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성매매도 노동이라는 기사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2. 7. 2.

최근에 한겨례21에서 성매매도 노동으로생각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와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0009.html저는 한동안 그 기사를 읽지 않았지만 지인이 그것을 언급하는 바람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성매매가 노동일까요. 


알기 쉬운 문제점


저는 그 기사를 읽고 나서 화가 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성매매가 노동이라는 주장 자체때문이 아니라 윤리나 가치에 대한 논의를 하는 한국 유명 언론의 기사가 너무나도 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사람이 있고 글하나에 모든 이야기가 담길수는 없으며 극단적으로 말해 미친소리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이란 결국 모든 이야기를 할수 있는게 아닌 확성기를 든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룰때는 기본적인 깊이는 달성해야 하는 것이 언론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기사를 읽고 느낀 소감은 주유소에서 불장난하면서 정의를 주장하는 철부지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쓸데없는 것이며 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저는 이 기사를 작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야기를 여성에 대한 폭력, 장기 매매, 최저임금제 등에 대해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선택했다라고 제목을 달고 여성을 폭행하는 남자들을 모아다가 폭력이란 범죄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라는 식의 인터뷰를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자들을 패니까 얼마나 가정이 화목해졌는지 모른다, 여자를 패는게 당연시되고 심지어 명예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죽이는 것도 맘대로인 나라도 있다는 사실을 기사에 쓸수 있습니다.


나는 장기매매를 선택했다라고 제목을 달고 장기를 사고 파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장기매매란 사람을 죽이는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살리고 장기가 없는 사람도 살리는 정의로운 행동이란것을 깨닫고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라고 인터뷰를 할수 있을 것입니다. 장기매매를 해서 살아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디 가니까 장기를 사고 파는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상식이더라라는 사실을 기사에 쓸수 있습니다.


나는 최저임금따위는 주지 않기로 선택했다라고 제목을 달고 그런 악덕 기업주들을 모아다가 최저임금제때문에 사람들을 고용을 못했는데 푼돈이라도 주고 사람을 고용하니 그사람도 돈을 벌어좋고 나도 좋은일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깨닫고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라고 인터뷰를 할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푼돈이라도 안주면 저사람들 거리로 나가 굶어죽을 것이다. 최저임금제따위 없는 나라가 어디어디다 라는 사실을 기사에 쓸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칭 타칭 진보언론인 한겨례가 설마 여성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며 장기는 사고 팔아야 하는 것이고 최저임금제따위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요. 위에 내가 쓴것과 같은 것을 기사로 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논리적 구조를 가진 이야기인데 왜 어느것은 되고 어느것은 안됩니까. 그냥 자기가 좋아하니까? 그냥 자기맘대로라는게 기사의 의미라면 뭐하러 길게 씁니까. 


두번째로 글을 어떻게 썼건 위의 글은 성매매를 노동으로 생각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알리고 인정받기 위한 것이거나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 혹은 기본적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으니 그걸 개선하자는 것이 목적일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저 기사는 흡사 성매매를 하는 사람에 대한 지독한 안티가 쓴 글 같습니다. 실제로 저 기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댓글을 달았고 그들은 한겨례와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을 이제 사회적 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 성매매하는 게 좋지는 않지만 나름 사연이 있겠지라는 정도로 생각하던 많은 시민들이 성매매하는 사람들은 동정의 여지가 없으며 사회적 근간을 흔드는 악이니까 체포하고 박멸해야하는 상대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기사가 내 목소리를 들어줘라는 메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느낌따위는 내알바아냐라는 태도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 너무 추우니까 성냥불이라도 쬘게 그걸 알아줘라고 하면서 주유소에서 불켜는 사람에게, 자기가 어디있는지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아 그렇구나 너 힘들구나 불을 더 크게 해줄게라고 사람들이 해줄리가 없지요. 자기는 남의 생각안하면서 왜 남들이 자기생각을 해줄것을 기대합니까?


한국이란 공동체의 윤리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겨례21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유명언론이라고 생각하니 화나고 슬픕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사람들의 혼란된 마음은 정돈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 기사의 내용때문에 뭐가 옳고 뭐가 그른가에 대해 혼돈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별로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억지로 거부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을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표면적 지적의 아래에 있는 심층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전에도 말한적이 있고 글하나로 다 쓸만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다시 약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찾는게 아니다. 


