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돈, 언어, 아파트, 편리한 것의 함정

by 격암(강국진) 2013. 4. 16.

2013.4.16

오늘날 우리는 대개 돈의 흐름에 주목한다. 내가 돈이 얼마가 있는데 이걸 이렇게 저렇게 굴리면 그 돈이 얼마가 되겠다, 이만큼은 써도 이만큼이 남는다 하는 식으로 돈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을 쓴다. 돈은 다른 물건들과 편리하게 교환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편리함에 젖어서 점점 더 돈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고 돈만을 과도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론 돈도 중요한 것이지만- 오류가 발생하곤 한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나,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라는 격언을 떠올려 보는 일들이 이 오류 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너무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항상 흔한 오류를 극복하는데는 천천히 보고 생각하는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돈이 있으면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과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깊은 산속에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지폐가 컵라면이나 참치캔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가게를 찾아야 하고 돈과 그것을 교환해야 한다. 물자가 귀하고 가게가 드물던 시절에는 이것이 더욱 더 그랬다. 물건을 구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인맥이 좋고, 수단이 좋은가에 달려 있었다. 물류나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능력이 가치가 높았다. 물론 그런 능력은 전문적으로 상거래를 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고 아예 인터넷 거래가 생겨나면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돈이 저절로 만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돈은 이런 사회적 인프라와 결합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돈은 겨우 표준적이고 시장적이고 객관적인 가치만을 반영할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많이 애매한 것이다. 사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시장의 평균이니 균형이니 하는 것도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예를 들어 양파가 품귀현상이 보인다는 소문이 돌면 소문 때문에 즉 사람들의 심리때문에 시장가격이 오를 수 있다. 이럴 때 이 가격이 표준적이고 객관적일까? 물론 더욱 분명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그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이다. 하나의 낡은 의자는 시장가격으로는 거의 가치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자가 많은 개인적인 추억을 가진 물건이라고 할 때 나에게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돈 즉 가격이 어떤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반영한다는 생각에 너무 속으면 우리는 사물의 가치를 보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저 가격이 높으면 좋은거구나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흉칙한 물건이라도 1억짜리 모자라면 자랑스러워 하며 쓰고다니는 식이다. 좋은 집이란 그저 비싼 집을 말할 뿐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스스로 이따금 자기를 봐야 한다. 우리는 돈의 편리함에 빠져서 뭐든지 돈으로 환산하고 돈중심으로 생각하느라, 실제보다 너무 많은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치를 객관화하고 표준화하는 일을 당연시 하며 자신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비웃으며 자신이 무슨 대단한 지식이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오만해 진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뉴튼 방정식 몇개 외우고 누군가가 요정을 봤다던가 강의 신령이 있다던가 부모의 혼령이 우리를 본다던가 하는 말을 들으면 그것들을 간단히 헛소리로 말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요정이나 신령이나 혼령을 믿으라고 하는게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숲에는 한 요정이 살았습니다라고 할때 거기에는 문맥에 따라 어떤 의미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관점에 따라서 과학과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유전자론인 밈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밈이 존재하냐 안하냐에 대한 의견차는 있어도 그것이 절대로 말도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밈이 분자로 되어 있는가? 거기에 무게가 있는가? 유행하는 음악이나 패션등에 대해 여러가지 가치판단을 할 때 어떻게 그것을 물리적으로 해석하는가? 얼치기로 물리공식 몇 개 외우고 이제 우주는 이렇게 움직인다는것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무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돈의 편리함에 빠져서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돈으로 경제학으로 환산하는 함정에 빠지고 어느새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단계에 이르르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장님이 된다. 머리로는 '그래 나도 알아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쯤'하고 생각하지만 스스로가 이미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감각장애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뭔가 비싸다 안 비싸다로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것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사람들을 유령을 믿는 미친 사람들로 생각하기 일쑤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런 모습을 거대 개발에 중독된 사람들에게서 자주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환경문제니 역사문제니 문화문제니 하는 이야기는 종종 유령에 홀린 사람들의 헛소리처럼만 들리는 것이다. 갯벌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 거기를 싹 밀어버리고 깨끗하게 아스팔트 깔면 얼마나 속시원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내가 유령의 존재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듯이 개발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장님이고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 밀어부치는 개발은 위태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발에 뭐가 밟혀도 그걸 못느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눈을 뜨고 감각을 개발해 내는 일이다.

