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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한옥 한국의 집을 둘러보고

by 격암(강국진) 2013. 11. 4.

2013.11.4

 

구글문화연구원에서는 한옥을 한국의 집 한옥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소개하고 있다 (buff.ly/1aJ2zwa  여기에 가면 둘러볼수 있다.) 여기서는 명재고택이라는 조선시대 중기의 상류층 집을 소개 하는데 나는 여기를 둘러보면서 한국인의 집은 어떤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먼저 말해 둘 것은 나는 내 손으로 집을 지어봤다던가, 장기적으로 한옥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한옥은 좁고 춥다고 불평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게 가능이나 한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글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면 되겠다는 획기적이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놓을 능력이 없다. 또한 과거의 한옥 그대로 살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느끼고 보는 관점에서 한옥이란 것에 대해 다시 소감을 적을 뿐이다. 그것은 주로 최근에 내가 관심을 더 가지게 된 한가지 관점 때문인데 그 새로운 관점이란 작은 집짓기와 자발적 가난을 통한 부유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 않는 싸고 행복한 집이란 어떤 것인가, 약간 포기하고 약간 불편함을 감수하면 오히려 자유롭고 풍요롭게 사는 것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가지는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한옥이며 전원주택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건물 자체의 기본적 특징이다. 옛날 고택은 여러채로 되어져 있고 물론 경우와 목적에 따라 여러가지의 한옥들의 배치가 가지는 특성과 의미를 현대에 되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단독주택에서 살아가는 것도 드문 현대 한국에서 넓은 대지에 여러채로 이뤄진 저택을 짓고 살아갈 한국인은 드물다. 그렇다면 건물 자체의 모양은 어떨까. 한옥의 생김새란 이제 그저 시대에 뒤진 낡은 것에 불과한 것일까. 

 

한옥의 모양을 좀 살피면서 나는 즉각 당황하게 되었음을 고백해야겠다. 한옥은 종종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집과는 정반대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최대의 공간을 집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집은 정사각형으로 된 집이다. 집을 원으로 만들게 아니라면 가장 주변의 길이가 짧은데 비해서 안의 공간이 크고 단순하니까 집에 하자가 생길 여지도 줄어들며 건축비도 싸진다. 

 

그런데 한옥은 길게 일자형이거나 기억자 모양이거나 우물정자 모양같은 것을 가진다. 한옥은 지붕밑의 공간을 최대화하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바깥과의 노출을 최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나에게는 미스테리였다. 내가 보기에 그 미스테리의 답은 온돌에 있다. 그리고 그 미스테리를 풀자 한옥의 구조란 내게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효율적인 삶을 위한 미래형 주택인 것이 아닐까. 

 

한옥의 특징은 온돌과 마루에 있다. 중국에도 온돌 비슷한 것이 있으나 한국처럼 고대부터 온돌을 쓰고 그것을 발전시켜서 현대에까지 보편적으로 써 온 나라는 없다. 외국의 바닥 난방 시스템도 일제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서양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조선의 건물을 보고 배운 것에서 기원했다. 온돌은 한국 집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주거문화의  혼동상태에 있다. 그것은 주로 바로 뛰어난 난방시스템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온돌, 이제는 세계의 여러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쓰고 있는 이 온돌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서구의 건물들이나 가까운 일본 집들만 해도 온돌을 전제로 건물을 발전시켜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온돌없이 발전해 온 그들의 건물양식,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발달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그냥 수입해다가 쓰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에스키모가 더운 나라에서 발달한 냉장고를 수입해다 쓰면서 아무 생각이 없는거나 마찬가지 일 수 있지 않을까?

 

 

실내에서 땔감을 태워서 열을 얻는 난방시스템이란 것이 뭘까. 난방시스템은 집의 형태와 생활양식에 엄청난 제약을 가한다. 산소를 방안에서 소모시키는 불을 작은 방안에서 쓴다면 우리는 금방 질식하게 된다. 그렇다고 창문을 열면 난방의 의미가 별로 없다. 방에서 연료를 직접 태우는 집이 난방도 하고 어느 정도의 쾌적함을 달성하려면 집은 커야 한다. 그리고 물론 많은 연료를 소모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연료비도 건축비도 걱정할 필요없는 무한한 사치가 허락되는 인물라면 효율따위 별로 생각할 일이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결국 외국에서 서민의 집이란 자기방이 따로없는 커다란 원룸같은 곳에서 온 가족이 모여서 생활하는 생활이 되기 쉽다. 약간 좋아졌을 뿐 굴속에서 모닥불 피고 사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실제로 유럽의 서민들의 집은 그을음때문에 더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니 정말 굴속생활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사는 일본에도 옛날 집을 전시해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도 중앙에 불자리가 있고 그걸로 난방도 식사도 하는 생활이었다.

