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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단상 : 쪽팔림이 실종된 시대

by 격암(강국진) 2013. 11. 24.

요즘의 가장 큰 화제는 국정원선거부정 사건이다. 급기야 몇일전에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박근혜 하야 촉구 미사도 천주고 전주 교구에서치뤄졌고 다른 데모와 함께 연일 촛불시위도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하자면 현시국은 참으로 조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노무현 탄핵사건을 자주 예로 드는데 노무현탄핵이 얼마나 사소한 일에 대한 것이었나를 생각하면 현정권은 당선무효를 선고받아 마땅하다. 열번이상은 받아야 하고 이명박은 사법처리되어야 한다.



이런 예를 드는 것은 내가 노무현을 좋아한다는 사실 이나 노무현정권과의 비교선상에서 공평을 논하기 위하기 만은 아니다. 노무현 탄핵사건과 비교했을 때 오늘의 정치판에 대한 온도차이가 그만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구의 온도차이인가. 바로 우리들 자신, 한국인의 온도차이다. 즉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의 객관적 현실을 논하기 전에, 개개의 사건에 있어서 정의나 시비를 논하기전에, 그 사건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이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어떤 프레임에 빠져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더더욱 지독한 작고 초라한 배금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가.


얼마전에 아내가 재미있다면서 보여준 프로그램중의 하나에서는 유재하와 김현식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었다. 각각 1987년과 1990년에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전설로 남은 두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젊었던 그 시절에 대해 아내와 이야기하고 요즘은 시절을 대표하는 노래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즘은 워낙 노래가 많이 나와서 장기적으로 유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이게 대세였지라는 식의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노래를 많이 듣지 않지만 특정 노래가 대세는 아니어도 주로 어떤 노래들이 대세를 형성하는지는 알고 있다. 다양성이 커져서 대세를 논하기 어렵지만 방송타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걸그룹 노래, 댄스노래, 클럽에서 나올 것같은 노래들이 대세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작은 그룹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공장에서 만들어 낸 듯한 소비성 노래가 젊은이들 노래중의 대세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더 화려하고 더 짜임새 있지만 그만큼 더 몰개성적인면도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유재하나 김현식은 모든 것이 훨씬 더 단순해서 우리가 이상에 차 있을 수 있었던 고전적 세계에 대한 추억에 젖게 해준다. 어느샌가 우리나라에는 청춘드라마가 거의 없어졌고 있는 것들도 요즘의 20대나 10대를 주인공으로 한다기 보다는 추억의 시대를 그리며 그 시절의 청춘을 그린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요즘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응답하라 1994같은 것처럼 낭만과 이상과 순수는 이제 픽션인 드라마 속에서도 과거에는 이랬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설득력을 얻기 어려워 진 것같다.


우리는 그런 고전적 시대를 지나서 지금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더 진보된 것일까?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단 어떤 분을 비롯해서 세상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진보주의자의 논리니 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테오도르 달림플의 편견에 대한 찬사 (In Praise of Prejudice : The Necessity of Preconceived Ideas)는 사람들이 어떻게 많은 말들과 논리들을 그에 기반하는 삶의 체험없이 단어만 수용해서 악용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비판들의 목소리의 중심에는 지나치게 복잡해져서 인간을 노예로 하는 인문학이나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진 나머지 결국은 짐승처럼 단순한 쾌락을 추구하고 배금주의자가 되게 만드는 세태에 대한 지적이 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개인으로 말했을 때 천년이나 3천년전의 인간보다 오늘날의 우리가 아주 다른 것은 아니다. 결국 어떤 인간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로 태어나며 사람은 하루에 밥을 두세끼 먹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지식은 그야말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폭증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순한 시기와 결별하고 복잡한 세계를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오히려 더 단순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예 생각하기를 중단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기업이나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편입되고 만다.


