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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협동조합 그리고 불신

by 격암(강국진) 2013. 11. 15.

우리는 대기업을 신뢰하고 있다라는 말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모른다. 이 세상에 삼성이나 현기차 욕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한국사람들이 대기업을 신뢰한다는 것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으니까.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왜 개인으로서의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는가.


몇일전에 생협에 대해 썼던 글의 댓글을 비춤이라는 분이 달아주셨는데 그덕분에 나는 협동조합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금방 떠오르는 생각은 한국에 있어서 협동조합이나 중소기업이 잘 안되는 큰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인들의 불신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제주도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의 생선가게에서 생선을 10만원어치 사서 부모님에게 보내드렸다. 정확한 비교는 어려우나 싱싱함은 물론이거니와 양에서 서울에서 사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만족해 하셨다. 그래서 그 이후에 그 생선가게에 전화를 걸어 10만원어치씩 몇번 생선을 주문해다가 여기저기 보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만족도가 전보다 떨어졌다. 첫번째 거래후 가게가 마음에 들어 자주 자주 그렇게 물건을 사겠다고 생각한 나의 마음은 흐려지고 결국 더 이상 나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적어도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는 그 생선가게 주인은 내가 직접 제주도로 찾아갔을때에는 물건을 잘 보내주었지만 전화로 주문했을 때 -어느정도 당연한 거지만 그분은 우리를 기억도 하지 못하고 계셨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생선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생선도 작황에 따라 가격의 변동이 있을 것이므로 상황이 좋지 않아 전보다 적은 양을 보내주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오해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신뢰다. 만약 우리 부모님이 제주에서 생선가게를 하고 계셨다면 나는 어떤 물건이 오더라도 이 물건은 내가 지불한 가격한도내에서 최대한의 양심을 발휘해서 주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거래가 끊기고 만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결국 거대자본이 세운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큰 슈퍼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어떤 기준으로도 소규모 업자들이 나에게 해줄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물건을 대줄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업자들에게는 소규모업자들 나름의 장점이 있을수 있고 생존하려면 그래야 한다.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나 만약 그 제주의 생선가게 주인이 마치 친구나 자식들을 기억하듯우리를 기억하고 우리가 어떤 생선을 주문했었다는 것을 알아주고 우리의 취향에 맞춰줄수 있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소규모 생선가게를 계속 사용했을 것이다. 


기대하기 어렵다고는 했지만 사실 소규모 사업자는 그것이 지역의 작은 라면가게이던 생선가게이던 고객과 더 큰 신뢰로 합쳐지지 않으면 대규모 업자와 경쟁할 수 없다. 소규모 사업자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우리를 특별한 고객 즉 10만명중의 한명의 고객이 아니라 백명이나 천명의 고객중의 하나로 다뤄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작은 수의 고객을 다루고 있으니 우리의 취향을 맞춰주고 좀 더 인간적인 소통속에서 거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것이 업자들의 문제이건 혹은 대기업이나 큰 자본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문제이건 -현실적으로 그 둘은 결국 같은 한국사람들이다. 즉 업자는 또 다른 것을 살때는 소비자가 된다.- 소규모 사업자에 대한, 개인에 대한 불신은 한국에 팽배해 있다. 그러니 모처럼 정말 양심적인 업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경쟁력은 이런 토양에서 더더욱 떨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대기업 독과점 속에 빠지기 쉽게 된다. 


이런 불신과 그에 따른 대기업독과점에는 물론 결과가 따른다. 중소기업이 더 좋은 물건 더 싼 가격에 내놓아도 거들떠도 안보지만 그들이 이마트 하청업자로 변하면 물건이 잘 팔린다고 할 때 이마트가 자신의 상표값을 어디서건 가져갈 것은 뻔하다. 결국 같은 물건을 중소기업은 더 싸게 팔고 소비자는 더 비싸게 사야 한다. 결국 인간에 대한 불신이 인간을 거대자본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용이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는 노무현 대통령의 봉화쌀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분이 살아계셨을때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봉화쌀의 가격을 거의 문제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강한 신뢰 때문이다. 쌀값이 싸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가격 이상의 가치가 그 쌀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소비자들은 생산자를 믿기 때문에 그들이 부르는 가격이 적정가격일거라고 생각하고 두말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공익적 이유때문이다. 봉화마을의 사업은 농촌부활사업의 모델이 될수 있으므로 이왕이면 봉화마을의 쌀을 사주는 것이 세상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신용이 문제라는 것은 주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다들 대규모 회사의 주택만을 좋아한다. 현실을 보면 하청에 하청으로 내려가는 구조라고 하는데도 그렇다. 