 

 

여기 커다란 방을 생각해 보자. 중앙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다. 그 방을 서너개로 쪼개고 각각의 작은 방에서 작은 모닥불을 태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환기가 안되는 작은 방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차에서 번개탄 피우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온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그 답이 전혀 다르다. 온돌은 방안의 산소를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창을 열어야 할 이유가 없고 같은 연료를 써서 따뜻하게 지내고 싶으면 오히려 바닥을 작게 만드는 쪽이 이득이다. 게다가 큰 온돌방을 서너개로 쪼개어 작은 온돌방 몇개로 만든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다. 

 

이걸 기억하면서 다시 그 한옥을 보면 이제 한옥은 매우 달라 보인다. 그것은 한 채의 집이 아니라 두세평짜리 초미니 집을 데크 공간으로 서로 이어놓은 모양처럼 보이는 것이다. 각각의 방이 사실은 하나 하나가 독채인 집으로 보인다. 아주 작을 뿐이다. 그걸 마루로 서로 연결해 놓은 것이다. 다만 그 데크는 지붕에 천정까지 잘 되어 있고 문까지 달려 있어서 전원주택의 데크 같은 것과는 많이 틀려 보일 뿐이다. 

 

우리의 옛 집에는 앉아서 바깥쪽 바람을 쐴 수 있는 대청마루나 쪽마루가 있고 온돌이 설치된 방이 있다. 우리는 온돌있는 방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바람이 잘통하는 마루, 늘어져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처마가 있는 마루에서 시원한 여름을 난다. 

 

사실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은 서로 상반된 요구를 한다. 추운겨울은 난방을 해야하니 안쪽에서 열이 빠져나가지 않아야 하고, 더운 여름은 공기가 잘통해야 시원하다. 그런데 겨울에 살던 집을 여름에 다시 지을수도 없고 두채의 집을 지어 겨울에는 여기살기 여름에는 저기 살기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를 우리 조상들은 온돌와 마루를 써서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해결했다. 외국의 경우에는 서민이 초미니 주택이라도 여러채 지어 가족들이 각자 자기방에서 사는 호사를 누릴 수가 없었다. 난방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게 가능하고 덕분에 가족 구성원들이 뚝뚝 떨어져 살면서 개인의 삶이란 걸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럼 여름에는 어떻게 하는가. 여름에는 초미니 주택을 서로 이어주는 마루 공간이 맡는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인 구조를 한꺼번에 보면 오히려 외부와 많이 접하려고 노력한 집처럼 보이고 각각의 방을 하나의 독채로 보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가진 초소형 미니주택들로 보이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런 가옥의 구조가 심지어 한국인의 윤리나 예절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분리와 차별이 없으면 예절이 생기지 않는다. 아이와 어른의 구별은 읽기와 쓰기가 보편화되면서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 읽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어른 아이의 차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차별할 수 없으면 예절도 없어진다. 예를 들어 공중목욕탕이나 해수욕장처럼 우리가 서로의 나신을 봐야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는 공간에서는 나중에는 그게 예절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합리화 된다. 가족이 각자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가족간의 예절이란 것을 발달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산다. 그리고 그 아파트는 물론 지붕밑은 곧 실내라는 서구식 개념으로 지어진 것이다. 아파트는 엄청나게 크지 않다면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허용되기 어렵다. 종종 평당 천만원도 가볍게 뛰어넘는 아파트를 서민이 크면 얼마나 큰 것을 사겠는가. 그것은 과연 현대한국인의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외국에서는 커다란 실내로 모든 물건들을 끌어들인다. 실내에는 옷장이며 침대, 소파가 등장한다.  요리도 당연히 불주변에서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실내는 오히려 반대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물건을 되도록 바깥으로 빼는 것이 좋다. 방안의 가구는 간단할 수록 효율적이다. 왜냐면 한국의 온돌이란 그 자체가 침대인, 소중한 난방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양도 침대위에 옷장을 두지는 않지 않은가.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살고, 바닥난방이 없는 서구에서는 침대를 쓰지만 한국은 이불을 썼었다. 이불은 자고나면 접어서 치워버린다. 그렇게 해서 되도록 온돌바닥위를 뭔가로 덮지 않는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방안으로 물건을 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루의 공간이나 광, 벽장 같은 공간을 써서 난방을 하는 방안에 물건을 채우지 않는다. 커다란 책상도 쓰지 않는다. 바닥에 놓는 작은 탁자를 쓸 뿐이다. 내가 한옥이 미래를 위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런 공간을 절약하는 면때문이다. 서구의 가옥은 사는 곳과 물건이 있는 곳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오늘날 우리가 하는 짓은 괴상하다. 우리는 기껏 바닥난방을 하는 방을 만들어 놓고는 그 방을 장이나 책상으로 채우고 거기에 커다란 소파나 침대도 가져다 놓기 일쑤다. 바닥난방을 하고는 그것을 가구로 덮는다. 이것은 그저 괴상한 짓에서 멈추는 것일까. 이게 다들 겨울만 되면 연료비 걱정을 하고 평당 천만원이니 이천만원이니 할만큼 집값이 비싼 현대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전원주택들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엄청난 난방비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서 근사한 집을 지어놓았지만 얼어죽을듯이 춥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난방비때문에 단독주택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역시 아파트가 좋다는 것이다. 멋진 전원주택을 지어놓고는 겨울 난방비를 이길수 없다면서 커다란 집옆에 작은 황토방을 짓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인지 요즘은 난방비를 적게 쓸 수 있는 단열이 강화된 패시브 하우스 같은 것도 수입하려고 한다. 

