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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인식론, 스토리텔링 그리고 자기 찾기

by 격암(강국진) 2012. 10. 7.

최근에 제가 재미있는 일본만화를 하나 읽었습니다. 피아노의 숲이라는 피아니스트에 대한 만화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한계에 고민하는 피아니스트 지망생에게 한 흔한 메세지가 주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피아노를 흉내내서는 안된다고 너는 너의 연주를 사랑해야 하고 너의 연주를 찾아야 한다고. 그런데 그말을 들은 학생은 반문합니다. 그걸 어떻게 찾냐고, 그게 어디있냐고. 당연한 질문입니다. 결국 그게 핵심적 질문이니까요. 자기를 찾아라라는 말은 흔한데 그걸 어떻게 하는가.



다른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사람을 보고 감명받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따라하기도 합니다. 저만 해도 어릴적에 하이델베르크라는 독일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고 아 사는건 이렇게 살아야해라고 하면서 그 학구적인 분위기의 삶을 동경했었습니다. 그것때문만은 아니지만 실제로 물리학과에 진학하고 박사학위까지 받도록 학계에 남았습니다. 동경하는 삶이 없는 청춘은 그 나름대로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느 수염 허연 할아버지가 무위자연운운했더니 생각이란건 해본적도 없는 사람이 삶이란 놀고먹는것이라고 이해하고 그렇게 사는 것같은 것일수 있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그런거 뭔지 다 알아라고 해버리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찾으라는 그 흔한 말, 흔한 메세지는 잊혀져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피아노 연주를 흉내내는 것으로는 훌룡한 피아니스트가 될수 없습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주를 사랑해야 하고 우리의 연주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리를 찾아야 하고, 우리의 삶을 찾아야 합니다. 문제는 역시 다시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부분이겠지요. 

이것은 역시 무슨 요리 메뉴얼처럼 이러저러하게 하면 답이 나온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를 찾는 방식도 여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일상속에서 우리가 내리는 우리의판단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스스로를 알아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두개의 것으로 부터 어느정도의 도움을 이 자아찾기에 얻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도움이 되는 그 두개가 바로 인식론과 스토리 텔링입니다.

우리가 사는 가상세계

제 생각에는 자신을 찾는다던가, 자기 소리를 찾는다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입장 즉 인식론적인 입장을 재확인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우리 자신의 일부다. 우리 자신이 그걸 그렇게 보이게 그렇게 들리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배가 고프면 어떤 것이 매우 맛있게 보입니다. 맛있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배가 너무 너무 부르다면 같은 것이 맛없어 보이고 심지어 느끼하게 보여서 보기도 싫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운 이 세상이란 것은, 그래서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 것 자체의 성질인 동시에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결핍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유명하지요. 우리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알고 느낄 수 있는 만큼 보여진 세상이지 순수한 세상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가 이러저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을 이러저러하게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것은 다시 우리가 이러저러한 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듭니다. 즉 거기에는 하나의 순환이 있습니다. 이런 인식론적인 순환이 바로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http://blog.daum.net/irepublic/7888075) 쿤이 그 책에서 말한 것은 과학이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며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같은 논리가 다른 많은 인간의 사고에 적용되어 질수 있기에 우리는 이제 패러다임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냥 사실을 사실 자체로 보는게 아니라 어떤 패러다임속에서 어떤 문화 속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패러다임이나 문화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사실 자신이 속한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의 바깥쪽에서 그 패러다임을 바라볼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 말은 이미 그 사람은 그 패러다임을 벗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한국이 아닌 것에 대해 듣고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한국이 뭔지 말할 수없습니다. 오직 한국어라는 언어 밖에는 모르는사람은 한국어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말할수 없습니다. 그 패러다임을 벗어난 사람에게는 가정과 약속에 불과한 것들이 그 패러다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원래 그런 것, 질문할 필요없이 자명한 것이 되어 그런 것들을 가정했다거나 약속했다는 생각자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무지와 불확실성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대학교시절 같은 학창시절을 보면 학교에는 종종 대단하다고 생각되어지는 학생이 있습니다.  우등생, 명석한 학생, 인기있는 학생 뭐 그런 것이죠. 그런데 그 시스템의 바깥쪽에서 예를 들어 성인어른으로서 초등학교 교실을 관찰하면서, 대학교를 보면서 소위 그 명석하고 인기있는 학생을 보면 우리는 어떤 차이를 느낍니다. 자기가 그 안에 있을 때는 그 우등생이 무한히 똑똑해 보이며 절대적으로 재능과 매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종종 그 우등생은 그 패러다임의 최대 희생자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즉 좁은세계 안에서 그 세계가 마치 전부인것처럼, 자신이 생각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며 그렇기에 오히려 그 좁은 세상, 그 좁은 패러다임을 빠져나오지 못할 사람으로도 보이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칭찬받는 법,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주목받는 법을 알고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는 초등학생이나 대학 신입생앞에서 인생에 대해 좀 가르쳐주겠다고 설교를 하는 2학년생의 태도를 볼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주목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나 자기가 인생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아는 것은 알지만 자신이 무지한 것은 모르는, 그 선배 대학생의 태도가 가장 무지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과거에 갇힌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대단한 인간 앞에서, 대단한 그림 앞에서 대단한 권위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 혹은 한 화가 지망생으로서 한 소시민으로서 종종 기가 죽습니다. 그들이,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럴때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게 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기본적으로 대부분 우리자신이 만들어 낸,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이나 문화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보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대단한 것을 봤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자화자찬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말해 봅시다. 여기 어리고 경험없는 한 어린애가 베토벤의 음악을 듣거나 오랜 세월 지켜온 종가댁의 김치맛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거 대단한데요라고 말했다고 해봅시다. 그럼 어른들은 종종 그럽니다. 니가 뭘 안다고 대단하다고 아는 척을 하냐고. 그 어른들은 물론 베토벤의 음악이나 종가댁 김치맛을 부정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어린 소년이 명작 앞에서 명작이란 말을 하는 것을 두고 너는 자화자찬을 하고 있구나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단하고 엄청나다고? 너는 뭐가 대단하고 완벽하고 엄청난지 알만큼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구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영원히 경험없고 어린 작은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백살이 되어도 인간의 경험이란 세상의 무한성에 비하면 작은 것이니까요. 감탄하던 저주하던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과 문화적 편견에 의해 형편없이 제한되어지고 변형되어진 세계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초등학교때 그토록 절대적으로 보였던 뭔가는 생각하나가 바뀌고 나서 돌아보면 별거 아닌 것이 됩니다. 절대적으로 보이는 것앞에서 좌절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더 성장할수 없는 패러다임에 도달했다는 선언을 하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건 없습니다. 

