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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공상과학과 자기소개가 말하는 현대

by 격암(강국진) 2012. 12. 26.

예전과 지금은 아무래도 이것 저것 다른 것이 많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으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게 되는 것이지만 또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혹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살게 될것인지를 말해주는 면이 있는데 바로 공상과학소설과 자기소개가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의 꿈

 

먼저 공상과학소설을 보자. 요즘은 공상과학소설 즉 SF의 인기가 훨씬 덜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이말은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라는 믿음이 약화되었다는 것 혹은 반세기 정도 전에 세계인들은 특히 서양인들은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은 과학이라면 이런 저런 일을 해결해 줄거라면서 상상을 하거나 다가올 과학이 만들어 내는 미래따위를 상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것이 지상낙원이나 유토피아를 상상한 것이든 아니면 어두운 미래나 디스토피아를 상상한 것이든 과학이 거기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대해 큰 이견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하면 사람들은 꿈을 잊은 것같다. 할리우드는 따분하게 복고풍의 판타지를 재생산 할 뿐 뭐하나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않는 느낌이고 그나마도 인기도 별로 없다. 사실 과학뿐만아니라 로맨스도 죽은 것같다. 이제 현대인은 과학이 주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낭만적인 사랑도 믿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최근에 가장 히트친 소설은 해리포터같은 마법사 이야기다. 흡혈귀 이야기도 인기인 것같은데 그런 이야기들은 재미는 어떤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이런 세상이 곧 올거야라는 현실성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보다 적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과거에는 미래에 대한 꿈을 외쳤다면 요즘은 어느새 코앞의 경제문제를 보라는 이야기만 가득하다. 이것은 이미 1980년대 이래 It 붐을 제외하면 세계가 큰 꿈을 본적이 없으며 그 it 붐이라는 것도 요즘에 보면 지나친 거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른것이긴 할테지만 20년 쯤 전에는 훨씬 자신만만한 사람들이 눈에 잘 보였다. 예를 들어 로봇이나 인공지능의 연구가 급진전되어 곧 우리는 상상 할 수 없는 미래를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소리가 좀 더 자주 내 귀에 들렸던 것 같다. 그들은 인공신경망이나 상온 초전도체로, 상온핵융합이나 게놈프로젝트로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떠들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문제가 산적한 세상을 살고 있다. 사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멸망 운운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음산한 시절이기까지 하다. 훗날의 역사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를 꿈과 희망을 잃고 세기말적 음울함으로 가득 채워진 시대 같은 말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세상에는 이런 저런 꿈을 쫒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간단히 폄하하거나 할 수는 없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언제나 꿈은 도저히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걸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룩한 것이다. 미래는 모른다. 세상사람들이 내년이라도 또 어떤 믿기 힘든 기술이나 과학적 꿈에 모두 매달리게 될지 모른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그래야 한다. 과학은 발전해야 하고 무엇 보다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니까. 나는 단지 세상의 유행이 그렇지 않나 하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

 

이 세상은 여러가지 흐름에 의해 바뀌어왔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어떤 특정한 인물로 대표되곤한다. 예를 들어 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는 it산업을 대표하는 이름이고 아인쉬타인은 현대과학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포드는 자동차산업을 대표하고 링컨은 자유와 평등한 국가라는 미국이념의 대표이며 간디는 식민지 해방을 대표한다. 이들은 개개인이 물론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 개개인이 역사를 만들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들은 세상의 필요에 빨리 호응한 사람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오늘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아인쉬타인이 아니라 간디에 가까운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과학을 통해 추구하는 풍요는 인구증가와 환경파괴라는 문제 앞에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온 핵융합이라도 성공하거나 어디선가 엄청난 에너지 자원이 발견되어 다시 에너지 가격이 급락하더라도 그렇게 만들어낸 풍요가 이번에는 지구를 완전히 파괴할것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발전이란 마치 당뇨병 환자에게 주어질 사탕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더 이상 사탕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탕이 더 있어도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라 더 심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기적 같은 기술로 우리의 생명이 천년으로 연장된다면 지구는 행복한 별이 될 것인가. 지구 곳곳에서 흐르는 피가 오히려 증가할 느낌이 드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인가.  

과도한 소비로 비틀거리는 선진국은 몰락하는 왕조를 연상시킨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가난한 국가들은 식민지 해방이 있기전의 식민국가들을 연상시킨다. 더 많이 생산하기보다는 어느새 좁아진 이 지구에서 모두가 어떻게 공존해야 할 것인가하는 점이 심각한 문제, 시대의 문제인 것 같다. 특히 자유주의의 이상은 과학적 발전의 전망과 함께, 미국의 영화와 함께 빛이 바래지고 있다. 진정한 자유시장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되어졌다. 세상은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나를 소개하는 방식

