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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새빨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5

by 격암(강국진) 2014. 5. 19.

5.

 

문제의 핵심은 나와 세계에 대해 놀라워 하는 마음이다. 우선 우리는 놀라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누군가가 당신의 몸과 정체성을 강탈하려고 한다. 누군가 당신은 꿈속에 있습니다라던가 당신은 미쳐있습니다라고 지적하는데 아 그래? 그러던지 말던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사는데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흥미로운 삶을 살기도 어려울 것이고 흥미로운 대화의 상대가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나와 세계에 대해 놀라워 하는 마음을 잊는다. 그리고 수렁에 빠져들듯이 뻔한 인간으로 혹은 인간 이하가 되는 것같은 어떤 것으로 변해간다.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 중 일부는 깨어있고 적어도 이따끔식은 깨어난다.

 

우리가 자기를 찾는 것, 나와 세계에 대해 놀라워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인류문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데 왜냐면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문명의 역사인데 생각해보면 그 놀라워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여전히 원숭이처럼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냥 살던대로 살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놀라워하는 마음을 유지한 사람은 많다. 그 사람들을 내가 다 알지도 못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말해보자면 일단 소크라테스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쇠파리로 부르면서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을 잠들지 못하게 괴롭히는 존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의 광장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질문을 계속 퍼부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알게되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뭔가를 안다라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니 실은 그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모르는 것을 아는 소크라테스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보다 현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아니 당신들은 이렇게 놀랍고 무섭고 알 수 없는 것들 천지인데 뭘 그렇게 이거니 저거니 확실하다면서 살고 있는거요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질문하는 쇠파리, 남을 귀찮게 하는 쇠파리로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질문을 계속하다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아테네시민으로 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탈출을 권유받았고 탈출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이 믿는바대로 살다가 믿는바대로 죽었다.

 

중요한 것은 그는 끝까지 이제 답을 찾은 사람이 되고 아는 사람이 되어서 죽지 않고 아 이건 너무 신기한데라고 자신과 세계에 경이를 느끼는 사람, 질문을 계속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질문을 계속했다는 말은 찾지는 못했으나 답이 있을 것은 믿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경이를 느끼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답이라고 단정한 사람이다.

 

놀라워하는 마음을 유지한 또 다른 사람으로 노자를 생각해보자. 노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 만만하건만 나홀로 궁핍한 것같도다. 내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텅하도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영특하고 똑똑하건만 나 홀로 우둔하고 멍청하도다. (노자 20)

 

노자는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라는 말로 도덕경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끝없이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을 한다.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것이 아닐까? 도를 따르면 모든 것이 저절로 행해진다. 인위적으로 다시 말해 욕망을 일으켜서 할 필요가 없다. 노자의 메세지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차이가 없다. 흔히 노장이라고 같이 말해지는 장자도 크고 작게 사는 것에 대해 반복해서 말한다. 호접몽의 이야기로 꿈속에서 사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잠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경이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게도 말하는데 우리는 남이 준 답 이야기를 들으면 또 서둘러 거기에 빠져들어서는 그걸 외우기 바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물론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다시 간격이 생기고 우리는 욕망과 죄의 순환으로 빠져들어간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아 그렇구나. 이거 큰일이구나. 내가 이렇게 있어서는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고 가슴이 뛰는 그것이다. 그 가슴 뛰는 체험이 없으면 우리는 다시 잠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어떤 대단한 성인의 말이건 철학자의 말이건 그걸 외우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가슴이 식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경이의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는지를 항상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 경이의 마음이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식은 쌓일 것이다. 그 경이의 마음이 없다면 지식이 쌓여도 소용이 없고 그보다 훨씬 전에 이런 건 도대체 뭐하러 하는가 싶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걸어다니는 로보트나 좀비가 될 것이다. 이웃이 죽어나가도 그게 뭐 어떻다는건가라고 말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환자가 될 것이다.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성인의 말씀도 소용없는 것이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이 경이에 답해온 역사다. 그것에는 당연히 무수히 많은 측면이 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흥미있게 생각하는 측면에는 수학의 역사가 있다. 수학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서구문명의 역사의 중심축인데 동양이라고 해서 수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구에서만큼 수학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리스 클라인은 수학의 확실성이라는 책에서 이 수학의 역사를 잘 기술하고 있다.

 

일단 피타고라스는 수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를 세우면서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이런 태도는 신이 나오는 종교이외에 우리의 경이에 대한 첫번째 답이 수학이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런데 진리는 존재하는가. 찾을 수 있는가. 그런 것같다. 바로 피타고라스의 정리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기하학적인 지식은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진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 더하기 일은 이다. 이것은 확고한 진리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만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진리도 있더라는 것이다. 수학이라고 했지만 수학의 정신은 논리적 엄밀함이라는 형태로 우리가 통상 수학이라고 생각하는 분야를 넘어간다.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야 확고한 진리를 찾을 수 없다면 생각은 뭐하러 하겠는가.

 

훗날 데카르트도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질문에 빠진다. 도대체 이 세상에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도 있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있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확고한 진리를 알 수가 있다. 데카르트도 해석기하학의 창시자인 수학자이기도 하다. 수학은 여전히 실용적인 목적이전에 진리는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로 힘을 발휘한다.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한 케플러도 뉴튼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도 모두 자연에는 수학적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가진 법칙이 있으며 이는 신의 권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칸트시대에도 유클리드 기하학은 이 세상에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라는 강력한 증거였다.