당연하지만 이건 대단해 보이는 남들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대단해 지기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다시한번 당신이 자신의 소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돌아갑니다. 좁은 세계에 갇혀있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마이클잭슨 흉내내기 대회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정의상 이길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행복하다면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마이클 잭슨을 적당히 흉내내며 사는게 따분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해답은 종종 당신의 마이클 잭슨 흉내가 완벽하지 못한게, 그렇게 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새 사람들은 이런 것을 잊어버립니다. 대단한 책을 보면서 아 이런 명작을 나는 죽어도 못쓸거야. 이건 완벽해라고 합니다. 대단한 피아노 음악을 듣고 아 이건 완벽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잃어버리고 그걸 흉내내려고 합니다. 그 흉내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흉내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만큼의 마이클 잭슨을 반복해서 흉내내어 마이클잭슨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가 죽을 때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자만이 있기에 스스로가 만든 벽앞에서 좌절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자기를 찾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이야기했던 서양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데카르트도 결국 우리가 진짜로 믿을 수 있는 것이 뭔가를 끝없이 의심한 끝에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에 흔한 말이란 없다.


앞에서 이러저러한 말은 흔한 말이다라고 해놓고 흔한 말이란 없다라고 하니까 좀 모순되게 들립니다만 진정한 의미에서, 넓은 의미에서 이 세상에 진정한 흔한 일, 흔한 말이란 없습니다. 왜냐면 같은 것도 다른 상황, 다른 문맥에 놓이면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목마를때 물 한 컵은 물을 잔뜩 먹고 난 후의 물 한 컵과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두개의 물 한 잔은 서로 다릅니다. 같은 말이라도 다른 문맥에서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일초 일초 다른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결국 계속 같은 말을 듣고 있어도 그걸 반드시 흔한 말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가지 조언의 말, 정신적 치료제가 돌아다닙니다. 그런 조언의 말이 무엇이든 그 말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그 말들이 놓여진 문맥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치과의사가 치료를 하면서 환자인 아이에게 아파도 꾹 참아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가 책을 내는 겁니다. 그 책의 제목은 아파도 꾹참아.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그냥 참으면 죽을텐데 저런 무책임한 메세지가 어디있냐고 야단입니다. 마땅히 '아프면 빨리 병원으로'가 옳지 않냐고 합니다. 치과의사는 억울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을 최근 베스트 셀러 책인 아파야 청춘이라는 책을 쓴 김난도 교수가 겪는 모양입니다. 오늘날의 청춘을 아프게 하는 기성세대의 일원인 김난도 교수가 아파야 청춘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김난도 교수는 제대로 된 문맥에서 자신을 봐달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대로된 문맥을 가지지 않고 책 제목만으로 김난도 교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잘못인가? 거기에는 또 생각해 봐야할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다이나마이트나 핵폭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쓴 사람은 대개 그 과학자 당사자가 아니지만 그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다이나마이트나 핵폭탄을 만든 사람은 내가 본래 이것을 통해 의도했던 것은 이게 아니라고 말할수도 있지만 그 사용에 대해 그래도 여전히 어떤 도덕적 책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습니다. 대량생산을 통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는 제목을 기득권의 메세지로 받아들이는 것같습니다. 즉 김난도가 그걸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다이나마이트를 만들거나 핵분열 현상을 발견한 사람이 그렇듯이) 그걸 사회적으로 강조하고 사용해서 아픈 청춘을 치료하는게 아니라 더 아프게 만든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참아라, 너희가 힘든건 세상이 잘못된게 아니라 원래 삶이 그런 것이다 이런 메세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정도까지는 분명 사실일수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사회현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작가와 독자 둘 사이의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많은 힘이 작용합니다. 누군가가 그걸 권하고, 누군가가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도록 지원합니다. 사회구조가 청춘들을 아프게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분명 또다른 문맥에서 사실입니다- 이런 제목의 베스트셀러는 기득권의 손에 들린 기관총처럼 느껴질수 있습니다. 장사를 하고 싶은 출판사는 책의 내용에 대한 오해로 청춘이 병들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책을 많이 팔아 돈버는 일에 주로 관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약은 그 약을 먹는 방식에 따라 독약이 될 수도 치료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은 결국 문맥에 따라 의미가 바뀝니다. 

