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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살고 싶은 마을

집을 다시 생각해 보며

by 격암(강국진) 2013. 1. 19.

한국에서 집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뉴스하면 경제고 경제하면 부동산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서 집에 대한 관심이 늘어서 집을 사거나 짓거나 하지는 않지만 관찰하고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좋은 집이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 문화, 사회적 문화.


화면이 큰 스마트폰이나 mp3가 일반화된 지금은 거의 의미없는 기계에 가까워 졌지만 한국에는 pmp라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대로 이 기계는 스마트폰의, 정확히 말하면 아이폰의 도입과 함께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퇴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았을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pmp와 스마트폰의 차이는 터치감이 좋다던가하는 식으로 기계의 성능의 문제가 주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은 극복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차이는 보다 유기적인 것, 그런 것을 문화적인 것이라 불렀을 때 문화의 문제였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불법다운로드 컨텐츠가 풍부한 한국은 그 컨텐츠를 담아다가 혼자서 보는 기계인 pmp가 먼저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폰이나 아이포드는 pmp가 개인적이라면 보다 사회적인 기계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애플이 개발자와 배급자, 소비자가 이익을 나누는 아이튠즈라는 생태계를 만들었다는 것 이상으로 그렇습니다. 


전기가 없는 나라에 가면 전기 장판은 소용이 없습니다. 습도가 매우 낮은 나라에 가면 가습기를 설치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이렇게 어떤 물건은 그 한개의 물건이 단독으로 존재하고 기능할수도 있지만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기능을 발휘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적인 요소와의 결합이 보다 강한 것이 바로 제가 보다 사회적이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반드시 사회적이 되어야만 하고 사회적이어야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발달역사를 보면 개인들이 따로 따로 쓰는 pc와 중앙컴퓨터와 연결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쓰는 단말기가 경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단말기는 중앙컴퓨터와의 연결이 없으면 방송국없는 티브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보다 사회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역사적으로 pc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건희라던가 혹은 빌게이츠쯤 된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타겠다고 지하철놓고, 혼자서 보겠다고 방송국을 만들어 드라마를 만들수는 없습니다. 보다 사회적인 것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개인적으로 혼자 존재하는 것은 무력화 됩니다. 바로 pmp가 스마트폰이나 전화기능이 없는 스마트폰인 기계에 밀려나는 이유입니다.


pmp는 그저 어디선가 구한 컨텐츠를 혼자보는 기계지만 스마트폰은 연결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소식을 듣는 트위터나 카카오톡같은 어플이 강력한 쓸모를 발휘하게 됩니다. 사진을 찍는 다는 행위는 내가 그것을 개인적으로 보는 범위를 넘어서 그것을 쉽고 빠르게 다른 사람에게 전송할수 있다는 기능이 됩니다.  사람을 연결하는 기계가 흔해지자 그것은 광고를 보낼수 있는 창고가 됩니다. 국민게임이었다고 할수 있는 애니팡같은 게임도 핵심은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하트를 주고 받는 기능이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이패드나 스마트폰은 전화기능을 제외하면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즉 컨텐츠 소비용기계라는 점에서  pmp와 다르지 않지만  연결되어 소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돈을 지불하고 컨텐츠를 보게 하는 것이 정착되면서 컨텐츠의 생산과 소비를 결합시킵니다.  


집은 문화다.


집에 대해 생각한다면서 스마트 폰을 이야기한 이유는 집이란 무엇인가 라는 생각에 대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없는 나라에서 전기장판이 소용없듯이, 핸드폰 기지국이 없는 곳에서 핸드폰이 소용없듯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외국의 어딘가에 있는 멋진 집은 그걸 그대로 한국에 가져다 놓았을 때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될수 있습니다. 


한국의 기후나 생활 환경을 생각하면 그런 집은 마치 더운 두바이에서 유지하는 실내 스키장처럼 유지비용을 엄청나게 쓰지 않는한 사용할수 없는 물건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생활환경이란 누구나 생각해 보면 알수 있듯이 당연히 건물과 마당과 담장안의 공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문에 학군따져서 이사를 가는 거 아닙니까? 그때문에 어떤 이웃이 사는가를 주목하고 어떤 상가가 있는지, 교통은 어떤지를 따지는 것 아닙니까? 그때문에 지하철이 들어오니 마니에 따라서 지역의 집값이 달라지는거 아닙니까?


