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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새빨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4

by 격암(강국진) 2014. 5. 19.

4.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 내가 느끼는 위화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어도 일부분은 우리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사는가 하는 것에 있다. 앞에서 말한 팔찌에 대한 이야기를 팔찌의 신화라고 부르자. 팔찌의 신화는 듣기에 매우 기분이 좋고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같다. 그렇기는 커녕 그것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해주고 우리의 결합을 더욱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좋은 효과만 있는 것 같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개인적 신화에 대해 과학이 어쩌고 하면서 마법을 믿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과학을 누가 모르냐, 사람이 지나치게 딱딱하다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태도는 마치 휴일이면 교회나 절에 가면서 조금도 기독교나 불교를 믿지 않는 신자의 태도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당신은 교회나 절에 가면서 기독교나 불교의 교리나 신을 믿는다는 태도를 취한다. 마음속으로는 믿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왜 가는가? 한가지 흔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때문이다. 즉 교회나 절에 간다는 행동을 통해 나도 기독교인이다, 나도 불교인이다라고 주장할 근거를 얻고 그런 근거를 가지고 살아야 사회적으로 사는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학교나 책에서 배우는 과학과 철학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원래 같기가 불가능하다라고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는 친구와의 약속에서 사회적인 윤리문제에까지 점점 더 영역을 넓힌다. 물론 우리는 자주 자주 아는 대로 행동하자고 말하고 다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체념을 가득 가지고 있는 것이다.

 

팔찌의 신화를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중에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신비한 팔찌의 힘에 대해 진지하게 주장할 의도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학회에 가서 발표를 한다던가 새로운 발견에 대해 책을 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커녕 그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 아 물론 과학적으로는 말도 안되지요. 나도 알아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과학의 시대에 일종의 배교도로 배척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머리로는 과학을 알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믿는데 그런 것을 또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 혹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우리가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야하기는 하겠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위에서 말한 피상적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삶의 일관성을 너무 간단히 포기한다.

 

일단 다시 간단한 질문에서 출발해 보자. 우리는 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원래 같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에 대해서 안다 혹은 알아야 한다고 주장되는 세상에 살기 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말해지는 교리 혹은 과학적 사실을 전부 진짜로 혹은 스스로 만족할만큼 깊이 이해하고 믿고 공감하고 살기는 불가능하다. 또한 어떤 사회적 관행 혹은 가족이나 사회적 조직내의 문화란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는 허구와 모순위에 서있다. 즉 본래적으로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와 공감이 매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을 일찌감치부터 교육받는다. 의문이 생기고 반대가 있어도 그것을 삼키게 된다.

 

우리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친구와 선배와 직장상사로 부터 끝없이 처벌을 받고 상을 받은 끝에 이러저러한 것을 인정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를 어기지 않을 것을 배운다. 마음속으로는 다른 것을 믿는다고 말하려고 해도 그것은 대개 허용되지 않지만 우리는 솔직히 말하면 사실 뭐하나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 때가 대부분이다. 단지 우리는 질문하기를 멈췄을 뿐이다.

 

뭔가를 정말로 알고서 그대로 살려고하는 사람은 종종 사회적으로 한없이 뒤로 쳐지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 대해 세상을 비난만 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부모님이나 가족은 진실로 사랑의 마음으로 사회적으로 뒤쳐지는 아이를 다그친다. 그러나 이유가 뭐건 현실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끝없이 왜를 물어보는 어린 아이는 잘하면 요령없고 순진하다고, 그런 것도 모르냐고 놀림을 받고 심하면 반사회적 인물로 반항적인 아이로 탄압을 받게 된다. 결국 모르면 외우는 것이 일상이 되고 곧 외운 것이 아는 것이 된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공감하지 않아도 피상적으로 외워서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런 지식의 위에 또 지식이 쌓이고 그 위에 또다른 지식이 쌓이고 또 다른 지식이 그 위에 쌓이는 것이다. 물론 지식만 쌓이는게 아니라 그것에 따라 행동도 하고 맘에 없는 말도 하고 자기합리화도 하면서 우리는 인지부조화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본래의 자기가 믿지 않던 믿음들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 우리는 우리 내부에 엄청난 뭔가를 가지게 된다.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세상 일에 답을 주는 뭔가를 말이다. 나는 그 뭔가를 꼭 잘못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것은 마치 소화되지 않은 음식처럼, 그 내부에 뭐가 있는지 알수 없는 거대한 쓰레기더미처럼 난장판으로 정리되지 않은채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을 다르게 가지고 살도록 강요한다. 우리들 안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열한다. 그렇게 해서 온 세상은 진짜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즉 진짜로 자기머리로 생각하고 가슴깊이 공감하는 것은 없으면서 피상적으로 모든지 아는 척하면서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믿고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태는 인지부조화 이론이 말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현실을 보여준다. 기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최소한 자신의 믿음에 따라서 살고 있을 수 있다. 그나 그녀는 자신의 믿음에 따라 일관성을 추구하므로 언젠가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수정해서 상황을 개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어떤 면에서 그것보다도 못하다. 스스로가 진짜로 믿는 것과 알고 있는 것, 혹은 내가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도대체 내가 뭘 믿고 있는지 조차 알 수없게 만든다. 지식과 믿음과 인지부조화와 위선은 허상을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우리라는 존재를 한없이 희미한 유령처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는 뭘 믿는지도 모르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식과 믿음이 서로 다르다는 현실을 지적받아도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그게 뭐? 안그런 사람도 있나?  

