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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은 삼성보다 못한가.

by 격암(강국진) 2014. 6. 9.

최근 김승수 전북대 교수가 삼성의 국가 지배를 비판하는 발표를 했다 ( 이에 대한 기사는 여기 ). 나는 그렇게 자주 재벌 비판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재벌에 의한 국가지배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관심있게 이 기사를 읽었는데 읽으면서 말하자면 반대의 질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왜 한국은 삼성보다 못한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교가 안된다고 처음부터 단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에 동의하며 어떻게 되건 나는 한국이 총체적으로 말해 삼성보다 못하다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비교가 원래 문제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시작해야 우리의 모습을 알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이 삼성보다 못하다라는 문장은 아주 많은 오류가 있지만 그 안에 일말의 진실도 없다고 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삼성을 비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 삼성에 입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삼성이란 집단이 가지는 부작용에 대해 아무리 길게 쓴다고 한들 삼성이란 이름처럼 한국출신의 기업으로서 세계의 일류 수준에 도달한 이름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삼성은 분명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삼성이 그렇게 못되었다고 해도 적어도 삼성은 소니를 제쳤고 한국출신의 기업도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구글같은 세계적 기업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납득시켰다. 


언제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남이 한 일에 대해 그거야 이러고 저러니까 된거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라던가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간단히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은 공평하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한국역사에서 김대중 노무현의 당선에 대해 항상 경의를 표하는 편이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지금의 정치인들이 쉽게 말할 뿐이다. 그들은 당선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며 그것을 쉽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신용할 수 없다. 일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의 어려움을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을 뭘로 신용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삼성을 간단히 말한다는 것은 삼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 이상으로 꼴불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속에 있는 진실이 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한국은 삼성보다 못한가.


이야기를 돌려보자. 솔직히 당신은 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는가? 국가가 기업과 뭐가 다르냐고 하면 당신은 기업은 기본적으로 소유주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는 그 공동체의 공익을 추구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문제는 현실에서 정말 그러냐는 것이다. 


어떤 문장은 종종 100% 진실도 100% 거짓도 아니다. 한국이 삼성보다 못하다라는 문장이 그 한 예다. 또 다른 예는 민주정부라고 불리는 우리의 정부는 실제로는 다수의 국민들을 착취하고 그 책임을 외면하는 도구로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거를 한다. 부정선거건 합법선거건 선거를 해서 누군가가 뽑히면 국민들은 누군가를 뽑은 죄를 진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의 원죄같은 느낌인데 국민으로서 선거를 했건 누구에게 표를 던졌건 국민 누구도 누군가가 선거에서 당선되게 만들었다는 책임, 민주공화국의 국민이라는 그 원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원죄때문에 그렇게 뽑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그들이 조정하고 혹은 그들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이 아무리 국가 공동체의 미래와 자산을 팔아먹어도 제대로 반응도 못한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지난 3월에 이명박 현오석등 5인을 국가 부채 5적으로 규정하고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여기). 노무현 정권 말엽에 571조 2천억이었던 정부부채가 이명박 정권 5년과 박근혜 정권 1년을 거치며 481조 8천억이 늘었다고 한다 (여기). 이 양대노총의 주장은 국가 부채 5적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 빚도 안생겼으니 이들은 국가의 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국가부채는 심각하지만 이것도 내가 느끼기엔 문제의 일부 그것도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얼마전 일어난 세월호 사건의 단초가 된 운행할수 있는 선박연령을 늘려준 문제도 이명박 정권때의 일이며 무엇보다 부정부패가 말할수 없이 늘었다. 지금 MBC, KBS가 다 마비상태일 정도로 사회는 불투명해 졌으니 이는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창고와 미래가 얼마가 털렸는지 계산이나 나오겠는가. 숨겨진 부채는 얼마일 것이며 계산 안되는 손실은 얼마일 것인가. 


예를 들어 개성공단의 가치는 얼마였을까. 얼마전 북한과 일본이 만나 실질적 수교단계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해서 이러다간 한국은 미국 일본 북한 중국 모두에게 그저 들러리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 경제협력의 가치는 얼마였을까. 


현실에 존재하는 정부나 국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세월호사건에서 본다. 사고가 애초에 터진것도 부정부패 때문이다. 사고가 터지자 책임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밖에 대통령도 누가 책임인지 모르고 청와대도 우리가 콘트롤타워가 아니라는 말이나 한다. 사람이 뱃속에 갇혀서 물로 들어갔는데 해경은 한가하게 민간업자를 누구를 해야 할까를 가지고 시간쓰고 정작 그 민간업자인 언딘은 앞에서 길이나 막다가 시간 다쓰고 나서  '누가 물에 빠졌데요? 우린 구조업체가 아닌데..' 이러는 식이다.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던 해경조직, 경찰조직은 언론과 경찰과 정부에 학부형들이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매우 효율적이고 능력있는 조직으로 변한다. 그새 사복경찰 많이 깔아서 정보도 빼가고 사진채증할 경찰, 학부형 가로 막을 경찰이 어디서 그렇게 많이 있었는지 우르르 등장한다. 이 난리속에서 오히려 국정원의 지난 대선 선거조작 혐의만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 간다. 