한국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아파트입니다. 극히 최근에 본 전원주택 붐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사는 집이란 대개 아파트를 의미했습니다. 이 아파트가 가지는 장점이나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을 터입니다만 지금 이순간 중요한 것은 아파트를 한국의 주요한 거주문화로 만들었던 환경들이 변했고 더욱더 변해 갈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거품의 붕괴가 그것입니다. 부동산 가격은 벌써 4-5년간 대개 제자리거나 내림세입니다. 지금 신문들은 너도 나도 앞다투어 부동산에 투자해서 수익을 보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합니다. 폭락할지는 몰라도 크게 오르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아파트가 가지는 큰 의미중의 하나는 거래의 손쉬움입니다. 표준화되어있기 때문에 강남의 몇평이라고 하면 대충 가격이 나오고 거래가 손쉽습니다. 전원주택같은 물건은 같은 평수라도 어떻게 돈을 들였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과는 다릅니다. 전원주택은 그런 의미에서 돈을 들인만큼 나중에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인구구조상 불룩튀어나온 베이비붐 세대는 이제 아이를 다 키우고 은퇴합니다. 게다가 젊은 세대의 출산율이 낮아지니 이것은 학교라는 조건이 주거환경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현실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획일화된 아파트는 사실 애초에 가난한 나라에 어울리는 집이지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집이 아닙니다. 자신만을 위한 주거 환경을 가꾸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바꿔봐야 거기가 거기인 아파트를 벗어나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싶을수 있습니다.


답없는 건축주


건축설계사들의 기사를 읽어보면 항상 건축주와 대화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냥 집을 잘 지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건축설계사는 건축주와 대화해서 어떤 집을 원하는지에 대해 듣고 그에 맞춰서 집을 설계합니다. 


그러나 당연해보이는 이 사실의 밑바닥에는 깊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파트라는 거주문화가 독재해온 한국에서는 주거문화라는 것이 거의 발달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교복을 입고 산다면 패션이라는 것이 발달할수는 없겠지요. 때문에 건축주도 심지어 건축설계사도 문화에 대한 생각이 없거나 대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남이 내 생활방식을 결정해 줄수는 없는 것이니 건축설계사를 그저 멍하니 쳐다볼수만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을 짓겠다는 사람은 단독주택을 짓는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보다 개인적인 삶에 소홀한 한국사회의 현실속에서, 그저 막연히 좋은 집에 대한 동경이 있을 뿐 자기 생활이라는게 없는 경우가 있을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가 없으면 집도 없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일자리로 가서 잠자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며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잠자기, 티브이보기, 인터넷 하기가 전부입니다. 이 사람은 일을 빼면 자기가 없습니다. 자기가 없는데 그 자기를 담을 그릇이 뭐가 필요합니까. 어떤 사람이 다리가 없는데 멋진 구두를 디자인 하는 디자이너를 불러다가 어떤 구두를 만들까하고 생각하는것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조용히 책을 읽거나 혼자있을 공간을 즐긴다면 집에는 그런 곳이 필요하겠지요. 커다란 화면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즐긴다면 그런 감상을 고려할수 있으며, 친구를 불러다가 파티를 즐긴다면 그것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아이를 키우지만 부부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낭만적인 삶도 가지고 싶다고 한다면 집의 구조에 그것을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요리를 즐기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면 집의 구조에 그것을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문화적으로 극히 단순하다면 집이란 운전면허없는 사람이 사놓은 고급 스포츠카 같은 것이 됩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화는 보다 사회적인 것이 되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합니다. 지하철이 있으면 주거환경이 달라지듯이 지역에 육아공동체가 있고 그런 시설이 있다면, 좋은 도서관이 코앞에 있다면, 좋은 공원이나 산이나 바다나 강이 코앞에 있다면 내 집에 모든것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개인 혼자서 버스노선만들고 지하철 만들지 않듯이 사회적인 고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주거문화를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질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수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가운데 답이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내가 돈이 있다고 어딘가에다 땅사고 건축설계사에게 막연히 좋은 집 지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닙니다. 지하철과 거대쇼핑몰이 있으면 무조건 좋은 주거환경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전원주택 붐도 이제 10년은 된 것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붐이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 나온 전원주택을 보다보면  전문가가 아닌 제눈에도 실패한 집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야심차게 집을 지었고 투자를 했지만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아 매물로 나와버리고 맙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지역주민과 알력이 생겼다던가, 그저 멋지게 한적한 곳에 집을 지었는데 살아보니 너무 무섭고 외로워서 살수가 없다던가, 언뜻보면 멋있지만 도무지 뭘 생각하고 지었는지 집의 구조가 엉망진창이어서 공간의 낭비가 심각하고 따라서 별로 살기 좋지 않다던가, 난방비가 천문학적으로 나온다던가, 관리하기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집이 되버리고 말았다던가 하는 경우는 쉽게 볼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배나온 뚱뚱보 아저씨가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비키니를 주문하면 쓸모가 없는 물건이 되고 말겠지요. 비 안오는 나라에서 우산을 잔뜩 사둬봐야 쓸모가 없겠지요. 그런 꼴이 난겁니다. 