 

프로이드의 억압으로 돌아가보자. 프로이드에 따르면 우리는 뭔가를 믿고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억눌러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는 모르게 된다. 그게 무의식에 있는 욕망이고 기억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의 수준에서 스스로가 이러저러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기가 곰이라고 믿게된 원숭이가 된달까.

 

하지만 억눌려진 무의식, 변하지 못한 의식바깥의 것, 우리가 진짜로 믿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의식 상태로서의 나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기이하고 심지어 병적이라고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이러한 현실을, 우리의 병적으로 행동하는 현실을 설명하고 세상을 살아갈만한 것으로 만드는 이론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욕망과 죄악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 고작해서 우리는 왠지 몰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라고 답한다. 이것은 잘라진 뇌를 가진 사람의 답에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우리의 이해할 수 없는 욕망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욕망에 패배하여 그렇게 행동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왜 욕을 했을까. 왜 기름진 음식을 먹었을까. 왜 야한 잡지를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샀을까. 왜 시험공부를 더 하려고 했는데 잠이 들었을까. 왜 나는 저 나쁜 남자의 말을 들을까. 왜 나는 저 나쁜 여자에게 유혹될까.

 

당신이 언제나 유혹에 지고 죄책감에 젖어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왜 그러는지 답을 모른다. 당신의 정신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분명 이런 상황에 관련이 있는 것같다.

 

돌멩이를 위로 들어올렸다가 놓으면 돌멩이는 바닥에 떨어진다. 우리는 거기에서 돌멩이의 욕망이나 돌멩이의 죄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돌멩이의 본성때문에 즉 중력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성질때문에 그렇게 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떨어지는 돌멩이를 볼 때는 거기에서 돌멩이가 왜 떨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본다. 우리가 죄책감이나 욕망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성, 다시말해 우리 행동의 이유를 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자신을 그 돌멩이를 보듯이 볼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당신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닭이라면 당신은 바닥에 있는 지렁이를 쪼아먹으려고 하거나 달걀을 품으려고 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비정상적인 욕망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난 인간인데 왜 저런걸 하려고 할까. 안하려고 하는데 자꾸하게 되는군. 난 죄많은 인간이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은 닭인 당신은 그저 닭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당신은 닭처럼 행동하는 당신이 당혹스럽다. 그것을 막아보려고 생각하지만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은 힘이 당신을 속박하고 있고 당신은 자유롭지가 않다.

 

이 예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아마도 닭은 인간으로 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있는 것은 타고난 성질도 있지만 살면서 변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톱이 망치가 되고 망치가 톱이 되는 것이다.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그 본성이 가장 많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중에서도 가장 긴 유년기를 보내며 이때문에 어린 인간은 매우 무력하다. 우리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변화를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다. 간단히 삶의 일관성을 포기하고 피상적으로 사는 태도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과 죄라는 이론에 빠져 드는 것이다. 우리가 온갖 욕망에 시달리고 항상 스스로가 부자유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때문이 아닐까.

 

간디가 좋아했던 힌두교의 성전인 바가바드기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감각의 대상은 거기에 대해 단식을 하는 사람앞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이를 보게 될 때는 그 맛도 사라진다. (바가바드 기타. 2장 삼카요가 59)

 

지극히 높은 이를 본다 혹은 진리를 본다라는 말들은 단순히 우리가 조악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때 우리의 욕망과 죄의 문제가 사라진다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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