵심이다. 그것은 이정도로 자존심 세울 것같으면 이명박 박근혜 정권하에서는 살지도 못했을 것같은데 갑자기 자존심이 백배로 늘어났는가 하는 지적인 것이다.  자신의 소비자이기도 한 대중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언론은 도대체 정체성이 뭔가. 자신을 미개한 대중을 일깨우는 지식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솔직히 그게 맞지 않냐고? 그게 문제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정파적인 문제거나 이익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실은 대중은 그들 언론에게 있어서 고객이 아니라 계몽의 대상이거나 이득을 수확할 시장의 의미밖에는 없으며 그들 언론은 자신의 관심사와 광고주의 이익을 위해서만 뛰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지적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이 아니면 대중에게 자존심세우는 언론이란 기괴한 것이다. 영부인을 무슨 무슨 씨로 부르는 것은 의견의 문제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그런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이런 의견에 대해 분노하는 독자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독자에게 문빠들아 싸워보자라고 나오는 언론이란 황당하다.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건 이 언론사가 어떤 행위를 미래에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추측을 하게 만들며 문재인 정부가 개혁정부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언론사들이 개혁의 적이 될 것이라는 의심을 하는 것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소란을 더 뒤로 물러나서 보면 오늘날 언론이 처한 문제들이 보인다. 오늘날은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정보가 흐르는 채널이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을 만족시키는 언론사란 존재하기가 극히 힘들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모두 인정받을 수 있는 언론이 되려면 기자들이 상당한 능력과 자부심을 갖춰야 한다. 이 일을 해내는 것은 지금 하루가 다르게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오직 기자들만이 독점적인 정보를 가질 때는 기자가 권위를 세우기 쉬웠지만 온갖 종류의 정보가 쉽게 검색되는 시대에 기자란 몰매맞기 좋은 직업이다. 

 

이번 호칭 논쟁만 해도 손병관 오마이 기자는 이게 원래 그랬다고 말했다가 엄청난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고 말았다. 검색하면 바로 사실이 아닌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일회용 컵대신 텀블러 쓰라고 말했던 김주하앵커도  고급 외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진들로 비판받고 있다. 박근혜에게는 무슨 말을 했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의 기성 언론이 가진 형태는 어쩌면 멸종하는 동물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해야할 일은 박사급 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인데 보수는 편의점 알바보다 더 나쁜 상황과 비슷하다. 언론은 기본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컨텐츠를 팔아서 그 비용을 벌어들여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게 그랬던 적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광고비를 통해 광고주에게 기댄다는 뜻에서 한국언론은 광고지 사이에 기사를 쓰는 찌라시에 지나지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 상황은 앞에서 말한 이유로 더 나빠지고 있다. 

 

한국의 언론사가 모두 손석희처럼 대단히 존경받는 언론인들로 가득채워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말이 안된다. 오히려 기자의 문턱은 날로 낮아져왔다. 사실 조선일보기자같은 사람들에게 오마이뉴스 같은 건 한 때 언론취급도 못받았다. 조선일보기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나도 기자 운운하는 것에 대해 기분나빠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의 경계는 계속 허물어졌고 이제 우리가 꿈꾸는 국민 모두를 위한 언론같은 것은 존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언론은 그래서 양극화를 겪고 돌연변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 언론은 빈익빈 부익부할 수 밖에 없다. 즉 스타급 언론인들을 모아서 많은 투자끝에 많은 수익을 올리는 언론이 되던가 아니면 죽어가는 것이다. 조선일보같은 신문이 망하기가 쉬운데도 종편을 하는 이유가 이래서다. 종편을 해도 망하지만 안하면 더 확실히 망한다. 중앙일보가 세운 Jtbc는 손석희사장을 영입하고 지금은 지상파 못지 않다. 확실하게 대중에게 접근할 길을 열던가 아니면 망하는 것이다. 

 

언론의 돌연변이화란 한경오나 조중동같은 곳에서 말하는 언론의 기본전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언론들은 누구나 공식적으로는 자신들이 중립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중을 위한 언론이라기 보다는 그저 광고주에게 월급을 받는 신세일 뿐이다. 

 

파파이스같은 라디오 방송은 어떤가.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도 물론 광고를 한다. 그러나 기성언론과는 생존의 방식이 다르다. 기성언론은 어디까지나 광고가 먼저고 대중은 뒤에 있다. 광고가 끊기면 당장 망할 판이다. 그러나 새로운 변종 언론들은 자신의 편향성을 들어내는 대신 대중의 인기에 기대어 진행된다. 사실 컨텐츠를 팔아서 그것으로 유지되는 것이 진정한 언론이라면 새로운 변종언론들이 더 언론에 가깝다. 

 

변종언론이 가지는 장점은 그들은 비판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들은 딱딱한 보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찌질함을 그대로 노출하는 예능같은 방송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내가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척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들어내 놓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테니 나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내 방송을 들어달라고 할 뿐이다. 

 

한경오와 변종언론이 가지는 차이는 대중이 느끼기에 한경오도 찌질하고 편향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한경오는 자신이 안 그런척 하고 자신이 대중을 계몽하는 계몽주의자의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인기있는 팟캐스트 방송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허세를 그대로 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내가 이렇게 허술한 점이 있다라는 것을 노출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청취자와 같은 높이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우는 청취자와 싸워도 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반면에 한경오의 기자가 대중과 싸울 때 대중은 뭔가 역겹게 느낀다. 즉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이 대단한 척 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계몽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다. 한경오의 계몽주의적 태도는 이미 낡은 것이다. 한 때는 한경오가 시대를 앞서는 언론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워낙 빨리 변해서 이제 그들은 수익구조에 있어서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에 있어서건 시대에 뒤진 죽어가는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조중동처럼 종편을 만들 능력은 없다. 그러니 남은 것은 시대에 맞춰서 변화하던가 아니면 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때 그들은 점점 더 사회적 적폐세력이 될 것이다. 존재의 모순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한경오의 기자들의 수준은 날로 떨어지고 운영이 어려워서 점점 더 특정인들에게 휘둘리기 쉬워질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적폐세력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엄격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의 한경오를 적폐세력으로 부르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하지만 능력이 안되면서 어떤 자리를 고집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악의 출발이고 적폐의 시작이다. 한경오는 스스로를 대중을 교육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건 진보진영 모두에게 통하는 말이다. 자신들만이 진리와 정의를 알고 있고 대중은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에 뒤진 것이다. 어떤 이론도 사회전체를 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 보편적 진리는 낡거나 희귀한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도 자신만이 특별하며 자신이 사회적 지도자나 계몽가라고 생각하는 입장을 고수할 경우 그들은 금방 대중과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적폐세력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자신을 몰라주는 대중을 등지고 자신을 알아주는 소수의 사람들을 존중하게 되고 결국 민주주의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언론은 살아남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폐세력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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