개인적 자아 찾기, 사회적 자아 찾기


나를 찾는 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질문에 대해 답이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나를 찾는다는 것의 의미가 주어진 질문의 맥락에서 뭘 의미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한국에는 은퇴한 베이비부머가 늘고 노령인구가 늘고, 여유시간과 자금이 있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아찾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정체성을 온통 채워버리던 직장이라는 것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몰입하여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직장이 사라지고 자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은 나쁜 것을 넘어 더욱 위험한 것이 될수 있습니다.


텃밭은 텃밭을 가꾸는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소용이 있습니다. 서재는 책을 수집하고 읽는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소용이 있습니다. 걷기에 좋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공원은 그런 곳에 나가서 시간을 쓸 의향이 있는 사람에게 소용이 있습니다. 좋은 부엌과 식탁이 있는 공간은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소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일로서 하던, 재미로서 하던, 그 둘다이건 뭔가를 해야 사람은 살아갑니다. 사는 재미, 사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주거문화의 빈곤이란 한국인의 삶의 빈곤을 보여줍니다. 극빈에서 벗어난지는 한참이지만 여전히 삶이 빈곤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놀이 문화가 없어서 가족들이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르고, 요리를 즐기는 문화가 없어서 주로 술먹고 토하고 쓰러지는 것이 흥겨운 시간을 대표한다는 것은 삶의 빈곤입니다.


육아공동체 이야기도 있고 꼭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답이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요즘 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면 과거의 집성촌이나 대가족제도가 그리울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고 쓰는가, 동시에 어떻게 가난해 지는가. 어떻게 누군가의 직장을 없애고 나의 직장도 없애버리는가에 대한 고민 즉 삶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비싼 스포츠카가 없어도 작은 식당이나 보드게임을 가족과 할수 있는 테이블 정도면 행복을 찾을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라는게 뭔지에 대해 신뢰가 뭔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밋밋한 일년을 여러가지 축제와 명절을 즐기며 보냈습니다. 우리가 외국의 리조트로 놀러다닌다고 해서 과연 그들보다 더 현명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도 농어촌 지역에 가보면 식당하나 제대로 된것은 없는데 여자나오는 다방이며 노래방이며 술집만 가득한 지역이 있다고 합니다. 의미를 잃고 외로워진 노인들의 자살률도 세계1등 수준입니다. 도시라고 해도 과연 서울이 부산이 대구가 인천이 제대로된 문화도시인가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집을 구하는 첫번째는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아야 자기를 담을 그릇이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내 몸 사이즈를 알아야 옷을 살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뭘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를 자극하는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집이란 그저 가장 비싼 감옥이요 족쇄가 되버리고 말것입니다.


두번째는 개인적으로 아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를 반성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바다가 있어야 요트도 있고 유람선도 있듯이 사람사는 세상이 되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집한칸 멋지게 짓고 살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바닥입니다. 온세상이 내가 가꿔야 할 내 집입니다. 고민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는 그런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지금보다 좋은 집 한번 짓고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좋은 주거문화를 물려 줄수 있는 어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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