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7.30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이후 많은 애도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다시 스물 스물 세상에는 노무현 정부 무능론이 다시 퍼지고 있다. 그것은 비단 새누리당이나 한나라당출신의 손학규같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많은 정치인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확인되고 있으며 진보진영의 논객들에 의해서도 기회있을때 마다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문재인에 관련되서 논쟁도 붙는다. 안철수를 제외하면 문재인은 야권에서 차기대권후보 1순위에 올라있다. 사람들은 참여정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문재인을 낙마시키기 위해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비판하며 그게 안되더라도 문재인에게 참여정부를 부인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같다. 그래서 문재인은 결정해야 한다. 그 압력에 굴복하고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부인하던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부인할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워 할 대상이라고 더 강하게 받아치는 것이다. 문재인의 선택은 후자쪽인 것같다. 문재인은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같은 입장에 있었지만 노무현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베드로처럼 노무현을 부인하는 참여정부인사도 있는 것같지만.
이런 노무현 정부 무능론에 대해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고 기록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노무현 정부 무능론의 가치다.
우리는 왜 박정희를 비판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우리중 일부는,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은 존경하지만 박정희는 비판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같지만 그다지 당연한 것은 아니며 이런 것에 대해 검토함으로서 도대체 비판은 왜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점검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결국 노무현 정부 무능론이 어떤 문맥에 서있는가를 분명히 해줄것이다.
우리가 박정희를 비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박정희가 실패한 일, 박정희가 저질렀다는 모든 일들때문이 아니다. 박정희 여자문제때문도 아니다. 과거의 인간으로서 박정희는, 과거의 인간으로 남아있다면 비판해야할 이유가 없으며 그저 역사적으로 기술될 돌이나 산같은 객체일 뿐이다.
박정희가 비판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에 박정희가 하나의 이념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으며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역사는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현재의 일부다. 그러나 어떤 역사는 크게 영향을 미친다. 박정희가 그런 경우다. 그러므로 더 강한 비판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장기집권을 노리고 독재적 권력을 휘둘렀던 박정희는 21세기 한국에서 지도자로 이야기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실질적으로는 손해보는 일이지만 명분상으로 옳기때문에 필요한게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바로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는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는 이것을 이명박이라는 정치가를 통해 아주 잘 경험하고 있다. 얼마전에 박원순시장에 대해 나온 기사에 1년만에 1조원 이상의 서울시 빚을 갚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 빚을 급증시킨 것이 누구인가. 이명박과 오세훈이다. 온갖 문제를 만들어 서울시를 쑥대밭으로 만든것이 바로 이명박과 오세훈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멈출 수 없었을까. 바로 민주주의가 실종되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투명해지지가 않고 얼토당토 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지하철 9호선 요금문제도 박원순시장과 민자 회사간에 있었는데 이때 들어난 것이 얼마나 이명박이 많은 특혜를 주면서 시의 자산을 팔아넘겼는가 하는 것이었다. 막대한 적자를 내면서 서울시 재정을 갉아먹는 서울시버스시스템도 이명박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버스노조파업이 나면 노사가 협의하는데 돈은 결국 서울시가 내면서 -버스회사 적자는 서울시가 메꾸게 되어있으므로- 서울시는 발언권도 없다고 한다. 그냥 만들기만 했는가. 이명박이 가는 곳에는 항상 부정부패가 따라다닌다. 민주주의가 안되고 누군가 혼자서 내가 다 알거든이라고 하면서 정치를 하면 나라가 푹썩는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개인적인 유감이있고 피해를 당해서가 아니고, 심지어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자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이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문제는 현재다. 지금도 박근혜가 박정희의 후광으로 유력대선후보자리에 서 있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 박근혜는 앞에 나섬으로써 아버지를 계속 욕되게 만들고 있다. 박정희가 역사속에서 자기 몫에 만족하고 역사와 무덤으로 돌아간다면 박정희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비판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박근혜가 지지를 받는 다는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걸 쉬운 일, 가끔 잊어버려도 되는 사소한 일로 생각한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쿠데타 5.16 옹호도 가볍게 말해진다.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사소한 일로 생각한다면 이완용은 똑똑했으니 그를 기리고 찬양하는 그의 후손이 대통령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야 사소한 것 아닌가. 좀 팔아먹으면 어때, 이번엔 안 팔겠지 뭐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박근혜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민주주의란건 달성하기도 지키키도 어려운 것이며 전체 시스템의 성능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컴퓨터로 말하면 OS의 일부다. 프로그램이 좋아봐야 OS차원에서 무너지면 컴퓨터는 잘돌지 않는다. 차가 얼마 없으면 교통신호쯤 가끔 무시해도 될지 모르지만 복잡한 대도시에서 그랬다가는 대참사가 난다. 사람이 죽고 물류가 마비된다. 민주주의란 교통법규같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복잡해진 오늘날 그것은 사소한 것도 아니고, 가끔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비판되고 역사속의 미라로 돌려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박정희 비판은 살아있는 것이다. 박정희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으며 박정희의 정책이 항상 성공하지 않았으며 박정희는 뭐하나 이룩한 것이 없는 인간이니까 비판하는게 아니다.