 

 

우리는 종종 서구식으로 큰 집을 지어놓고는 그것을 서구식 물건으로 채우고 서구식으로 산다. 그래서 정작 인간이 있을 공간을 물건이 차지해 버린다. 한옥식으로 인테리어가 된 집에 가면 우리는 종종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종종 그 방의 비워짐이 보여주는 충만감때문이다. 최소한의 물건이 있기 때문에 3평짜리 방도 넓어 보이고 넉넉해 보인다. 물건이 방안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차분해 진다. 현대의 한국인들은 지저분해지게 물건으로 집을 채우고 정돈되고 마음이 조용한 곳을 찾아 카페같은 곳으로 간다. 

 

종종 평당 천만원이 넘는 아파트의 가격을 생각해 보면 현대 한국인의 삶은 모순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너무 넓은 집을 너무 비싸게 주고 사서는 너무 이상하게 채우고 너무 이상하게 난방하면서 사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20평미만의 집은 소형이라고 말하고 30평정도는 중형 50평정도나 그 이상은 대형이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이름붙이기는 우리가 사는 집이 어느 정도나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물론 크고 넓은 집이 더 편하고 좋을 것이라는 일반론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집한두평 가격을 위해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우리나라 사람의 재산의 대부분이 부동산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과연 크고 넓은 집이 좋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어떤 착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 착각에 대해 아주 비싼 값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서민들은 아파트 한채값에 평생 노예가 된다. 자기 땅을 가진 단독주택도 아니라서 대대로 물려주면서 고쳐 쓸 수 있는 집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싸고 불편하고 관리비가 많이 나오는 주거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연 대안은 없는 것일까.

 

요즘은 오히려 서구에서 작은집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땅도 끝없이 넓고 우리보다 더 부자인 미국같은데서 말이다. 사람들은 공간활용을 위해 벽으로 숨겨지는 침대라던가 움직이는 벽같은 것을 고민한다. 연료를 많이 안쓰는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인 패시브하우스 같은 것을 만든다. 

 

그런 모든 아이디어는 우리가 참조하고 활용해야 하지만 어느 새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같다. 사실은 우리가 그런 집, 그런 생활방식을 몇백년 몇천년 먼저 고민했다. 난방시스템이 달랐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난방시스템을 남들보다 먼저 가지고 그것에 맞춰서 주거와 생활방식을 발달시켜왔던 우리가 조상의 지혜를 모두 잊어버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한옥이 뭘까. 한옥의 정수란 나무로 지은 집이라거나 멋진 기와를 올린 집이라거나 황토로 지은 집일까.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고 그런 부분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그 뜻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뜻을 생각했을때 오늘날의 자재와 기술로 지은 집도 한옥의 정신을 더 많이 계승한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 한옥의 구조가 가지는 중요한 뜻은 이 글에서 말하는 초미니 집들을 이어놓은 반개방형집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궁리하면 전래의 형태를 계승하면서도 좀 더 편한 방식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그냥 불편한 것을 참아내기도 해야 할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자유롭고 부유해 지기 위해서라도 자발적 가난을 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길고 크게 보았을때 빚내서 몇억짜리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랑하며 사는 것처럼 되거나 몇년가지 못할 물건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이 되어서는 결국 가난이 대물림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의 청년들이 오히려 21세기 한국의 청년보다 주거에 대한 걱정을 더 적게 하면서 살았을지 모른다. 거꾸로 가는 주거문화는 우리를 빈곤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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