1살먹은 아기의 머리위로 칼이나 불붙은 폭탄을 던지는 행위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떤 시대적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종종 체념하고 눈을 돌린다. 예를 들어 그것을 미국인과 아랍인, 테러와의 전쟁, 미워하는 어떤 계층, 위협을 느끼는 어떤 계층같은 시각으로 볼 때 말이다. 그걸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딘가에 코가 꿰여서는 개인이기를 인간이기를 중단하고 그런 현실에 대해 체념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젊은이들을 일어나지 않냐고, 왜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냐고. 여러가지 이유가 여러가지 사람들에게 다르게 있겠지만 요즘 시대를 채우고 있는 것중의 하나는 분명 체념인것 같다. 인간은 어쩔수 없다. 사는게 원래 그렇다. 복잡하고 고상한 건 나는 모르겠다. 나는 자식 교육비도 대지 못하는 부모요 직업을 구하는 전투에서 패배한 백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 집도 구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체념이다. 우리는 좀생이가 되었다.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자부할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결국 따지고 보면 월급쟁이가 되어 다음달 월급이 안나올 것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심하게 말하면 개밥그릇에 신경이 팔린 남의 집개나 마찬가지다. 젊은이가 아니라 요즘은 애들도 늙은이처럼 말하고 생각한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미래의 꿈을 생각하면서 취업전망이나 수입이 얼마일까를 논하는 시대다. 젊은이들은 그렇게 정신적으로 젊어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에게 우리는 왜 스티브잡스가 없냐, 우리는 왜 노벨상수상자가 없냐고 말하는 기성세대의 물음은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참 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다. 세상사람 다 좀생이가 되는 시대에 왜 지도자가 없냐고 묻다니. 좀생이는 혁명을 할 수 없다. 좀생이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도 할 수 없었다.


좀생이가 아닌 인간이란 영웅적 인간이다. 하지만 한국적 영웅은 미국적 영웅과 좀 다르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영웅은 어디까지나 원칙을 지키고 정의를 지키겠다는 인간, 타고나길 잘난 인간이라는 느낌이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영웅상은 최고의 인기영화배우 송강호가 잘 구현하는 그런 것이다. 올해 그가 출현했던 관상이라는 영화에서도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출세와 집안의 이득만 따지려는 인물로 나온다. 그러다가 자식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꾼다. 누가 봐도 그렇고 그 스스로도 자신이 영웅이라서 그런게 아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쪽팔림이다. 부끄러운게 아니라 쪽팔린 거다.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쪽팔린 것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말이다. 부끄러운 것은 잘난 인간들의 도덕적 반성같은 느낌이지만 쪽팔린 것은 현실의 여러가지 어려움들앞에서 좌절하고 체면은 다 망가진 그래서 스스로를  좀생이로 느끼는 보통의 인간들이 느끼는 것이다. 그래 나도 안다. 내가 잘난 인간이 아니라는 걸. 난 그저 맛있는거나 먹고 가끔 큰 소리도 좀 치고 그러면서 사는 것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는 평범 아니 평범이하의 삼류다. 그러나 그런 쪽팔린 삼류 인생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저 밑의 감정이 있다. 이 이상은 쪽팔린 것을 못참겠다는 감정이다. 어린 아이들의 눈을 생각하면서 이거 이러면 안되는거 아니예요라고 묻는 것이다. 한국인의 영웅은 쪽팔림이 만든다.

 

그러니 요즘 시국을 정리하자면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좀생이들의 쪽팔림이 실종된 시대. 그러므로 사람들이 더더욱 좀스러워진 시대. 논리적으로 앞뒤를 맞춰서 제 아무리 변명을 하려고 해도 왠만한 인간은 쪽팔린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쪽팔림을 삼키는 동안 세상의 전면에는 쪽팔린 것을 모르는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의 특징은 종종 쪽팔림의 완전한 실종으로 요약된다. 쪽팔림을 모를 수록 출세한다. 쪽팔림을 모를수록 스스로를 사회지도층이라고 부르고 더 많이 남을 가르치고 다닌다. 세상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공직과 미디어를 그런 인간들이 점점 더 많이 채워가는 것 같다. 나이 좀 들어서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쪽팔림을 무시한다. 하지만 어린세대는 아주 혼란된 머리를 가지게 된다. 애초에 말이 되는거라야 뭘 배울게 아닌가. 자주국방을 실현하자고 노력한 노무현은 종북이라면서 서울 수비에 중요한 서울공항을 위험하게 만드는 롯데의 초고층빌딩은 허락해준 이명박은 종북이 아니다. 훨씬 더 많은 국방비를 써왔으면서 스스로 우리는 북한하고 싸우면 진다고 말하는 군인들이 지금 국민속에 있는 종북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다. 종북의 개념이 뭔지는 참으로 오묘하고 오묘해서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은 대부분 그저 보통사람이다. 세상을 구한다느니 하면서 모든 걸 집어던질 그런 용기가 없다고 부끄러월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쪽팔림을 잊으면 인간이하가 되고 만다. 지난 대선에서 나꼼수는 찌질한 우리들에게 계속 쫄지마를 외쳤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최소한의 쪽팔림은 잊지말자. 최소한의 쪽팔림까지 잊으면 인간 이하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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