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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세월호는 우리의 눈을 바꿀 것인가.

by 격암(강국진) 2014. 4. 28.

나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 그런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세월호사건을 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세월호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합리화를 한다는 점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볼 것을 기대하는 것을,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생명자체가 그렇지만 인간의 시각이란 것도 세상과 일종의 동적 평형을 통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나날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인식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런 경험을 해석하는 선입견, 편견을 교정해 나가는 일을 계속 하는 것도 인간이다. 누구도 세상의 전부를 볼 수는 없다. 많이 보는 사람이 있고 적게 보는 사람이 있으며 이쪽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쪽을 보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하고 정보를 모으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객관성을 요구하는 과학은 그래서 전부를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극한의 상황에 대해서만 연구하는 것이다. 우주론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우주만물을 다 객관적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처럼 착각될지 모른다. 그런 과학자도 자기 아내의 마음도 전부 이해하고 예측못한다. 혼자서 불가능해서 동료과학자 백명 천명을 데리고 와서 협동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 보기는 뭘 다본다는 것인가. 


우리는 항상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그 색안경의 색깔을 날마다 조금씩 조정한다. 그 색안경의 색이 빨간색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인다. 그런데 세상이 빨갛다고 느끼면 그 색안경의 색은 이제 더더욱 빨게 진다. 우리는 빨간 세상을 보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 결과 세상은 더더욱 빨갛게 보인다. 이것이 소위 베이지언 추정의 기초다. 


이런 자기 확신의 과정이 같은 나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이다지도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는 원인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종종 전혀 다른 색깔의 색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지극히 단색만 통과하는 색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색을 보거나 압도적으로 확실하게 존재하는 색을 전혀 보지 못한다. 


나도 그렇게 쓴 적이 있지만 이번 사고가 터지고 피해자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언론의 문제, 정보의 문제를 지적했다. 현장에 가보지도 않은 책임자와 별 근거를 가지지도 못한 기자들이 전원구조의 기사를 내는가하면, 공기주입을 위한 기구가 도착을 하지도 않았는데 책임자는 주입하고 있다고 말한다던가, 책임자인데 현장에서 누가 막았다고 하는데도 나는 그런 이야기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실제로는 구조작업이 거의 혹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국가적 총력을 다한 구조작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다. 


기자들은 몇몇 소수의 매체를 제외하면 피해자 가족의 눈물어린 호소를 무시했다. 다시 말해 그런 정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정부나 해경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기만 했다. 심지어 정몽준의 아들은 그들을 가르켜 미개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피해자 가족이 종북좌파라는 둥, 선동가들에 의해 조정도고 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말은 순화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피해자 가족은 미쳤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미개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존재이던가, 종북좌파로서 미친놈이던가, 선동가의 조정을 받는 미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 가족이 말하는 정보는 무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런 말의 바닥에 깔린 정서다. 불에 들어간 손은 아프다고 미친듯이 신호를 보내는데 몸의 다른 부분은 그 손은 미쳤어, 그냥 가만히 있어라고 하는 식이랄까. 


세월호 참사같은 것은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자주 반복되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일상적인 일이라고 말하기에는 사실 아주 드문 사건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세월호 사건 같은 해양참사를 매주나 매달 겪지는 않는다. 비슷한 사건으로 거론되는 서해훼리호사건도 1993년의 일이니까 벌써 21년이나 된 것이다. 천안함사건으로 부터는 그렇게 오래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월호 참사는 어떻게 말해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드문 사건이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대응을 보면서 그간에 조금씩 조금씩 단순해진 사람들의 시각을 보게 된다. 만약에 애초에 이 사건이 무려 삼백여명의 사망및 실종자를 낼 사건이라는 점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사건에 관련된 선원이며 해경이며 공무원이며 언딘같은 회사며 언론이며 대통령도 이보다는 좀 더 사태를 초기에 '심각한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이순간까지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은 것같다. 그간에 쌓여진 색안경의 변화때문이다. 그들은 소위 블랙스완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사태에 대해 맹인이 된 것이다. 


내가 우리안의 괴물로 이야기한 감수성 제로의 얼굴들도 비슷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손가락이 아픈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새똥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빨래하면 되지 하는 식으로 반응하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눈물흘리고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감성팔이, 시체팔이 하지 말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그들중에 알면서도 그런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 대부분이 사실은 환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환자라고 말해야 할만큼 색안경이 단순하고 극단적이라서, 통상 인간이라면 느껴야 한다고 말해지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만의 알 속에서 그 알 바깥쪽에 일어나는 일에 무감각해 졌다.