 

이 것은 돈이 너무 편리해서 생기는 일이다. 오른쪽 팔이 쓸모가 있다고 계속 오른쪽 팔만 쓰다보면 왼팔이 운동부족으로 시들어 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돈이 편리하다고 그것에 목을 매다보니 우리는 점점 장님이 되어간다. 돈으로 환산 안되는 것들은 점점 유령처럼 되어가더니 보이지 않게 된다. 돈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그것들 때문에 죽고 말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지역공동체의 화합따위가 뉴타운개발같은 것으로 파괴되고 나서 사는게 비참해 질 수 있듯이 말이다. 딱한 것은 일단 장님이 되고 난 사람은 사는게 비참해져도 종종 자기가 왜 살기 힘든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장님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두가지만 간단히 언급해 보자. 하나는 언어다. 언어는 편리하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은 언어 이전의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체험과 생각을 표현하고 정보를 교환할 뿐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체험에 대한 글을 백권을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체험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언어에 빠진다. 언어자체가 실체가 된다. 그러고 나면 조악한 자신의 언어능력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장님이 된다. 누군가가 던지는 말의 노예가 된다. 좌파 우파로 세상을 구분하면 갑자기 너는 좌파냐 우파냐만 따지고 있게 된다. 그런 구분을 넘어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회주의자로 인식하는데 그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조악한 말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구분이 안간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아무 차이가 없다. 박원순과 오세훈은 아무 차이가 없다. 천불상이란 천개의 불상을 말한다. 손으로 만든 천불상은 같은게 아무것도 없다. 눈먼사람은 그런데 마치 거기에 머리가 큰 대두상과 머리가 작은 소두상이 있다는 식으로 구분하고 대두상은 다 똑같고 소두상은 다 똑같다라는 식으로 본다. 

 

세상을 보는 틀이  이렇게 과감 단순하니까 소매치기나 살인범이나 다 똑같이 범죄자가 된다. 배고파서 빵을 훔친 장발장이나 수천억 수조씩 해먹고 호의호식하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도둑놈이 된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연이 있다. 각자는 자기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다 있다. 그 이야기들을 모두 포용하는 관점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단순무식하게 칼로 쳐서 수없이 많은 피해자를 만들고 원래 정치가 그런 것이니, 원래 장사가 그런것이니, 원래 시장논리가 그런 것이니, 원래 노동운동이 그런 것이니 하고 말을 하면 세상에 비극은 계속 반복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편리해서 빠져든 것의 또다른 예에는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의 대표적 특징은 표준화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일종의 유가증권같은 역할을 했다. 강남 몇평 아파트면 얼마 하는 식으로 가격이 딱 나온다. 물론 사소한 가격조정은 있으나 지은지 몇년되었다라던가, 인테리어에 돈을 얼마 들였다던가, 아파트의 구조가 어떻다던가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단독주택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구조가 워낙 집마다 달라서 똑같이 생긴 아파트가 수없이 많은 아파트와는 달리 비교상대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표준화가 억지로 완성되자 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유가증권 혹은 은행의 역할을 한다. 모두가 아파트를 사고 판다. 자신의 자산을 대부분 아파트에 저금한다. 아파트가 지어지기도 전에 돈부터 내는 선분양제로 집을 산다. 그러는 가운데 아파트는 본래 집이며 주거의 편리성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란 부분은 상당부분 무시된다. 건설에 하자가 있어도 집값떨어질까봐 항의를 안하고 싸구려 인테리어로 지어준 집에 불평 안하고 돈을 지불한다. 바로 다 뜯어고쳐서 버리느라고 새 인테리어들이 써보지도 않고 뜯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돈과 언어를 믿듯이 아파트의 영원함을 믿는다. 그러나 돈이든 언어든 아파트든 영원하지는 않다. 어떤 사람이 정신차려보니 자신은 돈때문에 눈이 멀어서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들에 장님이 되어있었고 그때문에 결국은 돈도 벌지 못했다라는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다. 건강이 망쳐지거나 가족이 망쳐지거나 명예가 사라지거나 혹은 길고 긴 인생을 모두 고스톱판에서 시간쓴 것처럼 허망하게 보냈거나 해서 말이다. 언어에 속아서 이념에 속아서 십수년 수십년 인생 보낸 사람의 이야기도 새로울 것은 없다. 뭔가를 수십년 미워하고 그것과 싸웠는데 눈을 뜨고 보니 세상에 그런 것이 없더라 같은 이야기다. 결국 자기 자신만 괴물을 만들었을 뿐이다. 

 

아파트에 빠진 사람은 하우스 푸어라고 종종 불린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파트는 당연히 재건축이 되고 불사조처럼 부활하는 물건이며 따라서 지은지 10년이건 20년이건 가격이 변하지 않는 그런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게 되었다. 아파트건 단독이건 집은 감각상각이 존재하는 소비재라는 인식은 아파트가 유가증권같은 물건이라는 믿음에 금을 가게 만든다. 은행의 부도나 마찬가지다. 

 

편리한 것들이 우리를 장님으로 만든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려면 모든 걸 천천히 봐야 하고 장님인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에서 약간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라고 척척 이름붙이는 습관에서 벗어나서 최대한 모든 것을 판단 이전의 상태에 놓고 상황을 느낄 필요가 있다. 뭐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가? 장님이 행복해 지는 이야기는 로또 맞아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세상에는 이 로또 맞은 사람들 이야기가 광고로 많이 나오지만 대개의 사람은 그정도로 운이 좋지 않다. 자기 발밑을 살피며 걷지 않으면 얼마지나지 않아 넘어지고 만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