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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새빨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6

by 격암(강국진) 2014. 5. 19.

6.

 

이제 이 글들의 제목이 새빨간 거짓말인 이유를 설명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 이유는 한가지가 아니다.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거짓말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새빨간 거짓말은 물론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위선과 거짓위에 서있는 유령이다. 진짜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의 등뒤에서 몸부림치면서 자유를 얻으려고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글들의 제목이 새빨간 거짓말이 된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이 글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소설처럼 시작해서 소설이 아닌 것으로 변하고 그리고 소설이 아닌 채로 끝이 난다. 소설인 척 한 것이 바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중 일부는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주로 여기에 쓸 내용을 위해서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앞에서도 썻듯이 경이를 느끼는 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대로 말하자면 이 글을 읽는 사람과 일종의 게임을 하고 싶었다. 장기를 두면 이쪽에서 이렇게 말을 움직이면 상대방은 그에 대해서 반응해야 한다. 대화를 한다면 내가 질문을 한다면 상대방은 그에 대해 반응을 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을 때 독자가 영화를 볼 때처럼 뒤로 의자안에 푹 주저앉아서는 수동적인 자세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어떤 종류의 위화감을 느끼게 되기를 바랬고 그게 계속 되기를 바랬다.

 

이 글을 읽으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다. 내가 창조한 그 엄청나게 섹시하고 매력적인 그 여자와 주인공 남자는 과연 섹스를 하게 될 것인가 아닌가. 나는 그 질문을 던져놓고는 관련되어 있는 듯한 이야기를 하기는 하는데 그 답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처음의 소설같은 부분에서 창조된 세계는 그냥 열려있다.

 

소설은 작가에 의해서 창조된 닫힌 세계다. 그것은 어떤 지식을 설명하는 수필도 그렇다. 나는 앞에서 시작한 소설을 완결 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묘사된 세계안에서 이 글에서 한 이야기를 끼워넣어서 그 소설의 세계안의 인물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변하는가를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을 글쓰는 이가 만들어 낸 세계에 가두는 것이 된다. 그 소설속의 세계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읽기를 중단하거나 소설을 잊어버릴 것이다. 만약 내가 아주 훌룡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기술을 습득한 작가라서 그 세계속에 독자를 강하게 끌어들인다면 그 소설에 공감한 사람은 마치 그 소설속의 인물처럼 느끼고 생각하려고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티브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 그 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사방에서 쉽게 보지 않는가?

 

나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누구도 겨우 글자 몇개로 된 세계 속에 가두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그것은 경이의 느낌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찾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준 세계속에 빠져서 환각속에 사는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독자를 세뇌하는 것이다. 아 이렇게 말하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세계는 이런 규칙에 의해서 움직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는 영화속의 세계에 빠져들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게 아무리 아름답고 옳은 세계라도 그것은 인간이 만든 작고 닫힌 세계다.

 

내가 어떤 철학적 시스템이나 과학적 사실들을 설명하는 에세이를 써도 마찬가지가 된다. 내가 만약 이 글을 삶에 대한 철학적 일관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독자는 이제 마치 세미나에 참석한 청중과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당신은 앞으로 뭘 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뭔가를 미리 단정짓게 된다. 소설이라면 이런 것은 그저 개인적 느낌이지라고 생각할 것을 지식을 전달하는 세미나라면 모든 자세한 사실들이 얼마나 엄격하게 옳은가 하는 것에 즉 세세한 세부사항이 얼마나 정확한가 하는 것에 더 주목할 것이다. 사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스포츠카라도 부품하나가 빠지면 앞으로 안가는 쓰레기가 된다. 따라서 어떤 지식의 시스템을 팔려고 나온 세일즈맨앞에 선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그걸 자세히 보려고 한다. 그런데 때로 그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때문에 우리는 요점을 놓친다. 이 경우는 주로 바로 그 위화감이다. 느끼질 않고 논리만 따진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만약 당신을 설득할 수 있을 만틈 충분히 많은 사실들을 가져다 대고 논리적인 헛점이 없는 어떤 논리적 시스템을 제공한다면 당신은 그걸 믿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순간 당신은 그 시스템에 갇히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그 시스템의 오류를 밝혀 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거기서 탈출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들은 다 맞는데 말이야라는 식이다. 천재적 인물들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넣었던가. 나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어떤 특정 논리나 사실이 틀린 것으로 전체가 무너지는 논증은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무한한 세부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고 싶은 것은 이것이 게임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고의적으로 이것이 나라는 필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연극을 하거나 콘서트에 참가한다고 해보자. 그런 것도 일종의 하나의 세계다. 바깥세상과는 다른 규칙과 정체성을 가진 세계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대개 연극을 하면서 연극바깥의 세상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콘서트에 참가하면서 콘서트라는 공간 바깥 세상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바깥 세상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떤 배우들은 작품속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콘서트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광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게임을 하면서 그 안에 몰입할지언정 그 게임바깥의 세상을 완전히 잊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세계에 있으면서 기이한 위화감을 느끼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다. 보드 게임에 몰입하여 지금 이 게임에 목숨을 걸 것처럼 흥분하고 있어도 우리 마음에는 이 보드게임 바깥의 세상이 있으며 이 게임은 진짜로 목숨을 걸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이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도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저 밑에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역할극을 하는 것이 심리적 치료의 효과를 주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역할을 바꿔서 말을 하는 연극을 할때 거기에 집중해 있어도 역할극에 참가하는 사람은 그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을 중지하지 않는다. 즉 시어머니는 자신이 며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며느리처럼 연기하고 며느리는 자신이 시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시어머니처럼 연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게임에 참가하면서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고 그 세계를 더 큰 세계라는 문맥속에서 쳐다보는 기회를 얻는다. 그들은 자신이 속하는 세계를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다시 말해 이 세계는 보이는대로가 다가 아니라는 경이의 느낌을 유지하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가 이러저러한 참가자가 등장하고 이러저러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각에 완전히 몰입해 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 세계에 갇히게 된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오직 그 작은 게임의 세계다. 우리는 이것은 사실 더 큰 세계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게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우리는 바로 위화감, 세계에 대한 경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대안적 삶을 찾아서 어떤 마을을 시험적으로 만든다고 해보자. 그 마을을 이리저리 설계하고 사람들은 이런 저런 규칙을 가지고 살게 한다. 그런데 그 대안적 마을에 있어서 절대로 잊혀지면 안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 규칙에 매몰되어 그 마을 안쪽 밖에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마을은 더 큰 세계안에 존재하며 우리는 그 바깥쪽 세계와도 조화를 이루며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을 잊어버린 나머지 그 마을에 언젠가 큰 위기가 닥치게 되게 되거나 그 마을은 마을 바깥쪽을 그저 침략하고 정복할 대상으로 보는 태도를 취하게 되어 환경과 조화롭게 지내지 못할 것이다. 환경과 싸우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환경문제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환경문제에 대한 이해를 마치 빵을 아껴먹자는 정도로 이해한다. 즉 자연은 한계가 있으니까 아껴서 소비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중심의 문명에 그사람이 몰입한 결과다. 그 사람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경이감,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더 큰 것이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는 보드게임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자기 엄마를 적으로 착각하게 된 어린애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가 그 아이에게 이봐 꿈에서 깨라고. 이건 게임이야 게임이라고 말해줘야 하는거 아닐까.