다시 질문해 보자.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것인가. 역사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어떤 결정적 사건이나 인물에 의해 세상이 바뀐다는 식으로 말한다. 세월호 사건은 그런 결정적인 사건이 될 것인가. 


나는 이 세상에 결정적 사건이 있다는 시각자체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을 뿐 세상을 웅웅 울리는 소음처럼 작지만 지속적으로 세상을 채우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들은 대개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않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진정한 힘이다. 그런 소음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색안경을,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거 뭔가 못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회의를 가지게 한다.  


우리가 결정적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나뭇꾼이 도끼질을 해서 나무를 쓰러뜨리는데 있어서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하기 전의 마지막 한방이었을 뿐이다. 그 한방이전에 존재하는 수많은 도끼질이 아니었으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 결정적 사건에만 집중을 하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나무를 한방의 도끼질로 쓰러뜨린 것처럼 착각하고 뭘하려고 할때도 한방을 찾아헤매게 만드는 착각이다. 나무를 쓰러뜨린 것은 이름없는 수없이 많은 도끼질이었다. 우리는 세상을 지탱하는 의인들, 진짜로 세상을 바꿔온 이름없는 작은 소리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의 상황에서 합리적인 인간 한명이, 감성이 있는 인간 한명이 몇명을 더 구할 수 있었겠는가. 


세월호 참사는 말하자면 마치 불에 들어간 손처럼 거대한 고통을 주면서 우리에게 한국의 추한 모습, 한국의 무력함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적어도 우리중의 일부에게는 그렇다. 문제는 사람들은 이것을 통해서 자신의 색안경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그것이 유지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앞에 들어난 한국의 문제점이 계속 우리 눈에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몇주 안있으면 고의적이건 우연이건 또 무슨 일이 터질 것이다. 정부가 북핵 이야기하는 것이 한가지 예다. 어떤 연예인의 결혼이나 스포츠 문제에 대한 기사가 어떤 경제문제가 우리 귀를 채울 것이다. 사실 메뉴얼에 나와 있다고 한다. 재난이 나면 국민의 관심을 돌릴 다른 사건을 개발할 것. 나는 앞에서 우리의 눈을 뜨이게 할 이름없는 소음들, 웅웅거림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런 소음들을 덮어버릴 또다른 종류의 소음들이 돈의 힘으로 확성기를 타고 온 세상에 울려퍼질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기록이고 이번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잊지 말하야 하는 메세지를 잘 정리한 관점을 머리에 박아두는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된 것은 마치 혼자서 일을 하는 기계처럼 계속 소리를 낸다. 세월호 사건을 잊지 못하게 한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누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 이번의 상황에서 책임자 자리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앞으로의 일이겠지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더라든지. 벌을 받는지, 출세를 하는지. 이런거 말이다.


그러나 기록도 관점이 없으면 한계가 있다. 역사관이 없는데 역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사람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그저 재수없었던 우연한 사고 일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이 항상 문제로 느꼈던 한국의 부끄러운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처럼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안철수 같은 사람이 이번 상황에서 그다지 크게 역할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철수가 반복해서 말한 메세지는 정치권의 무익한 분열이다. 그런 프레임에서 세월호 사건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재료가 되지 못한다. 정치권의 무익한 분열로 세월호 사건이 났다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종북좌파를 몰아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사람에게 이번 사건은 더더욱 의미가 없다. 그저 재수없는 사건일 뿐이다. 세상에 나쁜 일은 모두 종북좌파가 저질렀다고 해야 하는데 이번일에서 종북좌파 가져다 붙이기는 좀 어렵기 때문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노무현 정권이 마련한 안전장치를 해제했을 뿐만 아니라, 낡은 배가 운항되도록 만들었고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생명을 경시하고 돈에 몰두하는 세상을 만들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번 참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과 이 사건과의 관련을 기록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이일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고 해도 의미가 없다. 어떤 사람은 자료를 모으는데 기여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낼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올바른 관점을 제시해서 자료가 어떻게 나열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곱씹어 우리의 피와 살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어딘가에 써놓고 기록하지 않으면, 세월호 사건의 아픔이 아무리 커도 그것은 얼마지나지 않아 그 심각함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왔던 웅웅거림에 뭍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의 눈은 다시 감기게 될 것이다. 


이번 사고의 피해자 아버지중의 한분은 이런 말을 했다. 삼풍사고때 자신이 한게 없다고. 그리고 이제 자신이 이런일을 당했다고. 그걸 후회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중의 누군가도 미래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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