 

그런데 수학은 오히려 크게 발전하면서 점점 애매해져 간다. 음수가 나오고 복소수가 나온다. 미적분이 나오고 무한급수도 나온다. 음수도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복소수는 이게 숫자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직관적으로 수학적 법칙의 진리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증명은 애매해졌고 점점 더 모든 수학이 확실한 진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졌다. 18세기가 되자 수학이 진리는 발견될 수 있는 증거를 제공한다기 보다는 진리는 직관적으로 발견될 수 있기 수학들이 믿어져야 한다는 식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응용분야는 점점 커져서 수학의 발전은 주로 현실적 편의성을 목적으로 이뤄진다. 써보니 그 공식이 현실에서 통하는 답을 주더라고 하면 엄밀한 증명은 곧 발견될거라고 넘어가는 식이다.

 

그리고 드디어 19세기가 되고 20세기가 되자. 문제가 터졌다. 가장 피부에 와닿는 폭탄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절대성이 무너진 것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 이것은 진리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수천년을 믿었는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면서 기하학은 절대진리라는 믿음은 무너졌다. 이제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삼각형 내각의 합이 정확히180도 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것은 진리의 영역에서 실험과 관찰의 영역으로, 뒤집혀 질 수 있는 사실로 추락했다.

 

일더하기 일은 이가 되는 수학이 통하지 않는 수학도 등장했다. 바로 집합론이다. 두개의 집합이 있는데 그 집합의 원소가 같을 때 두 집합을 더하면 더해진 집합은 그냥 원래의 한개의 집합과 같다. 한 마을에 여자가 10명있고 학생이 20명 있다고 할때 여자이거나 학생인 사람은 30명이 아니다. 그보다 숫자가 작다. 집합론의 선구자인 칸토르는 무한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정신병이 발발했고 비참하게 죽었다.

 

마침내 한 수학의 시스템안에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나오자 수학의 신화는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이 문제는 단순히 수학자의 고민의 문제가 아니다. 수학의 정신은 서구 문명의 기초다. 우리는 물질로만 사는게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살며 서구문명을 지탱해온 믿음의 근원에는 확고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수학적 정신이 있다. 따라서 수학의 붕괴는 단순히 고도의 전문가들의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서구 문명의 윤리적 문제가 된다.

 

케플러 같은 사람이 고된 노력을 해서 계산을 하는데에는 개인적인 야심을 포함한 여러 욕망이 관여했겠지만 수학적 아름다움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재능있는 사람이 자신의 평생을 거기에 바친 것이다. 이제 전같으면 철학적이고 수학적인 문제로 세상의 진리를 탐구할 사람들이 뭘하게 될까. 적어도 그들중의 일부는 돈을 주물럭 거리는 세계로 갔다. 신비는 깨졌기 때문이다.

 

윤리적 가치적 근본이 붕괴된다고 해서 세계가 갑자기 문명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구름을 뚫고 세운 바벨탑이 사실은 모래같은 기반위에 세워진 것이라서 무너지는 과정에 있다고 해도 무너지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다. 설사 서구문명이 붕괴중이라고 하더라도 인류가 쌓아온 기술과 물질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이 없음을 깨달았을때 우리는 가치적 윤리적 붕괴를 겪는다. 우리는 마치 갑자기 도서관에 사는 원숭이처럼된다. 수많은 책들은 원숭이에게 의미가 없다. 그래도 그 책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뛰어다니다가 불을 지르고 언젠가는 그 도서관이 불타없어질지도 모른다. 과연 문명의 붕괴라는게 상상이고 멀기만 한 일일까.

 

21세기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붕괴같은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따지고 보면 숫자에 불과한 돈이나 자가용비행기, 고급 자동차를 위해 수없는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는 회사들에 대해 듣는다. 한쪽에서는 푼돈때문에 사람이 죽는데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에서 돈이 흘러다니는 것을 보면 돈은 무한히 추상적으로 보인다. 각국의 정부는 말그대로 하늘에서 돈을 창조해서 뿌린다. 미래세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른다. 돈을 펑펑쓰다가 죽으면 살아남은 자식이 책임지겠지라는 식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제정신인가.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인가. 우리는 환상을 보는 헛깨비들에 의해 조종되어 바보 같은 일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지속가능한 세계를 꿈꾼다. 공유경제를 말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빈곤과 부의 불균형을 해결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분주하기는 하지만 꼭 잘될 것같지는 않다. 수학의 추락으로 인해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이 과연 꼭 먼 미래의 일이기만 할까. 우리는 문명의 새로운 기초를 세울 수 있을까? 우리의 가슴에 가치있는 삶에 대한 믿음이 다시 거세게 살아날까?

 

기술적인 낙관론을 펴는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가 낙원으로 가기 직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약속은 대개 과장되어져 있고 실상 그들의 약속이 옳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윤리다. 복권을 맞을지 안맞을지 몰라도 복권을 맞아도 문제라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중에 금방 그 돈을 다쓰고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많다. 오히려 복권에 당첨되었기에 인생이 더 망가진 사람도 많다. 어떤 새로운 기술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해줄거라는 기술적 낙관론은 우리를 구원해주기 어렵다. 그리고 윤리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분리. 이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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