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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우리를 구하는 경제. 경제를 구하는 우리.

by 격암(강국진) 2012. 10. 5.

하이에크와 케인즈 누가 옳을까?

어제는 EBS의 자본주의 다큐 마지막편을 보았습니다. 마지막편에서는 경제학파의 양대거두인 하이에크와 케인즈를 소개하면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하이에크가 옳을까 아니면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즈가 옳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어쩌면 대공황에 비견될지도 모르는 큰 경제위기 앞에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나름 절박한 현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질문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질문은 하이에크와 케인즈를 서로의 반대에 놓고 진실은 이쪽 아니면 저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좌파가 옳은가 우파가 옳은가 라고 물으면 진보냐 보수냐라고 물으면 좌와 우라는 표현, 진보와 보수라는 표현이 그렇게 들리게 만들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적 논의라는 것은 통상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주체가 실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이에크와 케인즈는 말하자면 서로 다른 시장논리, 서로 다른 자본주의 시스템을 대표합니다. 양쪽중에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을 때 실종되어 있는 것은 그 시스템을 이용하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에 대한 논의 입니다. 우리는 한옥이 좋은가 아니면 서양식 건물이 좋은가를 이야기할 수는 있으며 분명 인간은 자기가 사는 집에 적응해서 살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런 사람이라면 한옥이어야 행복하고 저런 사람이라면 서양식이어야 행복하다라는 사실이 진실의 큰 부분이라는 것을 부정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문화가 실종되어 있는 것입니다. 

경제학이론에서 가정하는 인간도 그렇습니다. 매우 단순한 존재죠. 밥많이 주면 좋아하고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존재, 뭐 그런 것들이 왕창 모여있을 때 세상은 어떻게 흘러갈까. 이런 식으로 이론이 전개됩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이 그런 단순한 존재라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는게 과연 가능할까요?

요즘 도덕적 해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현재 경제위기에는 항상 도덕적 해이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뒤집어 말하면 하이에크식이건 케인즈 식이건 결국 그 시스템의 약점을 공격하는 인간이 번성하는 것을 막을수 없으면 망가진다는 뜻입니다. 달리는 기차의 엔진에 모래를 뿌리면 기차가 망가질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절대 모래가 들어가지 않는 엔진만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 기차를 타고 있는 우리가 엔진에 모래를 뿌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해야 합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야. 

이런 도덕, 가치의 문제는 당연히 경제나 사회시스템을 설계하는데 근원적 중요성을 가지는데도 오히려 최근의 경제적 논의를 보면 경제와 도덕의 문제가 완전히 갈라져 있는 느낌입니다. 정작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저술하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써서 윤리론을 먼저 생각하고나서야 자본주의 시스템이란 것을 연구했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으며 그것은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실상 현대인들이 더욱 크게 부족한 것, 현대의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방향은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윤리와 가치의 분야의 연구와 이해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극동아시아의 경제적 성장은 다른 곳에서 적용하지 않았던 신기한 경제시스템을 도입한 때문이 아니라 유교적 전통이 심어놓은 전통 윤리가 자본주의 시장의 단점을 막아주었기 때문일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은 불교적 윤리속에서 견딜만한 것으로 변했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OECD국가중 가장 빈부격차가 큰 나라이기는 합니다만 미국에는 한국같은 나라와는 비할수 없는 기부문화가 있습니다. 애플의 경영권을 스티브잡스 아들이 물려받지도 않고 빌게이츠같은 세계최고 부자가 자기 재산을 전부 사회환원합니다. 많은 과학 연구 관련 기금도 개인자산이 기부되어 만들어진 재단에서 나옵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대표주자라고 할수 있는 미국이 지금 어렵지만 만약 미국이 이렇게 탈자본주의적인 면이 없었다면 훨씬 더 빨리 경제위기에 처했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의 요점은 유교를 공부하자거나 불교를 공부하자라는게 아니라 어떤 사회의 정신적 분야에 대한 고려를 제외하고 거대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경제시스템을 설계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옷을 입을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몸에 딱맞는 옷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거대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경제시스템은 약간의 착오로도 대형사고를 일으킵니다. 한순간에 수없는 사람을 거지로 만들고 죽게 만들수 있습니다. 적응할 시간 자체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것같습니다. 하나는 전문화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아담스미스가 했던것처럼 윤리학과 경제학 연구를 동시에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일을 하면서 말합니다. 그건 내일이 아니야라고. 두번째는 철학의 실패입니다. 윤리학은 서양철학자들이 공인하는 발전없고 답없는 분야입니다. 