만약 조선시대라면, 지금이 왕조라면 민란이 일어났을것이다. 책임은 왕이 져야 하니까.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국민이 정부를 선택했다는 원죄때문이다. 정치와 정부는 오직 나쁜 일에 대한 책임회피라는 목적에만 종사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유병언 같은 사람이 잘먹고 잘사는 그런 세상이 존재하는거 아닌가? 정부가 빚도 탕감해주고 돈도 꿔주고 법도 바꿔서 낡은 배도 사오게 해주고 말이다. 


왜 한국은 삼성보다 못할까. 그 이유는 적어도 두가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현실의 한국은 사상적으로 이념적으로 종교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그걸 뭐라고 부르건 산산히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삼성이란 집단은 상대적으로 아주 이념적으로 단순한 집단이다. 


우리는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더라도 분열에 대한 댓가가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또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본점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국민 전체에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 그것이 너무 약하다. 한국은 공화국이냐 왕정이냐에 대해서도 일제시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단호하게 하나로 뭉쳐져 있지 않다. 


자유라고 하면 미국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살아보면 현실은 그와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자유를 위해서 아주 많은 부자유를 시민들에게 요구한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이라고? 미국같은 곳에서 세월호 사건이나 태안 기름유출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면 재판에서 기업과 국가는 천문학적인 배상을 하게 되는게 보통이다. 그러므로 현대자동차같은 곳도 한국에서는 배상을 안하지만 미국에서는 엄청난 배상을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미국처럼 규칙많고 법많은 나라가 없다. 즉 어떤 면들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다. 그러니까 다른 면에서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은 단호하게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므로 자유가 있는 곳도 없는 것이다. 


한국사람은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이 어떤 관점에 따르면 미쳤다. 미친 사람들의 집단이 잘돌아갈리가 없다. 종종 우파나 자유주의 진영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여당지지자들은 한국에는 많은 종북집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종북집단은 미친것이다. 그에 반대편에 서있는 야당의 다수는 빨갱이나 공산당 공포증에 걸려서 뭐든지 종북으로 생각하고 생각에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그들이 미친것처럼 느낀다. 


또 한국만큼의 경제수준에 도달한 나라중에 한국처럼 종교에 미친 나라를 나는 모른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정상적 종교를 믿는다고 주장하거나 안좋은 누군가에 대해서는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할 테지만 다른 절, 다른 교회를 가르키면서 저들은 모두 사이비 종교를 믿는다고, 한국에는 종교적 광신자가 많다고 하면 그들도 동의할 것이다. 세월호도 구원파가 연관되어 수사받고 있지 않은가. 삼풍백화점 사장도 고문경찰관 이근안도 나중에 전도사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가정폭력으로 수사받는 서세원도 한때 교회를 운영했다. 


이러니 한국 사람은 '어떤 관점에 따르면'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이 미친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미친 사람들의 집단이 잘돌아갈리가 있는가? 나쁜 것은 전망은 더 안좋다는 것이다. 급격한 고령화는 문화적 변혁을 힘들게 한다. 다들 고집센 노인이 되서 이대로 굳어지면 그 미래는 과연 아름다울까?


한국사람은 근면하다. 게다가 문화적으로 교육수준이 높다. 문맹률이 낮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 부모들이 몸바쳐 자식을 교육시킨다. 그러니까 일단 뭉치면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낸다. 그것이 삼성의 성공이유다. 외국인들이 놀란다는 한국인들의 저돌적 경제 성공의 이유다. 우리처럼 못하는 후진국과 우리가 다른 점이다. 


그런데 삼성인이 아닌 한국인들은 갈라져 있다. 그게 답답해서 인지 이젠 거의 다들 미칠 지경인것 같다. 각자 살자는 되지도 않을 말이 때때로 무서운 설득력을 뿜으면서 들린다. 


또다른 하나는 삼성은 외적 평가에 노출되는데 한국은 훨씬 덜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투명성의 부족이 한국을 수렁에 빠뜨린다.  즉 삼성은 어차피 한국 시장만으로 큰 것이 아니다. 나가서 외국인들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상장도 했으니 어느 정도의 투명성과 절차를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부정선거와 불법선거운동이 얼마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러나 엄격하기로 말하자면 돈의 세계가 훨씬 엄격할 것이다. 누가 가짜로 주식찍어서 삼성주식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한국의 정부빚보다 삼성의 빚이 훨씬 더 믿을 만하다. 한국은 얼마든지 속일것 같지만 삼성이 그렇게 했다가는 주식시장의 복수를 받을테니까 훨씬 더 운신의 폭이 작다. 


