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같은 것은 애매한 말입니다만 제가 이 단어를 통해서 말하려는 바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단적인 문화, 상식, 삶에 대한 가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은 아래에 차차 쓰겠으나 우리가 무협소설같은 친근한 예를 생각하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 종종 그 소설의 세계는 작가가 신처럼 창조한 것이라는 점을 잊고 그 세계의 규칙속에 조금씩 젖어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소설속의 인물들이 겪는 희노애락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죠. 무협소설도 소설의 일종이니 만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협소설을 읽으면서 무협의 판타지 세계로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그 세계속의 인물들이 벌이는 대부분의 일에 대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을 알려면 외국을 봐야 하듯이 다른 세계를 볼 때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저는 한국사람이 가진 시대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협소설을 생각하는 보는 것이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무협의 세계
무협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요. 이것도 물론 중국판도 있고 한국판도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할 바는 아니며 엄격히 말하자면 심지어 같은 작가라도 작품마다 다른 세계를 창조했다고 해야겠습니다. 이글은 무협소설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래에 쓴 걸 보고 내가 아는 작가가 쓴 무협소설은 이와 다르다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제가 어떤 한 세계, 우리가 통상 무협의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와 유사한 그런 세계를 묘사한다고만 하셔도 되겠습니다.
무협의 세계는 아무래도 일단 무와 협의 세계를 그립니다. 적어도 대개는 싸움질 잘하는 정의의 인간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일단 싸움은 잘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안그러면 무협이라 안 부르겠지요.
이것만으로 무슨 특징이 있겠는가 하겠지만 물이 없는데 수영 잘하는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정의의 편이건 악의 편이건 폭력의 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속의 세계는 그 폭력이 반드시 사용되어져야만 할 이유가 존재하는 세계, 대화만으로 분쟁이 해결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가 전개되어지지 않겠죠. 그래서 무협속의 세계는 깡패나 도둑과 산적이 넘쳐나는 혼란상이거나, 전쟁중이라서 외적하고라도 싸워야 하는 세계이며 법질서로 문제가 해결되는 곳이 아니라 사적인 폭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세계입니다.
무협의 세계에는 또 당연히 인간이 사는 세상이며 인간의 희노애락이 등장하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의 욕망인가가 무협의 세계에 등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즉 암묵적으로 어떤 상태가 인간의 행복한 상태인가에 대한 답이 잠재적으로, 노골적으로 나온다는 것이죠.
무협의 세계는 통상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면 많은 것이 허무하며 인위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봐야 되는 것이 없고 가능하다면 불로 장생이 되는 것을 꿈꾸는 세계입니다. 무협의 세계에서 인간의 행복은 상당히 원초적입니다. 머리에 든 것 없어도 잘먹고 좋은 옷입으며 괜찮은 집이 있으면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협의 세계를 이루는 기본은 세속화된 도가와 불교입니다. 불교는 중화권에서 전파되면서 도교적인 것에 강한 영향을 받았지요. 이것이 진짜 도가와 불교가 아니고 세속화된 것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사실 노장사상과 무협소설이나 중국에서 나타나는 문화는 둘다 도교라고 해도 이질적입니다. 노자나 장자가 신비한 단약을 만들어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사상에 대해서 쓴 적은 없지요. 부처님이 언제 자기 동상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면 자기가 복을 준다고 했습니까. 자기 수양을 쌓으라고 했지. 하물며 스님들이 무공을 연마하여 악적들을 무찌르는 이야기가 정통불교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것은 문맹률이 엄청나게 높았던 중국에서 글읽는 사람을 신비화했던 것에 기인할지 모릅니다. 직접 읽고 생각하질 않으니 멋대로 종교 지식계층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냈던 거겠지요. 서구에서 한때 성경이 그랬듯이 문맹인 자들에게는 불경이나 노장의 글이 한없이 신비한 힘을 가진 주문같은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왜곡된 도교 불교 문화를 가진 무협세계에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는 희화화 되어 인간에게서 멀어집니다. 이것은 크게 강조할만한 것입니다. 현대의 중국인들도 종종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무협의 세계는 형이상학적인 가치가 은근히 혹은 내놓고 제거되어져 있는 세계입니다.
물론 무협의 세계에는 신선에 해당하는 득도한 인간상도 나타나지만 무협세계에서 말하는 인간세계는 말하자면 기본적인 의식주의 욕망만 가득차고 그것이 충족되면 행복한 단순한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신선의 세계는 머리 저 높이 있어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되 인간이 올라갈 곳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어떤 의미에서는 원천적으로 포기됩니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항상 신선과는 다른 세계인 것입니다. 득도한 신선이나 부처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랴라고 하면서 인간은 그냥 이렇게 산다라고 말하는 그런 세계입니다.
