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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언론에 대한 글

기자는 왜 몰락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7. 10. 31.

2017.10.31

오늘날 기자는 몰락하고 있고 이미 상당부분 몰락했다. 기자는 왜 오늘날 기레기라고 까지 불리는가? 나는 그것의 기원을 기사라는 글의 형식 자체가 가지는 한계에서 본다. 기사는 사실에 기반하여 구성되는 한편의 논문같은 글이다. 그리고 기자는 이런 기사를 생산한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적 기사작성의 가치가 떨어졌고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이미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논문으로는 불충분하다.  오늘날에는 편파적이지 않고 사상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글은 불충분하다. 세상은 그러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사실에 기반해서 쓰는 논문같은 기사라는 패러다임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기사가 따분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가끔 최고 인기를 누리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듣는다. 그리고 그런 팟캐스트 출신의 사람이 하는 방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느끼고 있다. 이것은 사소한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혁명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그 변화는 경제에서 생산이상으로 유통이 더 중요해지는 것과 비슷한 변화다. 생산만 중요한 세상은 소비자가 뭘 필요로하는가는 당연한 세상이다. 하지만 물건을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판다는 것이 강조될 때 유통은 생산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고 생산을 지배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글이나 이야기도 그것이 재미있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듣는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공감대를 가지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재미있는 소통이란 어떤 특정한 사상적 태도를 취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기본적인 가치에 대해서 서로가 동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 소통이 된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도 옛날에 머물고 있으며 소통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우리 사회에서 나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계속 해서 김어준은 그들의 말에 딴지를 건다는 사실에서도 들어난다. 그들의 말은 알아듣기 어렵고 재미도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오랜동안 기사같은 글 쓰기를 교육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사상적으로 무균질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주류세력의 이데올로기에 너무 젖어서 타인의 관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통이 되질 않는 것이다. 

 

통상의 교육체계에서 우리가 받는 교육의 핵심은 사실들을 나열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야기가 재미있을 것이라던가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는 것은 없다. 테스트를 하는 선생님은 학생보다 더 많이 사실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며 학생이 재미있게 답을 쓴다고 더 점수를 주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학생이 해야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는 것이고 그 답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어야 하는 가하는 것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선생님은 그 주제에 대해서 달통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뒤죽박죽으로 어렵게 말해도 알아듣기 때문이다. 사실만 맞으면 정답이다. 수학문제를 풀때 답만 맞으면 풀이과정을 가지고 칭찬받는 일은 거의 없다. 암기과목의 문제들은 사실 외우기 어려운 복잡한 일들을 외우는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시험을 통해 사실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같은 것을 평가받지는 않는다. 남이 찾아낸 의미를 외울 뿐이다. 

 

재미있고 알아듣기 쉽다는 것은 소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하지만 기성교육은 소통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조선에 대한 한가지 질문을 공통과제로 연구하여 답을 찾고 실제로 소통을 통해야만 결과를 토출할 수 있다면 소통은 중요할 것이다. 학생들은 서로 소통해야만 과제를 풀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통과제 연구는 학교에서 잘 하기 쉽지 않다. 대개 소통에 훈련되지 않은 학생들 때문에 그냥 제일 똑똑한 학생이 혼자서 하는 것이 사실은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생 프로젝트라고 해도 그것이 진짜로 논문을 출판할 수준의 답이 없는 질문인 때는 거의 없다. 즉 정답으로 여겨지는 것이 어딘가에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따로 해야할 공부가 많은 학생들은 점수화되기 쉽지 않은 이 소통의 능력배양쪽은 무시하게 된다. 그냥 더 많은 사실들을 읽고 요약해서 답을 낸다. 프로젝트 자체가 그것이 가능할 만큼 쉽다. 쉬운 문제의 답은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그것을 찾기도 쉽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바깥의 현실사회에서는 소통의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 현실 문제는 누구도 혼자서 다 풀수가 없다. 현실에서 풀어야 할 문제는 오히려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현실문제가 어려워진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현실이 복잡해졌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우리가 주류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효율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이제 생각없이 하던대로 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를 풀기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그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프로젝트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것을 단순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소통시키는 능력이 사실을 찾아내는 능력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단순하게 말하면 사실만 가지고 만지작 거리는 사람들은 말단사원이고 비전을 보는 사람들이 사장이다. 이상적으로는 그래야 한다. 

 