이쯤에서 과거와 오늘이 다른 것 하나를 다시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바로 자기소개다. 요즘에 누구냐고 묻거나 자기를 소개할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직업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뭐뭐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서로에게도 뭐하시는 분이냐고 묻는다. 그런데 우리가 조선시대의 사극을 본다고 해보자.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면 뭘 말했을까. 그건 아마도 저 웃마을에서 온 아무개라던가 정대감 댁의 세째 아들인 아무개라는 식이었지 않을까. 즉 정도의 문제겠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에서 그 사람이 행하는 역할, 기능이 강조되는 반면 과거에는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가 강조되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자던가 미화만 하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대개 우리는 불공평한 입장을 가진다는 점은 기억해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공평한 입장은 아닐지라도 절대적으로공평한 입장은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항상 어떤 시각에서 과거를 본다. 직업을 묻는 이 세상의 사람들, 서구적 자유주의가 세상에 가득해진 요즘의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을 먼저 말하는 과거를 보면서 능력이 아니라 배경이 강조되는 사회,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윤리만 강조하는 사회로 이야기하고 끔찍한 악몽처럼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또한 동시에 윤리는 망각되고 무한한 자유와 단일한 세계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절대선으로 생각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요즘 대기업의 동네상권 장악에 대한 이야기나 FTA같은 이야기를 하면 그런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진보고 정의라고 당연한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동시에 자유주의를 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곤 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가진 발상의 근본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따라서 결국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적선을 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라는 정도에 머문다. 누군가를 기본적으로 적선을 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그들은 오히려 상대방을 차별하고 좌절시키는 일을 가속화 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선을 행한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거지로 만들고 또한 결국 그 자유주의적 팽창을 막을 방도도 없다. 그들이 불 끄는 소방관이라면 그들은 불을 끄기보다는 불 앞에서 절하고 불이 좀 그만 번져주시면 좋겠다고 부탁하면서 불에다가 땔감을 바치는 그런 소방관이다. 대기업에게 하소연하면 그들의 선의 때문에 작은 자영업자들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얼마나 계속 될까.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한 반대는 생명체적, 공동체적 입장에서 여러 테두리의 공존을 주장하는 것 밖에 없고 그것의 핵심에는 공동체의 정체성 즉 윤리와 가치의 문제가 있다. 단순히 미국 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악이고 한국 차를 미국에 파는 것은 선이라는 시각은 침략적 제국주의다. 내가 어디가서 장사하는 것은 내 자유지만 남이 우리동네에 와서 장사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하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여기와 저기가 다르다면 그것은 다른 가치적 판단아래 의무와 권리에 대한 다른 윤리적 규칙이 존재하며 그것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만 거기 있으면 거기에 지역사회가 있다고 할수는 없다, 평상시에 공통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일이 없다가 갑자기 지역상권을 지켜야 한다면서 이마트같은 대기업 슈퍼에 반대한다고 하면 얼마나 힘을 발휘할 것인가.

결국 여러 공동체의 각개 공존에는 바로 우리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윤리의 문제가 핵심이다. 김가네 자식이라고 하면 믿고 돈을 빌려준다면 그것은 김가라는 집단의 일원은 그 집단의 윤리적 규칙을 따르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에 합당한 압력과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종교적 규칙을 따르는 종교단체의 일원이라던가 엄격한 가족윤리를 지키는 집안의 자식이라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도 공동체의 규모가 어떠하다던가 어떻게 운영해야한다던가 하는 가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과거가 합리화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윤리코드는 다 악이며 난 자유가 좋다고서 자신있게 말하면서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신중한 것일까.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어쩌면 직업이 없는 소위 백수일지 모른다. 대학교 등록금이며 결혼자금때문에 큰 빚을 지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중국인 노동자와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훨씬 훌룡한 노동조건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런 것이 어떻게 합리화될수 있는가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을 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현실이 단순히 금전적 문제 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의미 자체를 위협해서 자살같은 극단적인 선택도 이따금 생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나 그녀는 그들이 말하는 고리타분한 윤리가 어떻게 자기의 현실과 연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의 상당부분은 그 테두리에 의존하고 있는대도 말이다.

 

버블 팽창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말이 사방에서 들린다. 자본주의의 종말 운운하는 말들도 같은 말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를 지켜주는 것, 정말 돈이 되고 집이 되어 주는 것은 그 답답해 보이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윤리다. 윤리란게 무엇이고, 그것이 공동체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의 살길이 열릴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윤리와 가치를 뭉뚱그려서 말하는 수단으로 우리를 소개할 때 보다 더 그 공동체를 소개하는 일이 많아 질 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상황에 따라 스스로를 말할 때 나는 한국인이라던가, 나는 기독교인 혹은 불교도라고 먼저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좋은 것은 이것이고 나쁜 것은 이것이라고 즉 좋고 나쁜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좋은 사람이 되자고 말하는 것으로 윤리의 문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버블 팽창의 시대가 저문 이후에, 공동체와 지역자치의 시대에 우리의 고민은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대가를 치뤄야 하고 그 댓가는 바로 자아의 상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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