그 추상화, 우상화, 희극화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방법은 비슷한 것을 다른데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에 들어가는 사람은 손에서 장풍이 나오고 하늘을 걷는다고 누가 허풍을 친다고 해봅시다. 그런 허풍은 결국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은 보통인간이 아니며 보통인간과는 완전히 다르다라는 차별을 만들어 내어 비서울대의 세계속에 우리를 갇히게 만드는 허풍이 되고 맙니다. 과학자를 마법사로 그리는 소설은 과학을 배척하는 소설입니다. 서구에서도 왕이나 기사에 대해 전설을 덧붙이는 이야기는 결국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인간은 태어나기를 다르게 태어난 인간들이라는 주장을 만들어 내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왕의 피는 원래 다르며 누구나 아더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무협소설속의 과장된 도사의 모습은 그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인간의 세계에서 분리시키고 그저 보통인간은 아무생각없이 절이나 하고 기도나 하는 정도에 멈추는 것이 지당하게 보이게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놀랍지 않은 결론일지는 모릅니다만 무협의 세계는 대개 반이성주의적입니다. 그리고 반대중적이죠. 인간들은 이성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깨닳고 성장함으로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사는 이치는 단순한것이라 시스템적으로 세계를 개혁하겠다던가 어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이념같은, 과학적 경제학적 원리같은 것을 추구해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식의 사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이상국가를 만들겠다는 조선건국때의 유학자같은 사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그저 원초적인 것입니다. 잘먹고 예쁜 마누라 얻고 주먹세서 남에게 큰소리 칠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면 행복한 것이죠. 무협세계의 주인공은 대개 무사입니다만 사실 그세계는 로또맞아서 큰 부자되면 행복하게 사는게 당연한 그런 세상입니다. 인간의 세상은 기본적으로 소시민의 세상인 것입니다. 불행에 있어서 문제는 결국 돈과 권력이죠.
당연하게도 무협의 세계에서 대개 결여되고 있는 것은 직업윤리입니다. 무협의 세계는 이런 의미에서 전근대적이죠. 무협의 세계는 전문화가 없거나 강조되지 않는 세계입니다. 무협소설에서는 대개 하나의 단순한 원리가 지배합니다. 칼을 쓰건 주먹을 쓰건 창을 쓰건 서로 싸워서 이긴자가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긴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게 당연한 그런 세계입니다. 복수나 정의의 실현도 결국은 무력으로 이뤄집니다.
무협세계에서는 어떤 특정한 직업을 전문적으로 가지고 그 직업의 전문적 윤리를 강조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의사와 요리사는 서로 비교되지 않지요. 하지만 창을 쓰는 자와 칼을 쓰는자는 싸워서 이긴 쪽이 강한 것입니다. 무협의 세계는 대개 전문화되지 않고 모두가 하나의 경쟁상대로 뭉뚱그려져 있는 세계입니다. 전문가들은 그런 투사들에 비교하면 하찮고 미약한 존재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무협의 세계는 정과 사랑이 넘쳐나고 호쾌한 영웅 호걸들이 넘쳐나는 세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좀스런 현실보다 죽고 사는 문제를 간단히 생각하고 의리에 목숨과 재산을 거는 인간들이 있는 무협의 세계에 매력을 느낍니다.
무협이 아닌 세계
자. 무협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혹은 좀 다른 세계로 눈을 돌려봅시다. 우리가 이렇게 무협소설속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본 큰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생각의 끝에서 다시 무협소설책 바깥 쪽으로 눈을 돌릴 때 생기는 그 짧은 전환의 순간에 우리에게 보이게 되는 것을 위해서 입니다.
2003년에 세계적 히트를 친 드라마인 대장금을 생각해 봅시다. 이 드라마는 사극이면서도 전근대적이라고 표현했던 직업윤리의 실종이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장금의 주요 줄거리는 직업윤리가 현실사회와 부딛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대장금에 나오는 인물들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먹는자에게 해로운 것을 만들지 않는다거나 의원은 오직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 생각해야 할뿐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의료기술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런 대사를 하는 사람들이 특히 훌룡한 사람들로 묘사 됩니다. 왕의 명령앞에서도 직업윤리는 포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전문화된 직업윤리입니다. 그리고 여자이며 칼따위는 휘두루는 법을 모르는 장금이가 영웅인 세계, 바로 무협의 세계와 다른 세계인 것이죠.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사회를 지탱하는 중대한 기둥중의 하나가 직업윤리입니다. 크나큰 시스템을 빠르고 문제없이 돌리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상황에 따라 판단하여 행동해서는 불가능합니다. 판사가 재판을 안했는데 형사가 범인을 판결해 버리고 의사가 범인에게 죄를 묻는다거나 사형집행인은 따로 있는데 판사가 형벌을 가한다면 사법제도는 엉망이 되겠지요.