책임도 확실하다. 삼성의 매출이 4분의 1이 된다던가 삼성이 천문학적인 빚을 져도 삼성전자가 계속 인기가 있고 삼성 가문이 계속 삼성을 지배할수 있을까? 이병철은 반인반신이시니 그 자손들이 계속 경영을 해야 한다고 할까? 


문제는 더 있을지 모르지만 한정없이 쓸수는 없으니 이런 문제에 대해 그럼 해결책은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끝을 내자. 당연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답보다 질문이다. 사람들이 공감하는 답이 어떻게든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한국 사회가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이 핵심이지 이글을 쓰는 내가 옳은가 틀린가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답에 대해 몇줄 쓴다면 그것은 답을 제시함으로써 생각하기를 시작시키기 위함일뿐이다. 


위에서 말한 두개의 문제는 사실 두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규범내지 어떤 국가적 정신에 공감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임의의 규범이나 정신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한국 사회가 보다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만드는데 더 효율적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안에서 제일 부족한 것은 바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즉 모두가 같은 것에 공감하면서 사는데 실패하고 있다라는 현실은 오히려 모두가 서로를 낮은 수준에서 서로 똑같이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의미의 철학 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티즈를 타는데 이웃은 BMW를 탄다. 다름이 존재하는데 문제는 이 다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다음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그 차이를 쉽게 판단한다. 즉 BMW 타는 사람은 훌룡한 사람, 마티즈 타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으로 판단 끝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방식은 매우 여러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각각의 모습도 다 존중받아야 한다


좀 다르게 보자. 여기 동네 이장이 한분 계시다. 그리고 여기 도지사가 한분 계시다. 어느 쪽이 성공하고 훌룡한 분인가? 답은 모른다다. 도지사가 아니다. 이렇게 규모를 간단히 넓히고 전국적으로만 생각하고 자기의 삶의 테두리에 집중하고 선택하고 각자 판단하는 것이 없을 때 온국민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라는 오직 한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추구하기 위한 무한경쟁의 지옥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물론 경쟁에 이긴자도 온국민의 욕을 먹게 된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한다는 것 즉 의미의 철학은 몇줄로 써서 다 설명할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은 아니다. 좋은 아빠가 되는데 그래 앞으로는 내가 더 노력하마라는 구호정도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름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위해서는 그런 각오와 다짐으로는 부족하다. 


의미의 철학은 의미에 대한 이론이다. 즉 의미는 어떻게 나오는가, 우리가 어떤 다름을 보았을때 그 다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장보다 도지사가 훌룡하다는 해석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마을의 존경받은 이장으로 사는 인생이 제대로 일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도지사가 된 인생보다 훨씬 훌룡하다라는 것을 보는데 실패한 것이다.


의미는 그와 관련된 문맥과 환경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문맥과 환경은 원한다면 무한대로 뻣어갈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다. 동화책은 공주가 있었습니다에서 그래서 행복하게 잘살았답니다로 끝날수 있지만 인생은 앞으로든 뒤로든 공간적으로든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든 끝없이 펼쳐질 수 있고 그 무한의 문맥속에서 여러가지 다른 의미가 발생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러한 점을 느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의 다음에 대해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다. 왜냐면 간장종지를 보고 밥그릇이 자신의 큰 것을 자랑하지만 밥그릇이나 간장종지나 바다에 비하면 비할수 없이 작은 물그릇이기는 마찬가지다. 맥주잔이 크리스탈 와인잔에게 크기를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 모두는 무한에 비하면 비할수 없이 작고 서로 다른 유한한 존재이며 각자가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다른 인생 여정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을 수도 없고 똑같은 문맥과 의미를 가지고 행복을 느낄수도 없다. 


수백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해보고 그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 남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 남자가 그 모든 사랑을 다 합해도 어렸을적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첫사랑의 기억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을때 그 첫사랑의 여자가 몸매는 누구보다 못하고 얼굴은 누구보다 못하며 가진 재산은 누구보다 못하고 심지어 인간성도 누구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다. 누군가의 마티즈와 BMW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걸 뻔한 의미를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수성의 결핍을 두려워 해야 한다. 그는 자기에게 정말 보석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마티즈를 쓰레기 같은 BMW와 바꾸는 일을 하게 될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의 철학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고 더구나 충분히 설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일단 공존할 수 있는 상태로 한국 사람들이 변했으면 한다. 그런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위해 우리는 개인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운동을 시도해 볼수도 있을 것이고 마을만들기 운동같은 것을 참여하거나 가족 여행을 추진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의미를 발견하는데 실패하는 병은 주로 너무나 오랬동안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이리저리 움직여서 마음이 풀리면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상식적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살수 있지 않을까. 세상이 뻔하고 당연하고 원래 그런 것으로만 보이는게 아니라 불확실성과 희망과 신비로 차있는 곳으로 보이게 되지 않을까. 그래야 국가란 상식적으로 이런 것이다라는 그 의미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까. 


적어도 서로를 미친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중 한쪽이 선거에 이기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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