가치나 윤리, 정의를 논할때 우리가 제일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찾는 것이라는 태도 입니다. 이말은 그러므로 윤리나 가치는 착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아래에 쓰겠습니다만 일단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것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가 어떤 증거를 가져오건 어떤 논리를 쓰건 가치나 윤리 정의의 문제는 절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는 한가지 밖에 없는데 그것은 신이나 어떤 종교적 인물의 권위를 절대로 상정하고 거기에서 진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가 종교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있거니와 사실 종교를 받아들여도 절대는 없습니다. 왜냐면 신이 절대적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을 믿어도 인간은 신을 항상 100%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신이 옳다는 것을 믿어도 신의 목소리가 뭔지를 100%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종교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므로 비종교를 전제로 하고 이야기해봅시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들어서 뭔가가 증명되고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이야기는 아무리 길어도 항상 시작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2+2=4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냐고 누군가가 생각한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되는 지를 1+1=2라는 것에서 출발해서 설명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럼 왜 1+1=2인가라는 질문을 남길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이야기는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어도 뭐뭐는 사실이다라는 것을 증명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그 위에다가 전개하는 것이죠, 이것은 심지어 과학도 그렇습니다만 과학은 직접적 관찰에 의존하기 때문에 과학의 전제를 부정하고 그것이 옳지 않은 경우를 상상하는 것은 굉장히 근본적인 수준에서나 가능한 반면 사회 윤리적인 논의를 할때는 훨씬 훨씬 높은 수준에 있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회적 관습이나 선입견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것들은 그리고 대개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하게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바닥이 없는 것입니다. 가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증명될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상대주의를 그냥 받아들이고 거기에 개인의 자유를 더하면 무책임하고 흔한 책임없는 자칭 진보들의 메세지가 됩니다. 즉 뭘하든 내맘대로라는 것이며 사실 그들은 그저 이기주의자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모든 가치를 해체하고 자유를 주장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때는 내키는 대로 진보적 메세지나 과학적 메세지를 악용합니다. 이들은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기적 태도가 분노를 불러일으켜 진보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도둑놈 범죄자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시키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윤리나 가치에 대해 논하면서 무슨 말이 옳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자체가 우리의 윤리를 위험에 빠뜨릴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치에 대한 질문을 왜 하늘은 푸를까라는 과학적 질문던지듯 접근해 들어가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논리적구조로 분석해 들어가면 모든 가치와 윤리가 근거없다라는 것으로 나아가 해체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상대주의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분석할것도 없이 애초에 그런 것이 없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라는 고민을 해야  할것입니다. 


절대좌표계, 상대좌표계


우리의 윤리적 가치적 입장은 우선 공동체 혹은 좌표계의 문제를 논하지 않으면 논할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에도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쓴 것입니다만 다시 짧게 써보겠습니다.


