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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극운동에 대한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3. 10. 10.

어제 저녁에는 딸과 함께 커피숍에 가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던 와중에 나는 노트북을 꺼내서 일종의 문화운동의 선언문같은 것을 쓰기시작했다. 언제나 나는 어떤 문화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으니까. 능력부족으로 그것을 구체화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다. 지금 어떤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없으므로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이 선언문을 당장 어딘가에 쓰겠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썼다. 써보고 안좋으면 고치는 거랄까. 혹시 공감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다.  

 

새로운 자극 운동을 제안하며

 

우리의 삶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의 삶을 자기 자신이 느끼고 원하는대로 살아가야하고 그렇게 할 자유가 있다. 따라서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은 개인적으로 고독하게 결정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은 당연히 사회적이므로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고 따라서 우리는 서로 돕고 운동을 벌여나가야 바람직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가족에서, 마을 공동체, 지역사회, 국가에 이르기 까지 여러가지 조직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정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회적인 변화나 결정에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가 하는 것은 당연히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주변과 우리와의 관계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국가가 독재국가가 되어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을 정도가 된다거나 정부가 파산하여 극심한 경제난이 닥친다 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연대와 운동은 여러 차원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정치나 정책의 내용 이전의 것이다. 개인의 삶과 정치나 사회적 결정같은 구체적 사회적 행동 측면 사이에는 가능성 차원의 중간단계가 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어떤 입장의 결정이 있기전에 개인으로서 우리가 세상의 어떤 면에 대해 어떤 감수성과 친밀감을 가지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던가, 혹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느끼게 되었다던가, 혹은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인 행복을 생각할 때 자유나 즐거움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주게 되는 것 같은 것들은 우리의 개인적 삶에 영향을 주고 결국 그것을 넘어서 우리의 사회적 결정에 큰 영향을 준다.


즉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는것, 단지 생물학적으로 인간으로 태어난 것뿐만이 아니라 보다 풍요로운 경험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사회의 방향은 우리가 익숙한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하고 결정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못할 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잘못 결정되어지는 것은 물론 개인으로서의 행복도 달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은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 된다. 


오늘날 외로움과 단조로움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질병이 되었다. 결국 개인적인 행복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것들에 달려있는데 그 생활이 단조롭고 우리가 많은 일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그러한 삶은 위태로운 삶이다. 우리는 쉽게 외로워지고 하나의 실패가 완전한 좌절을 가져오며 미래에 대해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 쉬워질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우리의 개인사의 결정에 있어서도 지혜롭지 못한 선택을 하게 하게 만들 것이다. 가정은 깨어지고 지역사회나 마을 공동체도 깨어지며 나아가 국가적 공동체도 분열 될 것이며 도박과 투기에 빠져들기 쉽고 결국 행복을 달성하기 어려워 질 것이다. 오늘 날의 한국에 있어서 무엇보다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이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단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제공하는 교육과 미래를 믿지 못해서 우왕좌왕하거나 외국으로 자녀를 유학보내고 싶어한다. 한국 사회는 급속하게 고령화하고 있고 한국의 산업구조가 선진화함에 따라 외로움이나 단조로움과 싸우는 것이 더더욱 많은 한국인들에게 절박한 일이 되었다. 나이든 세대에게는 그것이 삶의 질의 문제이며 종종 생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노인자살률은 세계최고수준으로 압도적으로 높다. 젊은 세대에게는 그것은 창의력의 문제다. 이제 굳어지고 단조로운 과거의 방식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 새로운 자극들을 통해 더 넓은 식견과 창의력을 길러내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다고 할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감수성이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것을 서로 도울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외로운 사람들을 덜 외롭게 하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풍요로운 삶을 살게 도와줄수 있으며 무엇보다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통상 인간적 접촉과 교육 그리고 문화활동에 참여함으로서 달성한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그럼 뭐가 되어야 할 것인가. 그 내용에 있어서 어떤 것이 들어가야 할까에 대해 특정한 의견이 없다면 그것은 문화운동이 될 수 없고 그저 모든 종류의 문화활동으로서 각자 이뤄져야 할것이다. 그것이 이미 세상에 허다하게 존재하는 수많은 체험학습들과 여행산업들같은 것들이 각자 해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극운동의 첫번째 내용이 되어야 할것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발견, 개인의 발견이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자극은 수단이며 그 자극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서 자기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관습과 공포속에서 자기를 잃고 따라서 무엇을 스스로가 원하는가,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앞서 말한 문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안에 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믿고 우리의 감각이 살아날수 있도록 그것을 자극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듣고 음악을 연주하고 연극을 관람하고 연극을 공연하고 남의 글을 읽고 혹은 스스로 글을 쓰고 강연을 듣거나 강연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보여주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우리에게 참신한 경험을 주는 행사를 기획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행동속에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떤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쾌락으로서의 자극을 단순히 퍼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금씩 그 자극들을 소화해 내면서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는 일일 것이다. 새로운 자극 운동의 첫번째 목적은 외부에서 어떤 메세지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 새로운 삶의 경험을 제공해서 스스로가 세상과 자신의 어떤 면에 대해 눈뜨게 만드는 것에 있다. 우리의 감수성을 개발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새로운 면에 눈뜨게 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스스로 자극의 소화를 위한 사색을 할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는 환경적 자극의 박탈 역시 좋은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다. 실제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매체와 바쁜 일상을 통해 우리의 감각기관과 뇌가 피곤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자극에 시달린 나머지 둔감해지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극 운동에는 이차적인 목표도 있다.  이러한 삶의 자극이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 내는 것에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공감대란 개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이 공동체로서의 우리와 이어져 있다는 체험을 말한다. 즉 우리는 새로운 자극운동이 사회적 공동체 의식을 길러내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발견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곳에 까지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를 강조하는 행위는 우리를 다시 어떤 외부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구체적 실천 방향을 만들어 행동에 옮겨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이어주는 공동체 운동이며, 젊은 세대를 교육시키는 교육운동이며 장년세대에게는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운동이며 노년에게 삶을 살아갈 의미를 찾아주는 노인 복지 운동이기도 하다. 새로운 자극과 자아의 발견 그리고 나아가 공동체를 발견한다는 그 기본에 충실하면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가 있고 앞으로의 논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실천사업은 따로 논하기로 한다.

 

다쓰고 나서 어두워진 커피숍창 밖을 바라보았다. 주유소안에 있는 커피숍 주변으로 차들이 계속 지나간다. 아주 무심하게. 커피는 식었고 딸아이는 아직도 열심히 공부중. 이 세상이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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