이는 가장 존경받는 언론인인 손석희가 하는 뉴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손석희는 사실을 파헤쳐서 진실을 들어내는 집요함과 능력 그리고 용기가 있다. 하지만 재미있게 전달하는 능력으로만 치자면 손석희와 jtbc의 기자들은 김어준은 물론 때로는 조선티비보다도 못하다. 그들이 하는 보도는 종종 논문이 된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고 하며 자기가 없고 따라서 재미가 없다. 때문에 김어준이니 김영민이니 하는 사람들이 뉴스를 다시 전달하는 컨텐츠를 만들어서 팔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들이 발굴한 사실의 가치를 잘 팔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팔기 때문이다. 바로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느낀다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대신에 국소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자가 기레기가 되기 쉬운 이유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기자는 사실만 말하는 데도 거짓말 쟁이가 되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기자는 어차피 모든 사실을 보도할 수 없다. 기사든 방송이든 공간의 제약도 있는데다가 워낙에 사실들이 흔하다. 그러니까 가치적으로 중립인 사람은 보도가 불가능하며 뚜렷한 주관과 용기를 가지지 않고 관행과 압력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기자는 쉽게 쓰레기 기사를 쓸 수 있다. 그들은 사실상 아무 편견도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직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편견에만 충실하다. 쓰레기 기사는 때로 거짓을 말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거짓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그 기사에서 뭘 말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과 이명박 혹은 박근혜와 문재인에 대한 기자들의 취재 태도의 차이를 지적하는 네티즌들이 많다. 그런데도 기자는 자기는 떳떳하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기 쉽다. 왜냐면 그들은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사실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온 세상이 이명박이나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된장찌게 맛있게 만들기를 보도해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명박에 대해 잘못된 기사를 쓰는 것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될 수 있다. 삼성에 도전한다면 응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이 고소되기는 기본적으로 어렵다. 대개는 내게는 그것이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사실보도를 강조하는 논문같은 기사가 가지는 가장 큰 함정이다. 기자는 기사를 잘쓰는 것 이상으로 기사를 안 써서 권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를 쓰지 않는 것과 거짓말이 포함된 기사를 쓰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쁜 일일까? 사람들은 대개 후자가 더 나쁜 일이라고 교육받았고 믿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서 말할 때 거짓일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사실만을 써서  그것을 재미있고 쉽게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야기의 구성이란 단순화와 일반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비록 상식에 기반한 것이라고 해도 비약이 있다. 반면에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가장 나쁜 일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쉽게 목격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질 때 보도하지 않았을 뿐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는 언론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언론이 정말 무죄이며 편견이 없는 언론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김어준은 종종 음모론자라고 비판된다. 이것은 그는 팩트를 전달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 팩트들이 연결되어 그려지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더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는 사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의미와 가치를 강조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그래야 할 때가 넘었다. 의미나 가치는 사실들이 연결되어지는 관계나 문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짧고 엄밀하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든 팩트가 모두 단단하면서도 이해하기 쉽다면 그것은 좋은 기사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그는 음모론자라고 비판받는다. 같은 철학과 사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궤변이나 음모론으로만 들린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기자는 아니지만 김용옥도 비슷한 비판을 받는다. 그는 경계를 넘어서 이야기를 펼치기 좋아하는데 그 결과 거기에는 의미와 가치가 따라나온다. 그런데 김용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작은 전공분야에서의 사실들에 관련된 정확성에 집중하면서 이것은 모두 소설이며 음모론이라는 식으로 그를 폄하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무미건조하고 자기 주장과 관점이 없거나 아주 극단주의적으로 편협하다. 스스로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광신자이면서 자신은 중립이고 이념이 없다고 믿는다. 즉 그들은 도올의 실수나 부실은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사상적 공백이나 편향성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자들은 기레기로 산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들이 많다. 기자들은 자신들이 쓰는 기사가 세상에서 어떻게 소비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거나 알면서도 그렇게 기사를 쓴다. 그들은 사실상 독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기사를 쓰고 있는게 아니다. 오히려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려서 그들이 가진 정보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그들이 기사를 쓰는 이유다. 기자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들은 권력자와 광고주들이다. 이런 저런 압력, 이런 저런 편집자의 교체 그리고 그저 작은 기계 부품처럼 시킨 일을 한다는 관성이 합쳐지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중립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편견에만 편향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의미와 가치의 시대다. 사실은 너무 많다. 우리는 그 사실을 고르고 거기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야 하며 그것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의 능력이 필요하고 자잘한 사실에 집중하기 보다 사실들이 이어져서 어떤 이야기가 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걸 위해서 우리는 관점과 사상이 필요하다. 

 

 물론 한편으로 우리는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서 거대한 성을 쌓는 계획을 꿈꿀 수 있으며 그런 글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글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즉 하나의 사상을 완벽하고 흠잡을 수 없는 상태로 제시하는 글을 기사로 쓰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점점 더 비현실적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이 너무 많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그런  것은 기사가 아니라 책이나 되야 가능하며 심지어 그런 책도 언젠가는 나올 수도 있지만 설사 나온다고 해도 엄청나게 두껍거나 어렵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읽고 이해하라고 하는 것은 몰상식이다. 마치 모두가 초끈 이론을 공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리인 것과 같다. 

 

거시경제나 거시적 관점의 역사는 학문적 엄밀성을 가지고 말하고자 한다면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작 학계에서는 그리 크게 평가받지 못한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의 주장을 학문적 논문으로 쓰면 논문이 되지 않는다. 대중적 잣대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학문적 엄밀함의 수준에서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엄밀성만에 매달리면 우리는 무의미한 글들만 양산하게 될 것이고 사회의 전체적 합리성은 추락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보도하지 않음으로서 면죄부를 받지만 실제로는 매우 사상적으로 편향된 보도태도를 취하는 기자와 같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기꺼이 학문 커뮤니티의 경계를 넘어 대중적이고 거시적인 글을 쓰는 것이다. 학자가 학문을 넘어 사상의 경계로 나아가는 것을 무조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대중은 이미 학문적 엄밀성에만 매달리는 행위를  종종 어리석게 느낀다. 그런 태도만 가진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매우 무력하기 때문이다.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런데도 낡은 글쓰기에 매달린 기사들, 소위 기계적 중립이라는 편향된 기사들은 연일 넘쳐난다. 그래서 기자들은 기레기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대중보다 똑똑하며 전문가라고 믿지만 사실은 전문가가 되는 교육과정 속에서 자신이 뭔가를 상실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평범한 시민눈에는 뻔히 보이는 것이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상식이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 광장에서 이미 그들은 거추장 스러운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이미 바뀌었다. 그래서 대학교수들이 김어준같은 사람의 의견을 들으며 네네하는 판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세상은 앞으로 더욱 바뀌어 것이다. 그런 추세의 이유를 계속 무시하면 기레기라는 말은 더더욱 굳건히 세상에 뿌리박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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