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추석이다. 비록 해방이후 기독교 세력이 강성해 지면서 한국의 명절에 대한 끝없는 비판과 폄하가 이뤄져 왔으며 가면 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추석을 포함한 명절은 그래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석을 추석이라 부르지 말자던가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명절과 같은 것으로 이야기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아직 사회적으로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추석의 유래에 대해서는 통상 신라시대의 길쌈 놀이인 가배에서 유래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민족이 지켜왔던 제사의 풍습이 연장된 것으로 봐야한다. 즉 고구려나 백제 혹은 그 이전의 나라들도 여러가지 제사를 지내왔고 그 제사풍습들이 합쳐지고 변형되었지만 조상님에게 혹은 하늘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풍습으로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절에가도 천도제라는 것을 지낸다. 성당도 성인들에 대한 믿음이나 성모 마리아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을 가진다. 종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토속의 믿음들이나 후대 사람의 믿음에 따라 변형되기 마련이다.
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이나 귀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제사를 보는 관점은 많은 사람들과 다르지만 나는 명절과 그에 대한 남들의 일상적인 설명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제사상에 절을 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명절이라는 것이 나 하나의 일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11명씩 두팀이 하는 축구를 해도 축구를 하면서 왜 공을 손으로 잡으면 안되는가, 이번에는 축구골대를 삼각형 모양으로 하자 하는 식으로 계속 규칙을 바꾸는 것은 대개의 경우 바람직하지 않다. 남들은 이미 있어온 그 축구라는 형식속에서 연습하고 고민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내 맘대로 규칙을 바꾸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몇십명이 아니라 몇천만명이 천년이상의 길이를 가지고 살아왔고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가 그에 대해 존경심을 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깊은 생각이 없고 어설프게 자기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귀신이 어디있냐던가, 자기 신이 옳고 남의 신은 그르다고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말은 단순히 나는 안 믿지만 절은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귀신을 믿는다. 말이란 항상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우리가 잊지말아야 하는 첫번째 교훈은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관점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자기의 관점에서 등장하는 이름들, 결론들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 이미 말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믿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의 전자의 움직임따위의 설명을 들으면서 귀신은 반드시 안믿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애매한 의미를 가진다. 나는 귀신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귀신이라는 말로 표현된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귀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귀신이란 어떤 문화속에서 어떤 현상의 원인에 대해 붙인 이름일 뿐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같은 고대 그리스식의 천문학이 틀려있다고 해서 별들이 하늘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현상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뉴튼 역학이 맞으니까 태양이 돌고 있는게 아니다. 조상의 귀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제사같은 형식이 대처하려고 하는 어떤 현상의 존재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조상신은 있다.
설명이 있으니까 현상이 있는게 아니고 현상이 있으니까 우리가 틀리건 맞건 설명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무의식중에 이것을 반대로 생각한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보는 관점 즉 자기가 알고 있는 원인들의 조합으로 남의 설명이 올바르게 생각되지 않으면 그런 설명이 등장하게 된 현상까지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무시해 버리곤 한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와 너의 존재자체가 귀신을 믿는 것이다. 어느날 나무 밑에 있던 돌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움직였다고 하자. 그것은 마치 돌을 움직인 어떤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아니 그런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한다. 그럴때 우리는 그 돌앞에 보일듯 말듯 귀신을 보게 되고 귀신이 돌을 움직였다라고그 현상을 말할지 모른다.
이러한 것은 튜링테스트라는 인공지능에서의 해묵은 문제와 함께 생각해 볼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지능을 가졌는지 어떻게 아는가. 컴퓨터 공학자들은 무슨 대단한 방법이 있는게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결국 인간들이 보고 그렇게 느끼면 그게 지능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튜링테스트다.
심리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가 종종 엉터리 설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아왔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지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를때 종종 그 이유는 본인의 욕망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면술에 걸린 사람은 그렇게 대답한다. 좌뇌와 우뇌가 갈라져서 한몸에 두개의 의식이 존재하게 된 사람도 그렇게 대답한다. 내가 너라는 몸뚱아리 안에 이성을 가진 존재가 있다고 어떻게아는가. 아니 그전에 이 몸뚱아리안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논리적으로는 나는 나와 너라는 귀신을 믿는 것이다. 몸이 움직이는 현상을 보고 그 몸을 움직이는 원인으로서 뭔가가 존재한다는 설명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조상신이나 하늘님의 존재와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은 과학이 아니지만 영원히 과학이 아닐런지는 알수없다. 무엇이 되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정신이 함쳐지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게임을 하니까 축구리그가 계속될 수 있다. 사회의 윤리적 기초가 붕괴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많은 것들이 연결된 것이므로 존경심을 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건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건물의 기둥을 무너뜨리면서 리모델링을 하는 헛똑똑이가 되기 쉽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건물은 엄청나게 긴 세월동안 테스트 되면서 증축되어온 것인데 별 대단한 사람도 아닌 사람이 내가 다안다면서 잘난척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초는 모든 사람 즉 기독교 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지탱하고 있다. 그들도 한국어를 쓰고 한국의 관습에 따라 한국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미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할 분이 있을지 몰라 한마디해두자면 난 과학자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한 말은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보일 수는 있어도 과학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다만 과학 혹은 자기가 과학으로 생각하는 것을 맹신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의 맹신자라고 해도 대개 술자리에 가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분위기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경험은 해봤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분위기 때문에 술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 만이 그 술자리가 실은 굿이나 제사의식과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것이다. 많은 종교행사에 술이 등장하거나 심지어 환각제가 등장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매주마다, 가능하면 자주 자주 친구들과 술자리를 만들어 그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원시적 형태의 종교집회에 참여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술자리에 들어와 분위기를 깨버리는 행동을 하면 언짢다고 느낄 것이다.
술자리는 주로 그 분위기를 위해서다. 안그러면 싸구려 술을 혼자서 마시지 뭐하러 모이겠는가. 분위기같은거 사소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실은 그 사소한걸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있는가. 술자리가 아니더라도 가정의 분위기가 있고 직장의 분위기가 있고 사회의 분위기가 있다. 사실 분위기 같은 것은 실체가 없으며 사소한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시대의 어떤 주류적 설명이 만들어 내는 방어다. 거기에는 그런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걸 무시하라고 말하는 설명, 우리는 외로이 진공을 날으는 독립된 이상기체원자다라는 설명말이다.
더 길게 쓰고 싶지는 않다. 명절이란 소중한 것이다. 그 의미를 고민하면서 그걸 지켜가기 위해 그 형식을 바꿔야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너무 쉽게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 적절한 존경심을 보이자. 자기가 그러면서 거기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때, 저사람들이 왜 화를 내는지 참 모르겠다면서 내 믿음은 정론이고 저 믿음은 미신이라고 말하지 말자. 그건 믿음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뜻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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