이 글의 주제에 관련해서는 여기서 중요한 건 김난도 교수도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는 책도 아닙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자기를 찾아라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말 이미 지겹게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 지겹고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어떤 책이 나중에 읽어보니 너무나 깊은 감동을 주는 좋은 책이될수 있듯이 중요한 건 그 말을 전에 들어봤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그 말을 어떤 문맥으로 들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문맥들을 잘 보는 능력이 바로 스토리텔링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찾아서

이 세상에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친숙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모두 의식이 눈을 뜨는 그순간부터 나라는 이 존재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치면 나라는 존재는 종종 여러 존재 가운데에서 우리가 보통 흔한 말이라고 말하는 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흔한 말이 보통 무시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우리를 보통 무시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서 의미를 찾기가 더욱 힘들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나의 의미는 결코 나라는 존재가 진공속에 존재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최고의 프로 농구선수라면 나는 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내가 대단한 농구선수인것 이상으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나 자신하나에 의해서 결정되는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 놓여진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곰곰히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가 결국 온세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백설공주는 백설공주라는 이야기 전체의 모든 세부사항과 관련을 가지고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백설공주만 있고 이야기가 없으면 백설공주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날 당신에게 누가 찾아와서 말하길 이세상에는 아주 희귀한 열성유전자가 있는데 그 유전자를 유일하게 가진 사람이 당신이며 인류는 그 유전자를 보존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갑자기 당신은 스스로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일을 합니다. 한국인으로서 어느 가문의 일원으로서 어느 지역의 일원이라던가 하는 이유로 스스로에게서 의미를 발견합니다. 누군가를 돌봐줘야 하는 엄마나 남편이나 아내로서 스스로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학자나 예술가로서 자신은 이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어떤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당신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역사책속에서도 남지 않을 것이지만 당신은 이 세상이 지탱되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을 묵묵히 어두운 곳에서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의미를 주는 자신을 발견하는 문맥이고 그 문맥이 파괴될때 우리는 종종 더 살기가 힘들어 집니다. 자살이란 문맥이 파괴된 상황입니다. 

사람에서 눈을 돌려 책을 봅시다. 동화책이나 만화책은 시시한 책이고 천페이지 짜리 역사책이나 유명한 철학책은 대단하다고 반드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식한 거지의 삶도 가르쳐 주는 것이 있고 그것이 가장 심오한 철학책의 메세지보다 더 심오할 수 있고 만화책에도 진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그 진리는 내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과 나와의 관계,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문맥에 있습니다. 진리를 볼수 있는 눈만 있다면 우리는 수많은 흔한 말, 저속한 책, 저속한 사람들에게서 의미를 주는 문맥을 봅니다. 심지어 그 만화를 그린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의미도 봅니다. 어린 아이가 배고프면 밥먹으라고 말하는 소리안에서도 진리를 찾을지 모릅니다. 

마찬가지 의미로 해서 이 세상에 대단한 사람이 있고 흔한 말처럼 없어도 그만일것 같은 의미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말은 단지 우리가 그 사람이 세계에 관여하고 있는 문맥을 발견하는데 실패했다는 뜻, 우리가 그걸 볼 눈이 없다는 뜻일 뿐입니다. 

맺는 말

현대사회는 자유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사회 관계가 없는 단순한 존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애초에 사회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자유입자의 합처럼 서로에게 무관한 개인들의 합으로 생각하는 사고 자체가 그런 사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롤즈의 정의론을 보면 거기서도 사회적 정의란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 두눈을 가리고 정하는 법칙이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문화적 붐을 유지하고 있는 서구문화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개인들에게 자신의 의미를 찾는 문맥을 상실되게 만듭니다. 이런 것은 결국 경제와 윤리를 분리 시켜서 자본주의의 파국이 몰려오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결국 몰락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소리를 찾는 것, 자기를 찾고 지키는 일이 더더욱 소중해 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 나는 이 글에서 문화적 패러다임을 찾고 그것을 확장하는 일이나 관계의 소중함을 느끼고 그 관계속에서 의미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제가 항상하는 말이지만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최고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외롭다는 말과 그리 틀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물론 청소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게에 손님이 온다는 것은 아니듯 이런 것을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자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론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이 또한 남을 흉내내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내 인생이 내 것이 되고 내가 나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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