결국 거대한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작은 집안이나 지역의 범주를 넘어서서 안정성있는 부속품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해내는 존재들이 필요합니다. 즉 직업윤리없이 현대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신발장인은 신발만드는 방식을 고집하고 술만드는 장인은 믿을수 있는 술을 만들고 선생님은 선생님의 직업윤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그들을 믿고 세상이 큰 질서를 유지하면서 흘러갈수 있습니다. 대장금은 말하자면 가장 현대화된 사극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 보편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보면 우리는 한국을 전근대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흐름을 봅니다. 천안함 사건이며 4대강 개발이며 무수한 최근의 사건들을 통해서 언론과 전문가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국민들이 직접 공부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직업윤리가 굳어져서 사람이 부속품이 되고 말고 근대의 문제점이 생기는 것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문제점을 느끼기이전에 오히려 반대로 직업윤리가 부족하여 결국 전문가는 무력화되고 정치인이 전면에서 뭐든지 된다고 말해버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이전과 근대이후를 함께 살고있는 혼란상이랄까요.
현실의 한측면 혹은 독립된 세계
우리는 무협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무수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현실의 한측면을 그려낸 것일까요. 아니면 따로 독립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 것일까요. 이 두가지 표현은 둘다 어떤 문맥에서 진실일 것이나 환상의 세계가 현실의 한 측면이라고 이해하는 것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당연해 보이는 이 표현에도 가정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여러개의 측면으로 분리해서 표현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했을때 그 각각을 알고 그것을 합하면 다시 원래의 복잡한 현실을 알게 된다는 가정입니다.
하나의 나무를 위아래를 잘라서 둘로 나누면 나누기 전에는 살아있는 나무였지만 나누고 나면 장작으로나 쓸 죽은 나무가 됩니다. 한개의 동그란 물방울을 둘로 나누면 두개의 반달모양의 물방을 가지게 되는게 아니라 다시 작은 동그란 두개의 물방을 가지게 되지요.
하나의 세계는 일관성을 가지고 생명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세계에서도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그 일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설명과 합리화가 없으면 그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살인사건이 났는데 그 범인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세계에서는 사람은 가끔 이유없이 죽는다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무지의 벽을 세우고 그 너머에 대해서는 이건 그냥 원래 그렇다라는 설명이 통하는 세계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의 세계는 무지의 벽들로 둘러쌓여서 자기 완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추구하게 되고 그 세계는 자꾸 확장되어져 나갑니다. 소설책의 두께가 한계가 있는 것은 물론 모든 인간의 정신세계역시 한계가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두 소설속의 세계를 위해서건 현실세계를 살건 사방에 무지의 벽을 세우고 그 바깥 쪽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해 지는 단계를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도는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한계가 있는 우리는 항상 무언가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무지할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의 세계의 한측면을 투사하고 잘라내어 묘사한 것같은 이야기를 본다고 해도 그것을 현실의 한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종종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 측면들의 단순합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여러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이해되고 그걸 합치면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사고는 우리에게 잘못된 확신을 가지게 만듭니다. 잘라져 나가서 재구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들도 현실의 일부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조각나누기와 합치기가 사실이고 모든 이야기는 진실의 한측면으로 생각되어지는 사고가 옳다면 우리는 시대정신같은 단어를 도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시대정신은 문화고 세계관이며 자기 완결성을 가진 하나의 세계에 대한 묘사고 이해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때 왜곡과 한계를 가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시대정신은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확장되어질 것이며 그 과정은 결국 모든 사람들의 끝없는 불안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전쟁을 해서라도 그 과정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도덕적 윤리적 가치판단적 혼란과 파탄을 견딜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뭐가 현실인가?
이제 무협의 세계라던가 대장금의 세계를 벗어나서 우리 주변의 현실세계를 봅시다. 무협의 세계는 환상세계입니다. 그럼 뭐가 현실일까요? 물론 현실은 무협의 세계와 다릅니다. 그런데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다시 세계를 보면 현실 세계에는 무협의 세계를 현실로 알고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협의 세계가 현실이며, 현실이어야 한다고,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이 장풍을 믿고 칼싸움을 잘하면 성공한다는 식으로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무협세계를 현실세계에 대한 아주 훌룡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좀 덜합니다만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자주 써먹히는 세계가 조폭의 세계였습니다. 그 조폭의 세계란 제가 위에서 묘사한 무협의 세계와 깊은 유사성을 가집니다. 한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같은 영화들은 조폭의 세계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비슷한 세계입니다. 그뿐입니까. 재벌이야기나 막장드라마로 표현되는 복잡한 가정사가 나오는 일일드라마들도 종종 무협의 세계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이게 현실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이 안통하고 무력이든 권력이든 금력이든 힘을 써서 나를 보호해야 살아남을수 있는 정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대놓고 세상은 정글이니 너는 거기서 살아남을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어린 사람들에게 역설하거나, 애매하게 너는 현실을 모른다던가, 현실론은 이거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마음속 저 밑에 깔려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기본적 믿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것입니다.