말하자면 수백년전에 모든 분야의 공부를 한 인간이 모두 하던 지식인 시대에는 비록 진전이 크지 않아도 교양이라는 이름속에 한 인간이 과학과 경제와 윤리 모든 분야에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전문화가 계속되고 사회는 복잡해지고 자본주의 시장이 발달하면서 각자 자기가 잘하는것, 종종 경제적 혜택이 좋은 것을 하다보니까 결국 어렵고 경제적 보답도 없는 분야는 버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는 결국 윤리적 감성이나 고민은 전혀 없지만 지식이나 기능면에서 뛰어난 전문가를 양산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교수라고 하면 윤리적인 면에서도 뭔가 있을거라고 기대하지만 교수가 되는 길은 윤리시험봐서 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전문가들이 무딘 감성으로 대형사고를 치게 되는 것이죠. 

사실 서구 중세도 마찬가지고 조선시대까지의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과거의 사회에서는 가장 지적인 인간이 주로 윤리에 관련된 고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신부거나 스님이거나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거나 다 그랬죠. 세상사는 이치는 다 윤리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어떤 학생이 매우 똑똑해보이는데 너참 재능이 있어보이는 구나 윤리학 분야에 진출해서 세상사는 이치를 세상사람들에게 가르쳐주렴이라고 말하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상업성이라는 측면에서 말이 안되고 상업성이 있는 윤리분야란 사이비 종교나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너는 커서 사이비 종교 교주가 되거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건 내일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코앞의 수입에 신경쓰고 있는 가운데 어디선가 대형 경제사건이 펑펑 터져서 열심히 일한 것을 빼앗아 갑니다. 그건 세금일때도 있고 주식이나 은행예금일때도 있고 내 집일 때도 있으며 교육비일때도 있고 식료품비 일때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과연 하이에크가 옳은가 케인즈가 옳은가만을 질문해서 문제가 개선될까요?

맺는 말

제가 쓴 것은 어떤 의미로 좋은 사람이 모여 살면 시스템이 좀 후져도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문제에 대처하는게 아니라 미국의 기부문화처럼 시스템이 빠뜨린 문제를 인간적인 요소가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쓰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쓰면 오해가 거의 반드시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나 윤리라고 하면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가 옳은지, 착한 일인지는 누구나 아는데 다만 욕망에 패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것이 윤리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모여서 우리 모두 좋은 사람이 됩시다라고 구호를 외치면 그걸로 윤리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일은 끝난 것이고 이제 진짜문제인 가계부를 보는 문제나 세금문제나 무슨 법문제로 다시 말해 시스템의 문제로 가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리문제는 나는 누구고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이해문제입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사람이면 죽건 말건 내 알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개념은 희박하고 나는 내 가족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은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이런 판단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 내리는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세계인은 다 동등하니까 한국 국경을 열어서 세계의 빈민들이 모두 한국에 와서 살게 하자고 할 한국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심지어 우리와 같은 문화권인 북한 사람도 통일되어 갑자기 몰려오면 곤란하다고 걱정하지 않습니까? 북한 사람 굶어죽어도 불쌍하지만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무조건 비윤리적인걸까요 아니면 그건 윤리적인 걸까요. 이런 문제가 우리 모두 좋은 사람이 됩시다!라고 구호 외치는 걸로 명쾌해 지겠습니까? 가족끼리 늘상 싸우는 집안에서 모여서 이제 우리 사이좋게지냅시다라고 결의대회한번 하면 그 가족이 화목하게 살아갈수 있을까요? 훨씬 더 많은 생각과 공부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사회니 국가니 경제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개인의 행복 차원에 있어서도 자기를 찾는 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당연히 핵심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대개 그일말고 다른 일들로 바쁩니다. 우리가 뭘 하는 이유는 행복해 지기 위해서인데 우리는 자기를 찾는 일은 맨뒤로 돌리고 다른 일로 바쁩니다. 그러면서 왜 나라 경제가 이모양일까, 왜 나는 행복해지지 않는가 가끔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할 경제 시스템을 찾습니다. 그러나 정작 경제를 구해야 할 우리가 실종 된 것일수 있습니다. 자기를 찾지 못하고 모두가 무의미에 빠져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더 정교한 법체계나 경제원리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 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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