 

게임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진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무한성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의미는 문맥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지는 근본적 모순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준으로 문맥을 파악하여 삶의 의미를 찾으면 이 세상에는 실은 항상 더 큰 문맥이 존재한다.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위해 헌신한 남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가족만 바라보다 보면 당신은 사회를 잊으며 당신과 당신의 가족의 미래가 지역사회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당신의 아이도 아내도 그리고 당신도 그 주변사람의 영향을 받고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러므로 도시락을 싸주면서 맛있는 것은 친구주지 말고 너만 먹으라고 말하는 부모는 진짜로 자식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아이는 맛있는 것을 독점하는 대신 친구따위, 주변사람따위는 너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울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게 될까?

 

당신은 당신의 회사에 의리를 지키고 충성한 사람일수 있다. 그러나 그 회사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누군가를 착취해서 당신에게 월급을 주고 있다면 어떤가.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이렇게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 즉 우리 인생의 의미를 따지는 일은 우리가 어떤 문맥에서 우리를 보는가에 달려 있다. 같은 망치도 어떤 때는 도구고 어떤 때는 잠재적 살인무기이며 어떤 때는 그저 고철이다. 우리라는 존재들도 그렇다.

 

인생의 부조리함이란 그 문맥이 실은 무한히 끝나지 않고 뻣어나간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내 인생의 의미는 이거라고 어딘가에 선을 그어 문맥을 찾아내고 그것을 고정시키는 순간 그 사람은 그 세계에 갇힌다. 그 의미에 몰입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그래서 완전히 그 세계바깥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동시에 위험을 동반한다. 언젠가 당신은 어떤 계기로 깨닫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조금만 눈을 더 크게 뜨면 완전히 파산한 인생이었다고. 딸만을 위한다고 딸과 엄마라는 세계에 몰입한 여성이 그 딸이 자기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살기시작하자 인생의 허무를 느끼듯이 말이다.

 

그래서 사는 것의 의미는 물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고 어떤 의미에서 나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삶의 궁극적 의미를 묻다보면 문맥의 무한폭주라는 논리적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뜻도 모르면서 무한이나 신같은 개념을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더 더 큰 문맥으로 문맥을 넓혀나가기만 좋아하고 궁극을 찾아헤매는 사람은 일종의 허무주의에 빠진다. 해도 해도 궁극은 찾아지지 않고 내 앞에 있는 일상은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게 된다. 눈앞의 게임에는 집중도 안하면서 궁극의 게임만 찾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차피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비슷한 태도를 가지게 되기 쉽다.

 

나는 우리가 우리 앞의 인생에 충실하면서, 거기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감각, 이 인생도 더 큰 문맥의 일부라는 위화감, 삶과 세상에 대한 경이감, 우리의 무지와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한 감각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우리가 인생의 더 큰 문맥을 보는 쪽으로 성장하면 또 그 단계에서 경이감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것 즉 인생조차 게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이 글의 처음에 나왔던 남자주인공에게 있어서 그 매력적인 여성은 인생 그 자체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너무나 행운아라서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생각할때조차도 삶에 대한 위화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그 남자는 꼭 그 여자를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아직 그 세상에서 알아야 할 것, 배워야 할 것, 기뻐해야 할 것이 많다면 우리는 그 인생을 서둘러 떠나야 할 이유가 없다. 더 큰 문맥을 찾는 다고 해도 거기도 여전히 유한한 인생이다. 부자연스럽게 뛰어가야할 이유가 뭐겠는가. 언젠가 그들은 좋은 부부가 되어 같이 더 큰 문맥으로 움직여 갈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앞의 삶에 집중해서 살아야 한다. 그저 궁극만 추구하려고 했다가는 우리의 삶은 파산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책감이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고민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더 큰 진리를 느끼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우리를 발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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