윤리적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마치 우주공간에 떠있는 지구에 사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땅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지구는 약 시속 1700km로 자전하고 있으며 약 시속 11만 킬로미터로 공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실 태양계 자체도 움직이고 있지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사람도 실은 엄청나게 빨리 움직이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좌표계의 설정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없이 마치 우주에 절대좌표가 있는 것처럼 너는 이런 저런 속력으로 이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고민이 부족한 것입니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태양중심이라던가 지구중심이라던가 하는 좌표계를 설정했다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누군가의 속력을 '증명'했거나 '목격'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주의의 혼돈은 정리되어야 하고 정리될수 있습니다. 정의라던가 가치라던가 윤리라는 것은 공동체라던가 커다란 나로서의 세계따위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절대좌표계가 없다는 상대성이론이 옳아도 우리는 여전히 자동차 과속 단속을 합니다. 상대성 이론이 옳으니까 속력따위는 의미없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표면을 기준으로 속력을 재고 그것이 절대속력은 아니지만 지구상에 사는 우리끼리 의미있는 숫자로 활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의라던가 윤리도 공동체나 커다란 나라는 좌표계의 설정을 하면 의미가 있으며 서로 다른 사람이 그런 논의를 할때는 각자의 좌표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소통, 고민이 없으면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인류라는 공동체를 당연한 것으로 설정하고 윤리를 말할수 있으며 누군가는 그보다 훨씬 작은 민족공동체, 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친구 몇몇이나 가족구성원 몇명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윤리를 이야기할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류공동체에서 멈출 필요도 없습니다. 지구 생명 생태계라는 공동체차원이나 우주 공동체차원에서 이야기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공동체를 전제로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선과악은 종종 완전히 뒤짚어 집니다. 쿠데타 세력내부에서 선한 행동이란 조직에 의리를 지켜서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이며 제국에 충성하는 시민의 정의나 도둑집단에 속하거나 깡패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정의란 남의 나라를 빼앗고 도둑질을 열심히 하고 깡패질을 열심히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지구생태계라는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을 멸종시키는 것이 정의일수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공동체를 기준으로 하는 가치가 옳은 것일까요.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공동체를 선택하던 현실적으로는 커다란 공동체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입니다. 그냥 우리는 공동체라고 말한다고 해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라는 공동체를 무시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나라의 일이라도 인권을 말합니다. 인간이 굶어죽거나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면 남의 나라의 일이라도 가슴아파 합니다. 그러나 그러니까 국경을 개방해서 온세계의 난민을 전부 한국으로 불러들이고 중국인 인도인 베트남인은 물론 아프리카의 무수한 빈민을 전부 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우리는 남의 나라를 돕고 있고 도와야 하지만 경계없이 그렇게 하자는 나라는 사실 지구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이 가진 돈만해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살릴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도 해서이지만 공동체로 하나된다는 것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뭔가를 준다는게 아니라 같은 가치체계에서 서로 서로 돕고 서로 서로 채무자이자 채권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오랜간 소통하면서 살아왔는데도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손바닥만한 남한에서도 지역감정이 있습니다. 남과 북은 아예 전쟁을 했습니다. 세계에는 자국의 국민을 학살하는 정치인도 많고 인종청소가 자행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올드시티는 일제곱킬로미터의 작은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데도 서로 싸움을 벌이는 네개의 집단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습니다. 통합이란 정말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인종싸움이 한번벌어져 원한이 쌓이면 풀길이 없어보일정도로 암담해 집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로 심정적 거리를 0로 해서 살수 없는 것은 마음이 편협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아직 그럴수 있는 능력이나 지혜가 없어서 입니다. 능력이 없으면서 무조건 개방하고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비극을 낳는다는 것은 불행한 결혼이나 가족을 봐도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한명의 망나니 가족구성원이 온가족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다 노력하고 배우고 깨달음이 있어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맞는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경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크고 작은 그리고 서로 중첩되기도 하는 무수한 공동체로 쪼개집니다. 이 공동체들에게 필요한 미덕은 공존의 능력입니다. 그렇지 못할때 공동체들은 서로 만나면 서로를 잡아먹거나 파괴할테니까요.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거나 먹이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그래서 신사도운운하는 사람이 인디언을 학살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서부영화에서 총든 카우보이는 흉악한 인디언들을 코믹하게 쏴죽이는 것입니다. 


공존의 미덕은 각각의 공동체가 가진 경계를 인식하고 그너머를 이해하며 모두가 하나되어 살수 있을 정도에 이르기 전까지 경계의 안과 바깥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이룩될 것입니다. 그저 벽을 허물겠다고만 하면 그것은 전쟁의 선언이 되고 말며 극단적인 위협으로만 느껴집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한겨례21의 기사는 기자나 인터뷰어의 의도가 뭐가 되건 문화적 전쟁의 선전포고로밖에는 해석될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죠. 


저는 모든 벽들이 정당하며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혁명은 대개 전쟁이 아니라 설득과 사랑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혁명이 가능해지는 방법은 상대를 몰살시키고 없애는 것밖에 없습니다. 논리에 지건 세력싸움에서 지건 설득되지 않으면 진정하나의 공동체를 이룰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력이 아니면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강제력은 기껏해야 이따금 피할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때 쓸수 밖에 없는 일에 불과하며 혁명의 본질은 설득과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디의 비폭력운동같은 것이 인도를 영국에서 독립시킨 것입니다. 인도라는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영국과 인도는 결국 각자 살아야 할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득시킨 것입니다. 


신뢰의 문제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를 기준점으로 삼기만 한다면 따라서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제 우리는 절대적 가치기준이 서게 되는 것일까요? 글이 길어지므로 간략히 정돈하겠습니다만 정의나 윤리, 가치의 문제는 신뢰의 문제 혹은 우리 내부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것입니다.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기는 하지만 조심해야 할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고 뻔한 문제는 한국사회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를 일본사회와 구분해주는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여 한국적 윤리라는게 분명 존재한다고 느껴지지만 시대에 따라 천천히 변해가니까 계속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할것입니다. 