노무현 정권 무능론은 무슨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러니까 노무현 정권 무능론이란 걸 거론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도대체 그 비판이 무슨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숫자가 등장하고, 무슨 정책을 펴서 결과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하는 것을 논하기 이전에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숫자로 따져서 잘했니 못했니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상으로 도대체 참여정부가 무능했다라는 비판은 무슨 가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참여정부가 빨갱이 정부며 종북하는 사람들의 정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그사람들은 북한에게서 한국을 지키기 위해 그런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이들에게서 노무현 정권 무능론이 가지는 가치는 분명하다. 노무현같은 지도자는 종북을 하니까 종북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렇게 믿는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이나 진보진영에서 그런 이유로 노무현 정권 무능론을 논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무현 정부가 무능하다고 야권에서 자꾸 시비가 나오는 이유는 뭔가. 그게 도대체 무슨 가치를 위한 것인가. 도대체 누구와 비교하고 어떤 상황에서 무능하니 마니 하는 것인가. 누가 노무현처럼 그 순간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노무현이 구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나? 노무현말고 누가 그 당시 야권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고작 따져봐야 정몽준인데 지금 그럼 정몽준이었으면 좋았을거라는 주장을 하는것인가? 그럼 정몽준이 대표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제 아무리 둘러봐도 거기에는 미흡한 답 하나와 구질구질한 답 하나가 있을 뿐이다. 미흡한 답하나는 노무현 정권은 자유주의 정권이며 자유주의는 사회악이므로 자유주의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고 또하나는 실은 그들 스스로의 구질구질한 과거를 가리기 위해 노무현 정권을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것은 뒤로 하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나 먼저 짧게 해보자. 지금 되돌아보면 노무현을 탄핵시킨것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었고, 그때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과 참 죽이 잘 맞았다. 탄핵후폭풍으로 단숨에 국회를 과반이상으로 장악한 열린우리당은 얼마나 청와대와 싸웠던가. 그러면서 개혁입법을 통과시키는데는 얼마나 무능했던가. 예를 들어 사학법으로 사학재단운영을 투명화했으면 애초에 등록금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았을거라고들 말한다. 방송에 나와서 대통령에게 이죽거리기나 했던 검사들은 스스로가 권력과 싸우는 대단한 소시민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노무현은 목숨을 바쳐서 한국을 구한것이다. 역사는 모르는 것이나 거기서 노무현 서거와 같은 사건이 없었더라면 한국역사는 훨씬 깊은 수렁을 헤맸을 것이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진흙탕을 보고 신물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와 시시비비따져서 누가 더 잘했니 뭐니 따지는 것은 하나마나한 짓이다. 이제 몇년이 지나 다음 대선이 되니까 안철수말고 한국에서 여권에 대항하는 후보내는 세력이 뭐가 있는가. 처음에는 유시민이 인기가 있었고 지금은 문재인이다. 노무현이 자기 피로 역사를 씻지 않았다면 계속되는 진흙탕속에서 명맥은 사라졌을 것이다. 누구는 목숨도 버리는데 누구는 국회의원 뺏지가지고 구질구질하게 구니 통합진보당은 신물이 날 수 밖에 없다.
이런 과거속에서 노무현 정부 무능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구질구질한 속마음이란 해방된 한국에서 그 시절에 친일안한 사람이 어디있냐고 가르치는 사람, 형편없는 조선말에 나라 안팔아 먹은 사람이 어디있었냐고 말하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씻고 싶은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였던 손학규는 지금 민주당에 와서 노무현 정부 무능론을 말한다.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힌 것이다. 투항한 왜장이 조선에 와서 이순신은 무능해서 일본한테 배도 많이 잃었다고 말하는 모습이랄까.
구질구질한 이유는 구질구질해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좀 미흡하나마 신자유주의던 그냥 자유주의던 자유주의정부를 비판하다는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이야기의 본질은 신자를 붙이던 말던 결국 자유시장주의, 더 많은 경쟁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자유주의의 믿음을 참여정부가 따랐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겠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분명 일말의 진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미흡한 이야기이며 게다가 다음 번 정권을 논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했을뿐만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한국에서 비인간적인 자본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현실을 노무현 정권이 만들어 냈는가? 자유주의를 어떻게 해석하건 한국시장과 사회의 관행이 몇년만에 달라지는가?