국민을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행복이란 실은 원초적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으로 저절로 달성되는 것으로 믿는다는 자각자체가 없는 사람은 많습니다. 자기의 무지의 벽에 대한 자각이 없을수록 세상은 오히려 또렷하고 확실하게 보여서 내가 다 안다고 생각됩니다. 당연히 적어도 모든 사람에게 행복이 그런 것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고 행하는 일도 실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협세계를 믿는 사람은 형이상학적인 가치, 예술, 미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이 형편없게 됩니다. 그런 것은 행복과 상관없는 것이며 존재하지만 인간세계에 존재한다기 보다는 인간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목표같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호걸 영웅으로 생각하고 정과 호쾌함이 있다고 할지 모르나 보편성이 없는 무협세계의 정이란 말만 좀 바꿔생각하면 공평성이 없는 세상입니다. 네가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 세상, 말장난 몇마디로 자기합리화가 너무 쉽게 일어나는 그런 단순한 사고의 세상입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말해 저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무협의 세계와 비슷한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그같은 인식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 시대정신은 분열하고 불안정하게 변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데에는 서구적 영향과 물질적 풍요 그리고 사회적 복잡성의 성장이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만 자기반성도 있을 것입니다. 무지의 벽을 하나 하나 허물고 그너머에 대해 고민하고 세계를 스스로 확장하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이 출현하도록 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중의 하나는 쪼가리 진실만 가진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진보를 표방하거나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는 보수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의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세계를 하나의 자동차같은 기계로 생각하고 우리가 각자 어딘가의 부속을 갈아끼우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가 출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전거가 자동차로 변신하는게 발전이라고 하더라도 구동축도 바퀴도 연료탱크도 없는데 누가 엔진만 자전거에 올리면 자전거는 좋아지기는 커녕 짜부라들겠지요. 결국 이런 저런 많은 소동들이 효과없는 소모적인 일만 됩니다. 진보는 많습니다만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유지되는 진보공동체는 별로 없습니다.
저는 언젠가 마을만들기가 조용한 혁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의 마을이면 하나의 공동체고 공동체면 문화가 있고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공적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아 그래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해라고 공감할만한 곳이라면 그것은 문화운동의 본격화고 시대정신의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혁명이나 개혁의 완결은 시대정신의 창조, 상식의 변환일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행복은 원초적인 것을 넘어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다는 것, 자기를 수양하고, 자기가 가진 무지의 벽들을 점검하고, 가치있는 진리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람을 가치 있게 해준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길이란 정신적 성장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물론 특별할 것이 없는 생각입니다. 다만 피부에 닿게 자각되어지고 있지 않는 생각일 뿐입니다. 유배되어 살았던 정약용이 사람이 살아서 책한두권 남기지 못할 것같으면 짐승과 다를바가 없고 맹자가 말한 소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며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즉 적어도 정약용의 시각에서는 삶의 가치란 외적인 성공이나 부유함과 편안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점점 물질적이 되고마는것 같습니다.
얼마전부터 제주도 문화이민이 나타나고 인문학교실이 여기저기에서 열리고 마을만들기 운동도 벌어지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지는 여러가지로 뻣을수 있으나 그 궁극의 뿌리는 결국 자기찾기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남의 흉내만 내는 것은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자기찾기는 무협의 세계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리거나 도통한 사람이나 하는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되어질지 모르나 그와는 다른 시대정신의 눈으로 바라보면 행복으로 가는데 있어서 핵심이 되는 일입니다. 자기찾기는 개인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공동체 운동과 자기찾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나를 찾는 만큼 우리도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제가 혼자서 어떻게 믿는다고 그 현실이 바뀌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믿으면 그게 현실이 됩니다. 무협의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바뀌었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부동산거품이 꺼진다고 합니다. 베이붐세대가 은퇴하고 인구가 줄고 고령화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유학이 좋은가, 외고가 좋은가 자사고가 좋은가, 월세를 살아야 하나 전세를 살아야 하나 아니면 집을 사야하는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해일이 오는데 내 집만 안전할 방도가 있겠습니까. 난리가 나면 너도 나도 살겠다고 서로의 발목을 잡아당기느라 어떤 곳도 완전히 안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바뀌어야 세상은 비로소 조금은 더 안전한 곳으로 바뀔 것입니다. 미래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신 : 무협소설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무협소설은 저도 좋아합니다. 다만 그 한계를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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