좀 더 심각한 문제가 바로 신뢰의 문제입니다. 제가 잘드는 예를 다시 한번 들어 봅시다. 어떤 성인남자가 여학생의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성추행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시 말하기를 그 남자는 그 여학생의 아빠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둘로 갈라집니다. 한쪽은 뭐야 그럼 아무것도 아니잖아라고 합니다. 또한쪽은 아버지가 딸을 성추행하다니 더더욱 용서할수 없는 나쁜 놈이라고 더 펄펄뜁니다. 


이렇게 의견이 나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아버지라면 딸을 여자로,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할리가 없으므로 그런 행동이 성적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쪽은 남자는 상대를 가리지 않으며 딸도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하는 흉악한 존재니까 그 남자는 성추행을 그것도 질나쁜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실은 성인남자가 여학생의 엉덩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실만으로 윤리적 가치적 판단이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기준점이 되는 사회를 전제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게 아냐. 당연히 상식적으로 그건 성추행이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 운운하기 이전에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일종의 법처럼 정해놓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실이 같으면 윤리적인 판단도 똑같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이 말하는 객관적 상황이란 어떤 창틀 안에서 본 객관적 상황입니다. 위의 예에서 나온 것처럼 성인남자가 여학생의 엉덩이를 때렸다라는 문장이 그런데 그남자가 아버지라더라라는 정보를 더하면 좀 달라보입니다. 이제 평상시 아버지가 어떻게 행동했다라던가 그 상황이 벌어졌을때 어떤 일이 있었다던가 하는 일이 더해지면 일은 또 달라보일수 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에 같은 사건은 절대 두번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같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같은 판단운운하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은 모두 같은 것이다라는 식의 단순화를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그래서 법이 점점 복잡해 지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말을 잘만드는 사람이 정의를 창조하는 것처럼 됩니다. 


가치, 윤리의 문제에서 신뢰의 문제는 무시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악용되면 소위 말하는 패거리주의가 됩니다. 즉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이죠. 우리편이 저지르는 일은 다 봐주고 상대방일은 무조건 비방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이런 문제를 철저히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도 절대 아름답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란 언제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신뢰란 우리가 세상이나 사람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복잡한 경험의 총체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그것에 크게 의존하며 그걸 무시하자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환각을 봅니다. 선입견없이 세상을 보자고 하며 선입견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만 모든 선입견을 다 없애면 우리는 아예 세상을 볼수가 없습니다. 선입견이 바로 우리가 쌓아온 경험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신뢰를 쌓아올리고 그것에 의존해서 세상을 봐야 하는 것이지 신뢰같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은 버리고 사실관계만 가지고 세상을 보자라고는 할수 없습니다. 


대개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규칙이 복잡해 집니다. 내 느낌 내 판단은 없어지고 로보트가 됩니다. 결국은 더더더 많은 사실들을 조합해서 말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의 노예가 됩니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가치판단을 사실의 조합에서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주관성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자기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할수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데올로기 논쟁이 치열한 집단은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행복을 추구하니까 행복할것같지만 실은 대개 매우 상명하복적이고 경직된 집단이 되기 쉽습니다. 뭐든지 다 의미를 따지서 논박하고 결정하니까요. 


결국 한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관습이 존재하여 어떤 가치적 기준이 있다고 해도 그 구성원들의 마음이 어떤 신뢰를 가졌는가에 따라 그 적용은 달라질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춘이 어느정도의 잘못인가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각과 관습이 같다고 해도 그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는가에 따라 사회적 대우나 판단은 달라질것입니다. 화목한 사회가 되면 세상에 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흉한 분위기가 되면 세상에 흉악범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화를 잊은 기계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방법은 없습니다. 사랑이니 인화니 하는 것은 논리나 증거의 문제이전에 신뢰와 믿음의 문제입니다. 


맺는 말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흔한 이야기처럼 어렵고 오해되며 심오한 것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서로 믿고 서로의 입장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사회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는 세상이 올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는 일이 필요할것입니다. 우리 좀더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되자라는 다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건 당연한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것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건 이거지 당연한거 아냐라고 말하면서 무지의벽을 세우는 순간 누군가가 소외되고 상처입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능력이 되는대로 그런 무지의 벽을 느끼고 생각하는 일이 꼭 필요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