박정희는 개발독재의 상징이다. 그런데 과연 무한 경쟁사회, 신자유주의의 상징이 노무현인가? 그렇다고 생각할 사람도 극히 소수 특히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모양이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 노무현 정부는 충분한 복지를 실시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복지를 증대해 나간 정권이었다. 인권에 신경쓰는 정권이었다. 어떻게 하면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의 상징이 되어서 노무현을 부관참시하고 노무현 정권을 때리면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죽는가.
더구나 자유주의의 확실한 대안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세계는 미국을 정점으로 하고 서양을 정점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세계다. 공동체 주의, 생태주의니 하는 어떤 새로운 시각도 적어도 아직은 어디서도 확고한 이념으로 대안으로 검증받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탄생된 예가 없다. 유럽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요즘 유럽이 빚내서 흥청망청거리다가 도산하는 거 보고 그 대단한 유럽에 대한 실망도 좀 생겼을 것이다. 이민자문제로 거리가 불타는 모습은 또 어떤가. 확고한 답은 없다. 확고한 답이 없는데 자유주의 때려봐야 그것은 그야말로 한줌도 안되는 위험한 이상주의자들이나 좋아할 짓이다. 이리저리 세금이나 대학교나 재벌 마구 주무르면 몇년안에 천국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현실에는 100% 자유인 국가도 없고 100% 부자유인 나라도 없다. 누구나 그 어느 중간에 있으며 (중간이라는 말도 1차원이 아니라 한줄위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색과 냄새와 크기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변화한다. 항상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순간에 뭘 했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식 삶의 인기가 떨어지고 새로운 대안이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노무현 정권 비판에 등장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맺는말
사람들은 흔히 누구나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을 비하하는 말인 노빠를 써서 노빠는 노무현을 성역화한다 같은 말로 노무현 정부 무능론을 옹호한다. 비판에 시비거는 사람들은 노무현을 성역화한 노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도 몇몇 사람에게는 그저 노빠의 노무현 옹호론으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짧고 세상에 시비는 끝이 없다. 뭔가를 하겠다면 적어도 그럴듯한 가치와 명분이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의도가 선량하건 안하건 결국 끝이 없는 분쟁을 만들고 끝에 가서는 미움만 양산할 뿐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보다 대통령 더 잘할 사람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럴지도 몰라 보이는 사람치고 노무현 대통령 무능론 이야기하는 경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강조는 별로 안한다는 이야기다. 일하는 사람들은 일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안다. 비판은 명분과 가치가 있어서 꼭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이명박이 박정희 향수 불러 일으키면서 대통령 되려고 하니까 박정희의 과거도 구질구질하게 다시 논해야 하는 것이다. 여자가 어쨌네 변절이 어땠네 부패가 어땠네 하는 이야기 한번 더 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가 민간인 사찰같은 것으로 사회적 활력을 죽이니까 그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겠다고 해서 비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국대중의 자치능력을 부정한 5.16을 옹호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니까 다시 박정희가 비판되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 이렇다할 재산이 남은 것도 없고 목숨으로 한국 정치의 희망도 이어간 노무현 대통령을 밟고 넘어서겠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정책이나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노무현 정권을 부정하는데 충분한이유인가. 그게 굳이 노무현을 무덤에서 불려내서는 무능했다고 벌을 세울 이유가 되는가. 내게는 오히려 이 나라에서는 애국자일수록 욕을 먹는다는 주장의 예로나 적당한 것같다. 자기는 당연히 더 잘할수 있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뭔갈 좀 보여주고 남이 하는것을 쉽게 말하자. 그게 아니면 절박한 이유라도 있던지.
누구나 어딘가는 무능하다. 대통령이 모든 걸하는 시대도 아니다. 정권 무능론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어떤 가치, 어떤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전제에 이야기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무능론 같은 것이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있다. 지금 사회적 신뢰가 망가졌다. 방송사들마다 다 파업하는 정권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무능론은 어떤가. 그걸 지금 논해서 그 반대편에서 누구를 선택하겠다는 것인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치없고 명분없는 시시비비나 비판이란 정말 할 짓이 못된다.
'주제별 글모음 > 노무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무현의 마지막 비전 (0) | 2013.04.11 |
---|---|
[스크랩]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0) | 2012.11.22 |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인가. (0) | 2011.06.17 |
노무현과 실용주의 (0) | 2010.04.05 |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 (0) | 2010.03.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