누구의 잘못이건 이유가 뭐건 한국은 이 신용이 없다. 신용이 없는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게 지옥이다. 일본 사회에서 살면서 나는 일본사람들이 이 신용에 목숨건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일본도 물론 프랜차이즈 가게와 대기업으로 가득찬 사회이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훨씬 더 상황이 좋다고 느낀다. 지역에 가면 지역이 살아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마을만들기 사업같은 것을 배우려고 일본으로 견학을 오곤 한다. 


신용없는 사회가 가난한 서민들에게 무슨 일을 하는가를 보여주었으니 마지막으로 우리는 왜 신용이 없을까에 대해 몇마디 해보고 이글을 마치자. 


물론 제일 쉽고 자명한 이유중의 하나는 사회적 기득권의 부패다. 그들이 맘대로 원칙과 기준을 바꿔 흔들기 때문에 사회적 윤리수준이 떨어진다. 사람을 패고 가두고 죽이는 것을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는 기득권 그러면서 자신들이 사소한 이권침해라도 받으면 죽겠다고 날뛰는 기득권은 정말 문제다. 강남에 6억이상하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에 목이 박힌다고 말하는 사람, 자기들이 만든 국회선진화법이 자기들이 불편하면 이제 없애려고 하는 현여당. 선거개입에 대해 가지는 이중적인 잣대. 뭐 헤아릴수가 없다. 의견은 다를수가 있으나 최소한의 일관성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많은 정신병자를 만들어 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 인간들이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10억만 벌수 있다면 기꺼이 감옥가겠다고 했다던가. 인생의 의미가 돈이 된지 오래다. 엘리트나 사회적 지도층을 자칭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은 사회적 의무감이 그런 것에 따른 다는 생각이 없다. 그보다는 지배자나 나 잘났으니 더 많은 파이를 달라고 하는 것이 엘리트고 지도층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터 한국 최고의 대학의 졸업생들도 전부 자기 먹고 살 취업걱정만 하는 것이 정상이 되었을까. 


이유들은 서로 얽혀있지만 그것이 모든 이유는 아닐 것이다. 또다른 이유를 대자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중심질서의 부재를 말할수 있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는 만신창이다. 우리 것을 발전적 계승하는 것도 안되고 서양의 것을 베끼는 것도 안된다. 사회에 이것만은 넘어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없어지고 마구 모든 것이 의문시 되기만 하다보니 학교에서 사회에서 어디서나 대충대충이 통하고 억지가 통한다. 학교가 무너지고 가족과 부부관계를 포함한 공동체가 파괴된다. 이혼률도 어느새 세계최고로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교육에 대한 열정은 남부럽지 않다고 하지만 어느새 교육이란 직업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윤리나 철학, 감수성의 훈련은 가면 갈수록 약해진다. 스스로 그런 걸 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혹시 매국노나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돌리고 있는거 아닌가. 


모든 책임을 대기업탓을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간의 신용도가 낮은 것이 거대자본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자본의 선전, 자본의 힘이 개인간의 신용을 낮추는데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아 저 구멍가게를 어떻게 믿어요라고 자꾸 말하면서 한국 사회를 저신용사회로 유지하는데 기여할 수 밖에 없다. 


세대의 문제도 있는 것같다. 노년세대를 중심으로 나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더 많이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그 세대가 6.25를 겪었거나 그 여파를 경험하면서 자라났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믿을 수 없다라는 말, 다른 선진국사람들은 다 되도 한국인은 안된다 말이 그 세대에게는 종종 자연스럽다. 그들도 대부분 서민이고 극빈층이며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불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슬픈일이다. 


한국이 보다 살기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돈이란 좋은 것이지만 더 많은 돈이 생기면 생길수록 한국 사회의 어떤 소중한 부분이 망가지고 사람들은 욕심에 눈이 멀고 인생의 의미는 실종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용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좀 더 믿고 살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큰손들의 노예가 되어가는 과정에 저항이라도 해 볼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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